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알고 왔는지 경찰차 두 대가 빨갛고 파란 불빛을 번쩍거리며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내 몸엔 젖은 쓰레기들이 묻어 텁텁한 냄새가 풍겼다. 경찰들은 내 눈에서 광기를 보았는지 함부로 말리지는 않았다.
내 주위를 빙빙 돌며 광기의 팽창을 막으려는 소극적 방어를 취하고 있었다. 나는 차분해져 있었고, 고도로 집중되어 있었다. 의식이 또렷한 가운데 살의의 감각 같은 것이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경찰봉 이리 내놔. 저 새끼 때려죽이게”
경찰에게 팔을 뻗으면 뻗는 거리만큼만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나를 무섭거나 위험하게 보지는 않았다. 천천히 식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최영호에게 다가갔을 때 그는 그 자리에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안에서 타오르는 집념의 불꽃이 밖으로 내비치지 않는, 고독한 구도자 같기도 한 자세로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마냥 서 있었다. 밀레의 <만종>에 나오는 석양 무렵의 농부 같기도 했다.
<폭풍의 언덕>의 파토스적 인물, 한때 미칠듯한 매력으로 나를 사로잡았던, 히스클리프 같기도 했다. 무슨 생각에 저리도 깊게 잠겨 있는 걸까. 내 집에서 근엄하기까지 했던 확신과 지금의 바닥 모를 침전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아내는 내게 기득권이란 말을 썼다. “살아온 시간이 중요하다고 생각진 않아. 자기는 내게 기득권이 있고.....” 기득권? 아내에 대한 내 존재가 고작 기득권이라고? 내가 가장 혐오하는 말이 내 존재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그것도 나를 배신한 사람에 의해. 게다가 아내는 당당하다.
기득권이란 말은 나를 무참히 탈진시키는 말이다. 몇시간 전만 해도 믿어마지않던 아내로부터 그런 말을 듣게 되다니. 분노와, 그것을 무력화하는 탈진을 동시에 받으면 어떤 내면의 공황에 빠지는지 난 알았다.
분노와 탈진, 모멸과 박탈, 그 상쇄적 감정을 동시에, 그것도 쌍 겹으로 느닷없이 받을 때, 정신이 어떻게 탈색되고 휘발되는지, 사전 예고도 없이 생체 실험 당한 것이다. 그러한 가학의 총체는 나자신으로부터 회 뜨듯 섬뜩하게 나를 이탈시키더니, 이번에는 알 수 없는 구심점을 향해 나를 몰입시키는 것이다.
극도의 증오와 살기까지 품게 되었던 내가, 이렇게 이른 새벽 어슴프레한 미광 속에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적을 바로 앞에서 보는 순간, 경이로움 내지 은근한 끌림마저 생기는 것은 왜일까.
조금 전 내 단도직입적인 몰아붙임에 대한 아내의 부동이나 이 남자의 근엄한 침묵에는, 죽음의 향기가 날 정도로 근접하기 어려운 뭔가가 있다. 이들 역시 감당키 힘든 뭔가를 모질게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그 감내의 내용이 둘 사이에 똑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겠지만 감내의 중량은 별 차이 없을것이다.
그리고 둘 사이에 절박하게 흐를 애련의 격류가, 오늘 밤 사건을 계기로 어떻게 변할지 모를 불확실성으로 인한 중층의 애욕과 아픔, 고뇌가 그들 감내의 무게를 더욱 무겁게 한다. 그런 식으로 민감하고 치열하게 얽힌 감정의 심연 속으로 그들은 한없이 침잠해 있다. 그 침잠의 무게가 나로 하여금 이들의 관계를 불륜이라고 섣불리 부르지 않게 한다.
그들의 침묵에 비해 내 흥분은 경솔했을까. 아니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연놈들을 그냥 싸그리 정리하는 게 산뜻하지. 하지만 그런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통 안에 들어서면 통 밖에서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된다. 뒤범벅된 감정들이 야릇한 절묘함 속에 죽처럼 녹아 물아일체의 원액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살인이건, 무아경의 환희이건, 이 원초적 감정의 원액에서 그 색깔과 향기, 투명도가 다를 뿐이다. 그놈과 한판 붙으려던 앙심이 절로 수그러들었다. 그놈은 내게 ‘비겁한 자식’이라고 했다. 비겁? 오늘은 정말 이가 갈리는 날이다. 내가 비겁한 놈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