② 전망 기반 패러다임의 전면화: 이제는 ‘버냉키 콜’?
좌우간 일련의 신뢰도 시험, 그리고 시장과의 묘한 긴장관계로 점철됐던 취임 1주년을 무사히 넘기면서, 버냉키도 이제 점차 새로운 입지를 추스르며 자신의 전략을 조율, 정교화하는 데 부심한 모습이다.
아마도 그 첫 번째 분기점이 집권 6개월째를 맞은 지난 2006년 7월 對의회 반기별 통화정책 증언이라 할 것이다.
여기서 그는 금리인상 (일시) 중단을 예고하면서도 이미 시장에서 기대된 바 이상의 구체적인 시그널(signal)을 자제하는 태도를 보였다. 자칫 시장과의 또 다른 커뮤니케이션 충격을 의식해서다. 대신 버냉키는 ‘신중한 전망’에 보다 관심을 집중했다.
다시 말해 경제 현황에 대한 평가와 중장기적 전망, 나아가 이와 결부된 각종 불확실성 및 정책 운영의 유연한 여지 등에 치중한 것. 당시 많은(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전문가들은 버냉키가 과거 그린스펀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혼조된 시그널” 대신 이처럼 “신중한 전망”에 치중한 점을 높게 평가했다.
또 이 과정에서 버냉키는 시장과의 과도한 연루 가능성을 적극 기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다음날 하원에서 가진 동일한 내용의 증언에서 시장과 관련된 한 질문에 대해 “시장에 대해 논평하지 않는다”며 잘라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그의 예의 ‘전망 기반 패러다임’이 이번 통화정책 증언을 기점으로 전면화되는 모습을 보인 점이다. 특히 그는 직전 발표된 미국의 6월 CPI 결과(예상외로 상승)에 대해 “현재 인플레에 대해 말할 게 없다”면서, “전망에 주목해야 한다”고 응수했다.
이런 태도는 최근 (특히 버냉키 시대) 연준을 비롯해 글로벌 중앙은행 전반에서 주류로 정착되고 있는 이른바 ‘데이터 의존 전략’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통계 집계의 속성상 ‘과거 지향적’인 데다 “시장을 한 걸음 앞설 뿐”인 이런 데이터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자칫 ‘근시안주의’로 경사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흔히 데이터 의존 전략의 장점으로 내세우는 (합리적 기대가설 하에) 그 때 그 때의 정보에 기반한 “한 번에 한걸음씩”의 전략은 결코 유연성이 될 수 없다.
또 대다수 통계들의 경우 사후 수정이 잦고, 또 경제의 일 단면만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도 문제다. 그리고 미국과 같이 사전에 각종 통계에 대한 시장의 ‘할인 메카니즘’이 정착된 곳에서는 정책 당국의 이런 태도가 ‘시장보다 단 한발 앞선 입지’ 탓에 결국 시장과 과도한 불장난에 휘말릴 가능성도 크다.
대신 버냉키는 미국 경제의 “이행기”적 성격을 환기시키면서, 중장기적 전망과 그리고 정책 운영의 불확실성과 미래 지향적 성격에 주목하는 한편, 이런 전망의 수립과 관련해 ‘정책 시차’, 특히 “아직도 ‘진행 중’ 정책 효과”를 고려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나아가 예의 ‘리스크의 비용․편익’ 문제도 부각시키고 있는데, 그린스펀의 리스크 관리 패러다임을 계승, 발전시킨 그의 전망 기반 패러다임의 한 가지 실례인 셈이다.
물론 데이터 의존 전략이라는 것이 중앙은행의 행보를 둘러싸고 뭔가 비법이나 준칙, 혹은 내부 정보나 발언에 치중하는 시장의 행태를 질타하며, 경제 분석 자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은 한 가지 장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다만 버냉키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때 그 때의 경제지표 결과가 아니라 ‘향후 전망과 결부된 정보적 함의’라고 지적하며, 그 한계를 넘어설 것을 촉구한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해야 할 문제가 있다.
그는 지난 2006년 3월 가진 한 강연에서 “어떤 면에서 핵심적인 통계는 전망”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런 전망을 구성하는 다차원적인 변수들을 환기시킨 바 있다. 다시 말해 “궁극적으로 정책 결정에 대한 로버스트한 접근은 다수의 정보 원천과 다수의 분석 방식들을 활용하고, 나아가 이를 자주 현실 시험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
그러나 이런 해명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망을 구성하는 정보원으로서 ‘과거 추수적 통계’ 대신에 ‘미래 지향적 시장 정보’를 특권화하고 있다는 의혹이 이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버냉키는 연준 이사 시절에도 “자산 가격과 수익률이 경제와 금융 여건에 대한 시의적절한 정보의 가치있는 원천”이라고 역설한 바 있다.
이런 시장 정보 중에서 버냉키 휘하 연준이 가장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인플레이션 기대’라 할 수 있다. 물론 인플레이션 기대라는 것은 “현대 컨센서스”로 자리잡은 물가 안정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대단히 중요한 변수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인플레이션 기대와 관련된 정보를 얻는 데 시장에 의존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연준도 지난 2006년 6월 FOMC에서 추가 금리인상을 결정하면서 이런 인플레이션 기대에 주목한 바 있는데, 여기서 특히 이른바 ‘TIPS’라 불리는 미국의 인플레이션 연동 국채에 관심을 환기시켰다.
