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최신뉴스 GAM 라씨로
KYD 디데이

[이철환의 예술가 이야기] 지휘자의 시대를 연 음악계의 제왕, 카라얀

기사입력 : 2017년11월20일 12:00

최종수정 : 2017년11월20일 12:00

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23)

흔히 음악의 세계에서 19세기가 ‘피아니스트의 시대’라면, 20세기는 ‘지휘자의 시대’라고 한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그는 20세기 가장 유명하고 성공적이면서 혁신적이며 그리고 오만에 가까운 자신감 넘쳐흐르는 지휘자였다. 음악가 중 살아생전 그만큼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음악을 풀어나가는 탁월한 감각과 능력은 물론이고, 음악계에서의 독보적인 발언권, 레코드 음반 발매를 통한 클래식음악의 대중화 확산 등 가히 음악계의 황제로서 군림하였다. 오늘날 음악의 성인이라고 칭송받는 베토벤도 영향력 행사 면에서는 그를 앞서지 못한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지휘한다. 그 모습이 나중에는 그의 트레이드마크(trademark)가 되었다. 원래 지휘는 단원과 눈을 맞추면서 교감을 이룬다고 하는데 그는 그것을 거부하였다. 언뜻 작위적인 자기연출 같기도 하지만, 그 모습이야말로 카라얀이 만들고 싶어 했던 ‘이상적인 오케스트라’에 대한 욕망의 상징적 모습이었다. 그는 생각 속의 이상적 오케스트라와 눈앞에 놓여있는 현실의 오케스트라를 합일시키려 했던 것이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그를 독재자라고도 불렀다. 베를린 필 단원들에 의하면 카라얀은 리허설을 할 때도 완벽을 추구했다고 한다. 정해진 시간을 넘기는 일 없이 신사적인 분위기에서 리허설은 진행되지만, 완벽주의적 기질 때문에 리허설의 긴장감이 대단했다고 한다. 결국에는 연주회 프로그램을 독단적으로 운영한다는 등의 불만이 쌓이면서 단원들과의 사이도 벌어지게 된다. 이처럼 출세 지향적이며 독선적인 성격 그리고 친 나치 성향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카라얀이 세계적인 지휘자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능력과 엄청난 노력 덕분이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rebert von Karajan, 1908~1989)은 1908년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피아노의 신동’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였던 그는 모차르테움(Mozarteum)에서 공부했다. 모차르테움은 모차르트를 기념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 설립한 모차르트 음악연구 재단이다. 이후 비엔나 공대에 진학했으나 흥미를 잃고 결국 음악의 길로 들어선다. 1927년 독일 울름에서 지휘자로 데뷔하였고,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1938~45년 동안 베를린 국립 오페라단도 이끌었다. 그러나 그의 음악 인생에서 가장 하이라이트는 역시 1955년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에 오른 일이었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37년이었다. 그로부터 17년 뒤인 1954년, 당시 상임지휘자이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카라얀은 베를린 필의 지휘봉을 쥐게 된다.

1955년 베를린 필은 미국 순회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10주년이 되는 1955년, 독일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가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해서 열리는 이 공연은 당시 독일이나 미국 양측에 큰 관심사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재건 과정에서 서독은 미국의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때마침 열리는 이 순회공연은 서독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여론 향방에 영향을 미칠 게 분명했다. 그런 탓에 당시 아데나워 서독 수상도 이 순회공연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었다.
애초 이 순회공연은 당연히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54년 푸르트벵글러가 갑자기 서거하면서 공연이 좌초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에 베를린 필은 미국 순회공연을 이끌 지휘자로 카라얀을 선택했다. 카라얀은 이를 계기로 종신 음악감독직을 맡아 실권을 쥐게 된다.
1955년 베를린 필의 음악감독에 취임한 카라얀은 베를린 필을 통해 ‘꿈의 오케스트라’를 실현하려 했다. 이후 카라얀은 20세기 클래식 제국의 황제로서 군림했다. 1989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부근의 아니프에서 사망할 때까지 연주와 지휘, 음반 녹음을 계속했다. 대부분 베를린 필과 빈 필을 지휘한 결과물이었다. 이들 두 악단은 카라얀의 절정기를 함께 한 최고의 파트너였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상임지위자가 된 이후에도 행운이 이어졌다. 다음해인 1956년에는 고향인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음악감독이 되어 4년간 재임하였다. 칼 뵘의 뒤를 이어 빈 국립 가극장의 음악감독으로도 취임하였는데, 1964년 이곳을 사임한 직후에는 다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측과 전권을 행사하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두 번째 계약을 체결한다.
이후 카라얀은 1967년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벌’을 창설하였다. 이는 바그너의 작품만이 공연되는 바이로이트 축제극장과 사이가 틀어진 카라얀이 자신이 존경하는 바그너의 음악을 마음껏 지휘하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카라얀이 잘츠부르크에서 무엇보다 무대에 올리고 싶었던 작품은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여름 음악제에서 올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여름에 열리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과 경쟁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름이 아닌 부활절 기간을 택하게 된다.

