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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7' 로베르 르빠주 "연극과 기억, 뗄 수 없는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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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이야기 통해 '기억' 탐구하는 '887'
29일부터 6월 2일까지 LG아트센터서 공연

[서울=뉴스핌] 황수정 기자 = "연극은 단순한 소통이 아닌 공감대를 형성해야 합니다. 요즘 넷플릭스를 통해 집에서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기에, 집 밖으로 나와 연극을 관람한다는 것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일이 됐어요. 연극은 하나의 이벤트, 삶을 바꿀 경험을 제공해야 합니다. 연극을 통한 공감대와 공동체의 경험을 선사하는 거죠."

'887' 로베르 르빠주 [사진=LG아트센터]

27일 오전 서울 중구 주한캐나다대사관에서 연출가 로베르 르빠주의 기자간담회가 진행됐다. 이날 현장에서는 주한 캐나다 대사 마이클 대나허는 "열렬한 팬으로서 그를 소개할 수 있어 영광이다. 그간 한국에 로베르 르빠주의 작품이 많이 소개됐는데, 12년 만에 한국을 찾은 그가 배우로서 관객을 만난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소개했다.

로베르 르빠주는 전통 연극 형식에 혁신적 테크놀로지를 도입, 현대의 삶에서 받은 영감을 다층적 스토리텔링과 환상적 비주얼로 풀어낸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를 통해 현대 연극의 경계를 확장시켜온 세계적인 거장인 그가 지난 2007년 '안데르센 프로젝트' 이후 12년 만에 내한했다.

르빠주는 "정말 오랜만에 한국에 방문했다. 그간 한국에 제 작품이 많이 소개됐다. 전 세계에서 엑스마키나(로베르 르빠주의 극단) 작품을 소개하면서 특히 한국 관객이 인상 깊고 좋았다. 한국 관객들이 어리고 젊다는 것, 연극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지 않은 게 놀랍다"고 소감을 전했다.

'887' 로베르 르빠주 [사진=LG아트센터]

12년 만에 내한해 선보이는 작품은 1인극 '887'이다. 로베르 르빠주의 자전적 이야기에 바탕을 뒀다. '시의 밤' 40주년 기념식에 초청받은 로베르 르빠주가 시 낭독 요청에 고대 그리스로부터 내려오는 기억법 '기억의 궁전'을 활용하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는 "처음으로 인물 뒤에 숨지 않고 본명을 걸고 선보이는 작품이다. 젊은 시절을 돌아보는 자전적 이야기다. 기억이란 것이 어떤 현상인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보는 작품이다. 기억의 의학적, 과학적 측면 등 모든 면을 탐구한다"며 "제 어린 시절을 다뤄 굉장히 즐겁고 재밌는 작업인 동시에 슬프고 아픈 경험이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하나의 감정적인 롤러코스터였다. 어린 시절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찾아헤맸다. 예를 들어 부활절에 찍은 사진을 보며 행복했다 생각했지만, 디지털화해 확대해보니 제 표정 이면의 슬픈 기억, 안 좋았던 상황들이 떠올랐다. 저 스스로 나쁜 기억은 모두 밀어버리고 좋은 기억만 남기려고 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887' 로베르 르빠주 [사진=LG아트센터]

'887'은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퀘벡 시티 머레이가 887번지에서 제목을 따왔다. 7명의 대가족이 부대끼며 살았던 비좁은 아파트, 개성 넘치는 이웃들, 동네의 풍경과 거리에 얽힌 모든 기억들이 보관된 내면의 상징적 장소를 의미한다. 삶의 소중한 순간들과 함께 1960년대 조용한 혁명의 물결 속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겪은 퀘백의 근대사도 담는다.

르빠주는 "모든 등장 인물과 사건은 실제다. 다만 이 모든 것들을 연결시켜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면서 달라진 점은 있다. 예를 들어 몇몇 길 건너 거주했던 사람을 건물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는 것 등이다. 제가 만든 연극 세상에 제가 너무 빠져들어 잘못된 정보를 가족들이 고쳐주기도 한다"고 밝혔다.

이어 "이 작품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큰 서사로 연결한다. 가족의 이야기로 공감대를 일으키는 동시에 캐나다의 역사나 정치도 담아낸다"며 "1950년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계층적, 계급적 갈등과 마찰이 계속 일어났다. 지금 캐나다는 많은 변화를 겪고 평등하지만, 1960년대만 해도 차별이 빈번했다. 이런 이야기가 현대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도 연결고리가 있다"고 말했다.

작품은 뇌에서 작동하는 기억의 매커니즘, 그렇게 저장된 정보의 완전성에 대한 의문, 그 기억들을 바탕으로 형성된 정체성, 망각과 무의식, 개인의 기억과 집단 기억, 기억을 매개로 이뤄지는 예술 '연극'의 기원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기억'으로의 여정을 그린다.

르빠주는 "나이가 들어가는 배우에게 기억이라는 것은 큰 주제가 된다. 연극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기억을 담아내는 거다. 연극과 기억은 가깝게 연결돼 있다"며 "배우가 대사를 외우고 연기할 때 뇌의 다양한 부분이 자극을 받고 활성화된다. 연기를 하고 무대에 선다는 것은 기억을 끊임없이 활용하고 뇌의 모든 요소를 사용한다"고 말했다.

'887' 로베르 르빠주 [사진=LG아트센터]

이 작품은 시간 속에 점점 잊히는 것과 여전히 밝게 빛나는 것들을 대비, 기억의 원리와 본질에 대해 깨닫게 만든다. 무대 위 현재의 집, 어린 시절의 아파트 등 여러 공간으로 변신하는 세트, 기억에서 재현해낸 듯한 아기자기한 미니어처, 옛날 사진과 신문의 이미지 등이 마치 우리와 가까운 이의 추억을 직접 들여다 보는 느낌을 선사한다.

르빠주는 "항상 뉴테크놀로지를 사용해왔다. 초반에는 신기술 사용이 다소 서툴러 기술적인 도구가 서사, 연기, 연극적 요소보다 전면에 나서 이야기를 잠식하는 점도 있었지만, 시간이 많이 흐르면서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또 "이 작품은 미니 테크놀로지를 지향한다. 신기술이나 다양한 장치를 활용하지만 간소화하고 시적인 형태로 접목한다. 하이테크놀로지를 사용하지만 다양한 미니어처를 사용하기 때문에 인형극과 흡사한 형태"라고 덧붙였다.

로베르 르빠주는 '달의 저편' '안데르센 프로젝트' '바늘과 아편' 등 그동안 한국 관객들에게 연출가로서 모습만 알려져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가 직접 출연해 배우로서의 진가도 보여줄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르빠주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억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주제다. 다양한 사회적 현상과 담론들이 이어지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치 기억을 잃은 것처럼 여전히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 예술가로서 예술의 역할이 이런 기억을 상기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재현해 기억을 되살리고 이를 통해 사회나 사람들이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로베르 르빠주의 1인극 '887'은 오는 29일부터 6월 2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hsj1211@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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