매번 실시간으로 이용 가능한 금융시장 정보의 효능을 감안하면, 연준의 이런 관심도 무모한 것만은 아니다. 그 한계를 이해하고 다른 자료들로 보완할 수 있는 한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플레이션 억제 혹은 인플레이션 기대 하향안정 노력에 대해 실시간으로 중앙은행의 실적을 감시하고 또 이를 공개적으로 평가하는 시장의 속성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를 두고 앨런 블라인더 교수는 이미 “시장이라는 곳은 일종의 거대한 생체자기제어기구(biofeedback machine)”라고 지적하면서, 이 때문에 중앙은행이 “시장을 따라가려는 유혹”에 빠질 가능성을 경고한 바 있다.
물론 시장을 따르는 것은 예상치 못한 금융 교란에 의해 시장이 불안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좋은 방법일 수 있고, 또 이런 금융 교란을 피하는 것 자체가 정당한 목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하다가는 오히려 어설픈 통화정책이 나올 수 있다는 게 블라인더의 지적이다. 시장이라는 곳은 자신만의 기질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이에 따른 정보 함의를 특권화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얘기다.
그리고 블라인더는 시장을 따라가려는 유혹에 빠질 경우, 결국 중앙은행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될 것인가에 관한 인식의 변화에 시장이 과민반응하게 될 것이고, 이 과정에서 결국 중앙은행은 다시 자신의 행동 방향과 관련해 시장이 주는 지침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초래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폭과 깊이, 그리고 유동성 측면에서 시장을 거대한 힘과 지혜의 보고로 간주하는 게 통례”라고 지적하면서도, “그러나 시장의 힘이 거대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의가 없지만, 시장이 지혜롭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의심스럽다”고 역설한다. 또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정부내 다른 부문으로부터의 독립성” 못지않게 “금융시장으로부터의 독립성”이라고 덧붙인다.
그리고 블룸버그 통신의 저명한 고정 칼럼리스트인 캐롤라인 바움은 보다 근본적으로 TIPS의 손익분기 인플레이션율로 대표되는 시장의 기대 인플레이션 척도가 실은 개별 기업의 의사결정에 과연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반문하고 있다.
다시 말해 기업 경영진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격 전략을 검토할 때 TIPS의 손익분기 인플레이션율 혹은 미시간대학의 소비자 인플레이션 기대 지수 등과 같은 인플레이션 기대 척도들을 활용하는지 말이다.
이와 관련해 그는 또 다른 전문가를 인용해, “월 스트리트(Wall Street: 금융시장)는 돈을 다루는 곳인 반면, ...메인 스트리트(Main Street: 실물 경제)는 가격이 결정되는 곳”이라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통화정책은 과연 누구의 인플레이션 기대에 주목해야 할까?
물론 그렇다고 통화정책이라는 것이 시장을 통해서 작용하며, 따라서 시장 반응이 중요하다는 것마저 부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은 시장을 무시해서는 안 되며 또 그럴 만한 여유도 없다. 버냉키가 지적하듯이, 시장은 귀중한 정보를 전해주는 중요한 수단이다.
다만 블라인더의 경고처럼, “자산 가격을 통해 나타나는 이자율 경로를 허용하려는 유혹과 같은” “시장을 따라가려는 유혹”은 실로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런 행보는 과거 이른바 “그린스펀 풋”(Greenspan put)의 진정한 의미, 즉 직접 시장을 공략하려 했던 그린스펀의 태도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긴 하지만, 도리어 정보 가치에 주목해 시장을 추수하려는 일종의 “버냉키 콜”(Bernanke call)의 가능성을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커뮤니케이션 전략의 진정한 요체도 혹시 이런 것이 아닐까?
사실 ‘그린스펀 풋’에 대해 흔히들 금융파생상품의 풋옵션과 비유해, 자산 가격 상승은 용인하고 자산 가격 하락에 대해서만 개입하는 ‘비대칭적’ 행태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활용한다. 물론 그 충격의 비대칭성을 감안한다면, 일견 타당한 지적이고 또 일리도 있다.
하지만 자산 가격 자체를 타겟으로 한 이런 태도는 그린스펀, 나아가 버냉키 휘하의 연준, 혹은 이른바 글로벌 현대 중앙은행 시스템의 ‘컨센서스’ 내에 수용되지 못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린스펀 풋의 진정한 요체는 시장을 직접 공략하려는 태도를 의미한다고 하는 게 보다 적절하리라고 판단된다. 그리고 이 점에서 그린스펀과 버냉키 간에 확연한 차이가 드러난다.
물론 ‘버냉키 콜’이라는 표현은 아직 시장에서 정착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점차 그와 금융시장간의 관계를 두고 이런 인식이 점증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버냉키의 이런 위험성에 대해, 그가 그린스펀이나 볼커 등과 달리 시장 경험이 전무한 가운데 학자적 기질을 따라 시장 자체를 마냥 우대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사실 그린스펀에 대해서도 “과도한 시장과의 불장난”에 대한 우려가 컸지만, 그 초점은 전적으로 달랐다.
또한 이 문제는 금융 자산 가격의 주요 변수인 리스크 프리미엄에 대한 상이한 태도에서도 입증된다. 리스크 관리 패러다임을 정립하면서 그린스펀은 자산 가격과 관련해 리스크 프리미엄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버냉키는 이를 일종의 수수께끼로 치부하거나 내지는 모형화의 진전을 통해 추정의 여지가 넓어지고 있는 변수로만 간주하는 모습이다.
[뉴스핌 장보형 객원이코노미스트]
※본 특집의 저자인 장보형은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와 한신대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지난 10여년간 국내 정보컨설팅 업체인 와이즈 인포넷에서 '국제금융/경제 팀장'을 맡아 국제 금융시장과 세계 경제 동향 점검 및 이슈 분석을 전담한 후, 현재는 '글로벌 마켓 이코노미스트'로서 프리랜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올해부터 뉴스핌 객원 이코노미스트로 합류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