눈을 지그시 감고 지휘하는 카라얀의 모습 <사진=이철환>

카라얀은 자신의 전임자인 베를린 필 지휘자인 푸르트벵글러를 훌륭한 음악가로 존경하였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을 극도로 혐오했고, 카라얀이 자신의 후임자가 되지 못하도록 다각도로 견제했다. 그래서 카라얀은 푸르트벵글러가 서거하기 전까지는 베를린 필과 빈 필을 거의 지휘하지 못했다. 빈 필 단원의 증언에 의하면, 푸르트벵글러는 빈 필 단원들에게 자신과 카라얀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할 정도로 반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1954년 11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서거하자 카라얀은 마침내 오래 염원해왔던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자리를 차지한다. 카라얀은 자신에게 어렵게 돌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전력투구했다. 베를린 필의 미국 순회공연을 앞두고 있을 때 카라얀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왔다. 그러나 카라얀은 그토록 염원했던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위중한 어머니를 한 번도 찾지 않았다. 카라얀은 훗날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살인이라도 저질렀을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카라얀은 세 번 결혼했다. 첫 번째 결혼은 1938년 오페레타 가수인 엘미 홀게호프와 했는데 얼마 못 가 1942년 이혼했다. 그리고 이혼 후 바로 두 번째 결혼을 한다. 상대는 유태계 혈통을 지닌 안나 마리아 아니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재봉틀용 실을 생산하는 사업가였다. 아니타와의 결혼생활은 비교적 무난했지만, 아니타가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 1958년 이혼한다. 그러고는 곧바로 프랑스의 모델 출신인 엘리에트 무레(Eliette Mouret)와 세 번째 결혼을 하였다.
카라얀보다 27세 연하인 엘리에트는 17세 때인 1951년 카라얀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1958년 카라얀과 결혼 이후 두 딸을 낳았다. 엘리에트와의 세 번째 결혼은 적어도 외부에 비춰진 모습으로는 화목하게 유지되었고, 엘리에트는 비록 음악에 대한 깊은 지식은 없었지만 카라얀을 열심히 내조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 결혼생활은 카라얀의 남은 여생동안 지속되었다. 그녀는 1989년 남편 타계 이후 음반과 영상, 각종 기록을 정리하는 '카라얀 재단'을 운영하며 살았다. 카라얀의 전 부인 아니타와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라얀 음악인생에 오점이 있다면 나치와의 협조관계였다. 1933년 나치에 입당하고 1934년 아헨 독일가극장의 음악감독이 된다. 카라얀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히틀러가 보는 가운데 자작 《영웅소나타》를 초연하기도 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는 카라얀을 대표적인 신진 지휘자라고 선전했다. 그러다 둘째 부인 아니타가 유태계라는 점 때문에 나치와 거리가 생겼고, 전쟁 말기에는 아니타와 함께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 밀라노로 가서 종전 때까지 머물렀다.
종전 후 귀국한 카라얀은 1948년 연합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무혐의를 인정받아 지휘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작 스턴, 이작 펄만 등 상당수 유태계 음악가들은 그와의 공연을 거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약 2년 동안 연주활동이 제한되었는데, 그 기간 카라얀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 때 카라얀에게 구세주로 나타난 이가 바로 음반회사인 EMI의 프로듀서인 월터 레그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카라얀을 주목해 왔던 레그는 미래에 녹음할 연주들에 대해 미리 선지불하는 형식으로 카라얀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주었다. 얼마 후 다른 음반사인 독일 그라모폰(Deutsche Grammophon)과 데카(DECCA)도 카라얀과 계약을 맺었다. 그가 취입한 음반타이틀은 1천개에 이르고 1억 2천만 장이나 팔렸다. 이리하여 카라얀은 연주회 현장 음악시대에서 레코드 음악시대를 새로이 열어나가게 된다.

천하의 카라얀도 만년 들어서는 베를린 필에 대한 장악력이 다소 떨어지고 있었다. 관악기 연주자 선정 과정에서 수차례 단원들과의 이견이 노출되었다. 또 자신의 후임 선정 과정에서도 그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음악단장인 제임스 레바인(James Levine)을 지지했으나, 카라얀 퇴임 후 단원들이 민주적인 투표방식을 통해 상임지휘자로 선출한 사람은 이탈리아 출신의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였다.
1987년 1월 1일에는 빈 필의 신년음악회를 지휘했는데, 이를 이유로 1986년 베를린 필의 송년음악회를 지휘하지 않아 베를린에서의 여론이 악화되었다. 1988년에도 건강 악화를 이유로 베를린 필 공연 지휘를 취소해 놓고 그 다음날 일본 투어를 위해 출국했는데, 이 일도 커다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1989년 4월 건강상의 이유로 베를린 필의 종신 상임지휘자 직을 사임했다. 20세기 음악계의 황제이자 독재자로 불리던 그도 1989년 7월 16일 심장마비로 쓰러져 고향 잘츠부르크에 묻혔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뉴스핌 베스트 기사]

