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정영희 기자 = 지난해 말 재건축을 마치고 입주를 앞둔 강남권 한 단지의 동별 배치도가 온라인 커뮤니티를 달궜다. 조합원 분양분, 일반분양, 임대주택, 보류지가 각기 다른 색상으로 표시된 배치도는 마치 색칠 공부 도면처럼 다채로웠다. 그러나 다채로운 색상의 아래에는 소셜믹스를 반대하는 의견이 잇따랐다.
입주 전부터 '임대 가구'라는 꼬리표가 붙은 주민과, 평생 모은 자산을 투자하면서도 원치 않는 양보를 강요받는 소유주 사이의 갈등이 여실히 드러난 셈이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주거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도심 내 주거형태 다양화와 자산 가치 보호 사이에서 정책적 균형이 얼마나 민감한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갈등은 이제 재건축 현장 곳곳에서 일상적인 풍경이 됐다. 지난해 서울시 정비사업 통합심의위원회는 송파구 잠실주공5단지의 재건축 안건을 돌연 보류시켰다. 조합 측이 임대 물량을 상대적으로 선호도가 떨어지는 저층과 특정 동에 몰아넣은 것이 '소셜믹스 원칙'에 위배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조합원들은 "임대 가구를 로열층에 배치하라는 것은 조합원을 향한 명백한 역차별"이라며 거세게 반발했지만, 결국 빠른 사업 진행을 위해 설계안을 수정했다.
본래 소셜믹스는 아파트 단지 내에 분양 가구와 공공 임대 가구를 함께 조성해 계층 간의 격차를 줄이자는 취지의 주택 정책이다. 과거 서구권에선 취약계층을 도시 외곽의 특정 임대 단지에 몰아넣었다가 지역 전체가 슬럼화되고 극심한 계층 갈등이 폭발하는 부작용을 겪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공간적 분리를 없애고 다양한 계층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살도록 고안한 것이 소셜믹스다.
국내에서는 2003년 분양과 임대 가구를 한 단지에 섞어 설계한 서울 은평뉴타운을 통해 처음 시험대에 올랐다. 이후 정권을 막론하고 공공주택 공급의 핵심 기조로 뿌리내렸다.
도입 초기부터 크고 작은 잡음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이를 명백한 '재산권 침해'로 규정하고 결사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2021년 10월 서울시가 모든 재건축·재개발 단지에 소셜믹스를 의무화하면서다. 외부에서 임대와 분양 가구를 구별할 수 없도록 고르게 층을 섞고, 강이나 하천 조망권에서도 임대 가구를 차별하지 못하게 강제한 것이다.
조합원들의 거센 저항을 단순한 이기주의로 치부하기엔 꽤 현실적인 사정이 숨어 있다. 수십 년간 낡은 아파트의 불편을 묵묵히 감내해 온 소유주는 정작 비선호 저층에 배정받고, 수십억 원의 가치를 지닌 평형을 임대 가구가 차지하는 상황은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다.
정비사업의 핵심인 수익성 악화도 치명적이다. 같은 평형이라도 조망에 따라 시세가 십수억 원씩 벌어지는데 가장 비싸게 분양할 수 있는 로열층을 공공임대로 넘기면 그 손실은 고스란히 조합원의 분담금 폭탄으로 돌아온다. 서울 강남권의 모 단지에선 무작위 추첨 방침을 거부한 대가로 시에 약 20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현금을 토해내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정치권은 획일적 융합을 법으로 강제하려 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달 임시국회 내에 재건축·재개발 아파트의 관리처분계획인가 전에 임대주택의 동·층·호수 공개 추첨을 의무화하는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개정안을 처리할 계획이다. 법안이 통과되면 위반 시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이라는 형사 처벌을 받게 돼 정비업계의 진통이 우려된다.
그렇다면 국민들은 정말 주거 취약 계층과 단 1평의 공간도 나누기 싫어하는 것일까. 통계를 보면 그렇지 않다. 한국리서치가 지난해 12월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9%가 '주거복지는 확대돼야 한다'는 방향성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다수가 소외계층을 위한 주거 지원의 필요성에 동의한 셈이다.
여론은 이 주거복지의 수단이 소셜믹스가 될 때 급격히 얼어붙었다. '소셜믹스가 계층 간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통합에 기여한다'는 의견에는 53%만 동의했다. 특히 '주거 공간을 물리적으로 혼합하는 것만으로는 실질적인 통합에 한계가 있다'고 꼬집은 응답자는 77%에 달했다.
정책의 궁극적 취지에는 찬성하면서도 물리적인 섞임이 실질적 화합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이들의 53%는 '내 이웃의 생활 수준이 비슷하기를 선호한다'고 답했다. 사회적 통합에 긍정하는 것과 당장 내 이웃의 다양성을 수용하는 데에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다는 방증이다. 소셜믹스가 물리적 혼합을 넘어 입주민의 심리적 수용성과 비용 분담의 합리성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라는 다면적인 과제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셜믹스라는 방향 자체가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배제 문제를 방치했을 때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과 슬럼화의 부작용은 지금 겪는 갈등 비용보다 훨씬 클 것이기 때문이다. 핵심은 시장이 거부감 없이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대안을 열어주는 데에 있다.
예컨대 영국은 임대 비율을 법에 정해놓지 않는다. 사업마다 지방자치단체와 민간 개발업자가 마주 앉아 단지의 사업성을 꼼꼼히 따져본 뒤 비율과 방식을 1대 1로 유연하게 협상한다. 임대 물량 요구가 지나쳐 재건축 사업 자체가 엎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수익성이 떨어진다면 임대 비율을 줄여주는 대신 공원 조성이나 인근 토지 기부채납 등 다른 형태의 실리적인 공공기여로 유도한다.
독일 휴텐벡(Huttunweg) 내 사회주택은 입주민들이 단지 내 공공시설을 고르게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했다. 혼합단지 내 실질적인 사회통합을 이끌어내기 위해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는 맞춤형 문화 및 교육 프로그램도 지원하고 있다. 한국 또한 이를 벤치마킹해 정부와 지자체 차원의 지속적인 관심과 세밀한 정책적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공감이 곧 지능인 시대다. 사회적 합의 없이 이념적 당위성에 갇혀 법으로 윽박지르는 방식으론 누구의 마음도 잡을 수 없다. 이제 소셜믹스는 서로의 삶을 존중하며 천천히 스며드는 진정한 '섞임'이 될 때다.
chulsoofriend@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