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지난 13일자 뉴스핌 글로벌이슈로 이미 송고된 기사입니다.)
[뉴스핌=김사헌 기자] 1990년대 프린스턴대학 교수로 일본 당국자들의 정책 운용 문제를 가르치던 벤 버냉키(Ben S. Bernanke)가 지금은 연방준비제도 의장으로서 자신이 학문적으로 검토했던 일본의 경험을 구체적인 미국의 통화정책에 반영해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됐다고 13일자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지적했다.
장기간의 저성장과 높은 실업률 그리고 하락하는 물가 압력이라는 여건은 오늘날 버냉키 의장이 미국을 바라보는 하나의 창, 즉 일본의 경험을 통해 바라보게 만드는 틀이 되고 있다. 문제는 일본의 경험에서 쉽게 교훈을 도출하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이 같은 분석은 버냉키 의장이 이번 주말 보스턴 연방준비은행이 주최하는 컨퍼런스에서 연설이 예정되어 있는 가운데 나온 것이다.
[1990~현재. 일본과 미국의 실질 CPI(연간) 추이]
◆ 일본에 과감히 돈 뿌리라고 충고했던 버냉키, 자신은?
WSJ는 이 컨퍼런스가 마치 버냉키 등 주요 미국 경제학자들이 대거 참여해 일본 당국자들을 가르쳤던 도쿄의 컨퍼런스를 연상하게 한다면서, 이 연설 과정에서 향후 통화정책 운용이나 현재 여건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제기되는지 주목된다고 전했다.
한편 WSJ는 과거 버냉키 의장이 일본에서 행한, 잘 알려지지 않은 연설문을 회고하면서, 이를 통해 앞으로 연준이 어떤 식의 정책적 대응에 나설 것인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일단 연준 정책 결정자들은 올해 초반에는 어떻게 '출구전략'을 구사할 것인지를 중심에 놓고 고민했던 반면, 지금은 어떤 식으로 큰 문제 없이 경기를 좀 더 부양할 수 있는지 방법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9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의사록에서는 추가적인 완화정책의 필요성에 동의하는 정책결정자들이 많았던 것을 보여주었다.
현재 금융시장이 생각하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정책 옵션은 바로 미국 국채를 매입해 시중 금리를 떨어뜨리는 '양적완화' 정책인데, 연준 내부에서 반대가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쟁점은 연준 내에서 '디플레이션 회피'를 위한 대책인데, 일각에서는 물가 목표를 높이는 방식으로 단기적인 기대인플레이션 강화 방식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버냉키 의장은 미국이 과거 일본식 장기 불황의 경험을 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하는 입장인데, 과거 그가 충고했던 것에 비하면 이게 쉽지 않은 모양이라고 WSJ는 지적했다.
◆ 일본 경험으로부터 교훈? 단순하면서도 실제론 쉽지 않아
일본은 제로금리 정책과 함께 국채와 회사채를 매입하는 양적완화 정책을 구사하고도 자산거품 붕괴 이후 10년간 연평균 0.7%의 성장률을 기록했고,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200%를 넘었다. 또 10년간 7년은 물가가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을 경험했다.
이와 관련최 최근 연준리 부의장직에서 물러난 도널드 콘(Donald Kohn)씨는 "다른 사람에게 충고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그 같은 조치에 나서야 할 때가 되자 쉽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일본의 경험으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으로 경제가 어려울 때는 조기에 공격적인 부양정책을 제공할 것과, 또 이 같은 부양책을 너무 조기에 회수하지 않는 것 등 두 가지를 들었다.
버냉키 의장은 과거 이사 시절 때 일본 당국자들이 너무 소심하다고 비판하는 입장을 보였다. 헬리콥터에서 돈을 쏟아 부으면 된다고 말해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버냉키는 나중에 개인적으로 이 같은 공격적인 발언에 대해 후회한다는 점을 밝혔다고 하지만, 그가 도출한 교훈은 사실 연준의 정책적 대응 양식을 구성하는 기초가 됐다고 평가된다.
미국과 일본은 서로 경제의 성격이 다르지만, 둘 다 모두 경제가 가라앉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높다. 두 경우 모두 부동산 거품이 붕괴되면서 금융시스템 전반에 충격을 입었다. 이 결과 실업률이 급등하고 경제에 막대한 간극이 형성됐다.