사진
尹 지지율 2.3%p↓, 38.1%…"與 총선참패 '용산 책임론' 영향" [서울=뉴스핌] 박성준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소폭 하락해 30%대 후반을 기록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18일 발표됐다. 종합뉴스통신 뉴스핌 의뢰로 여론조사 전문업체 미디어리서치가 지난 15~16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1명에게 물은 결과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긍정평가는 38.1%로 집계됐다. 부정평가는 59.3%로 나타났다. '잘 모름'에 답한 비율은 2.5%다. 긍정평가와 부정평가 간 격차는 21.2%포인트(p)다. 긍정평가는 지난 조사 대비 2.3%p 하락했고, 부정평가는 1.6%p 상승했다. 연령별로 보면 40대에서 긍·부정 평가 격차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만 18세~29세에서 '잘함'은 36.0% '잘 못함' 61.0%였고, 30대에서는 '잘함' 30.0% '잘 못함' 65.5%였다. 40대는 '잘함' 23.9% '잘 못함' 74.2%, 50대는 '잘함' 38.1% '잘 못함' 59.8%로 집계됐다. 60대는 '잘함' 51.6% '잘 못함' 45.9%였고, 70대 이상에서는 60대와 같이 '잘함'이 50.4%로 '잘 못함'(48.2%)보다 높게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서울 '잘함' 38.5%, '잘 못함'은 60.1%로 집계됐다. 경기·인천 '잘함' 31.4% '잘 못함' 65.2%, 대전·충청·세종 '잘함' 32.7% '잘 못함' 63.4%, 부산·울산·경남 '잘함' 47.1% '잘 못함' 50.6%로 나타났다. 대구·경북은 '잘함' 58.5% '잘 못함' 38.0%, 전남·광주·전북 '잘함' 31.8% '잘 못함' 68.2%로 나타났다. 강원·제주는 '잘함' 37.1% '잘 못함' 60.5%로 집계됐다. 성별로도 남녀 모두 부정평가가 우세했다. 남성은 '잘함' 34.7% '잘 못함' 63.4%, 여성은 '잘함' 41.6% '잘 못함' 55.3%였다. 김대은 미디어리서치 대표는 윤 대통령 지지율 하락 배경에 대해 "108석에 그친 국민의힘의 총선 참패가 '윤 대통령의 일방적·독선적인 국정 운영 스타일로 일관한 탓이 크다'라는 '용산 책임론'이 대두되며 지지율이 하락했다"고 평가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선거 결과에 대해 실망한 여론이 반영됐을 것"이라며 "최근 국무회의 발언 등을 국민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경제 상황도 나아지고 있지 않아 추후 지지율은 더 낮아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번 여론조사는 성·연령·지역별 인구비례 할당 추출 방식으로 추출된 표본을 구조화된 설문지를 이용한 무선(100%) ARS 전화조사 방식으로 실시했으며 응답률은 3.9%,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p다. 통계보정은 2024년 1월말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통계를 기준으로 성별 연령별 지역별 가중 값을 부여(셀가중)했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parksj@newspim.com 2024-04-18 06:00
사진
이재명 "다 접어두고 尹대통령 만나겠다" [서울=뉴스핌] 윤채영 김윤희 기자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6일 윤석열 대통령과의 영수회담과 관련해 "의제도 정리하고 미리 사전조율도 해야하는데 그조차도 녹록지가 않은 것 같다"며 "다 접어두고 먼저 윤석열 대통령을 만나겠다"고 밝혔다. 이 대표는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복잡한 의제들이 미리 정리됐으면 좋았을 텐데 쉽지 않은 것 같다. 그거 정리하느라 시간 보내기 아쉽기 때문에 신속하게 만날 일정을 잡도록 하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서울=뉴스핌] 윤창빈 기자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2024.04.26 pangbin@newspim.com 이 대표는 "윤석열 대통령을 만나서 총선에서 드러난 우리 국민들의 민심을 가감없이 전달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민생 현장의 참혹한 현실을 제대로 전달하고 또 필요한 조치들을 할 수 있도록 요청드리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는 이어 "윤석열 대통령께서도 우리 국민들의 이런 어려운 상황, 총선 민의를 잘 들어주시고 절박한 심정으로 어떻게하면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주시길 부탁드린다"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지금 이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면 몰락한다는 각오로 이번 회담에서 반드시 국민이 기대하는 성과, 가능한 조치들을 만들어내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의 영수회담 실무회담은 전날에도 이어졌지만, 민주당은 "대통령실이 의제에 대해 구체적인 검토 결과를 제시하지 않았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이에 대통령실은 "의제 제한을 두지 않고 사전 합의가 필요 없는 자유로운 형식의 회담을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이 대표가 의제 조율이 지지부진하자 이를 접어두고 일단 윤 대통령을 만나겠다며 전향적인 입장을 밝힘에 따라 윤 대통령과 이 대표 간 만남은 금명간 성사될 것으로 전망된다.  ycy1486@newspim.com 2024-04-26 09:38
안다쇼핑
Top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