또 미국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높은 재정적자 수준을 기록하고 있고 '제로금리' 정책을 추구했다. 두 나라 모두 글로벌하게 거래되는 기축통화를 발행하고 있고, 거품이 붕괴된 이후에도 통화가치가 빠르게 하락하지 않은 경험을 했다. 이 때문에 수출 경기가 부양되지 않으면서 회복이 느린 양상을 보였다.
1999년 당시 보스턴 연방준비은행이 주최한 컨퍼런스에 일본은행(BOJ) 정책위원인 우에다 가즈오가 참석해 한 마디했다. "제로금리를 실시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 안 된다"고. 대부분 미국인이었던 당시 컨퍼런스의 청중에게 그는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고 경고했다.
그러자 뒤이어 제시한 보고서를 통해 버냉키는 미국이 1930년대 저질렀던 정책 오류를 재연했다면서, 다른 몇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그 중에서는 외환시장에서 엔화를 매도하는 방식으로 통화가치 평가절하를 하거나 금융조세를 줄이기 위해 재무부에서 국채를 사들이는 방법도 포함되었다. 후자는 '헬리콥터 벤'이란 별명에 좀 더 힘을 실어주는 방책이었다.
일본 경제가 디플레이션에 빠져들자 버냉키는 이럴 경우 경기 회복이 더욱 힘들어진다면서 공공의 기대심리를 좀 더 공격적으로 조절할 것을, 즉 물가안정 수준을 높이겠다고 약속하고 이것이 달성될 때까지 계속 특단책을 취하라고 충고했다.
당시 공격을 받았던 일본은행 당국자인 오키나 쿠니오는 그런 태도가 마치 "눈을 감고 뛰어내리라고 주문하는 것 같았다"면서, "지금은 조심성없이 막 얘기하면 안 될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버냉키 의장은 2003년에는 아예 물가목표 자체를 높이는 식으로 기대인플레이션을 높이는 대책도 내놓았다. 이것을 그는 정책 상의 '리플레이션 단계"라고 불렀다. 그는 인플레 압력의 오버슈팅을 야기할 위험이 있지만, 기회를 활용해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 일본 경험, 아직도 미스테리? "그럼 연준도 단호해져라"
최근 연준 관계자들 일부는 이 같은 물가안정 목표 수준 자체를 높이자는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다. 윌리엄 더들리 뉴욕 연방은행 총재와 찰스 에반스 시카고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지난주에 이 같은 견해를 지지하고 나섰다.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무엇보다 일본의 경험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라는 점이다.
일본 정책 당국은 미국 경제전문가들이 제시한 아이디어를 도입하려고 노력했고 일부 성과도 있었다. 제로금리와 양적완화정책을 2006년까지 지속했고 일부 견인력을 획득하는 듯도 했다. 2004년부터 2007년 사이 일본의 성장률은 평균 2.7%까지 높아졌고 디플레이션도 극복되는 듯 했다.
하지만 2008년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일본은 다시 경제가 크게 위축되었고 다시 디플레이션을 경험하는 중이다.
이에 대해 과거 버냉키 의장과 공동으로 책을 썼던 마크 거틀러 뉴욕대 교수는 "어떤 모형으로도 일본식의 문제가 어떤 수준으로 지속되는지 예측할 수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사실 일본식 디플레이션 양상은 경제학자들 모두에게 깊은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경제학자들은 미약한 디플레이션이 발생한 뒤에 이것이 더욱 심각하고 위험한 악순환의 소용돌이로 빠져들 수 있다고 본다. 근대 경제학의 '성배'인 대공황 전문 연구자인 버냉키는 '금융가속기' 이론으로 이 문제에 대한 모형화를 시도했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 디플레이션이 오래 지속되기는 했지만, 디플레이션 양상이 악순환의 소용돌이로 더 심화되지 않는 양상을 보였다.
2003년부터 2008년 사이 일본은행 총재를 역임했고, 버냉키가 충고한 완화정책을 도입했던 후쿠이 도시히코씨는 버냉키 의장에 대해 "과거 학자로 일본에 왔을 때 그는 비판적이지만 정직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버냉키 의장에게 똑같은 충고를 돌려주고 싶다면서 "단호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뉴스핌 Newspim] 김사헌 기자 (herra7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