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교육열 등 금기시 소재 다뤄
신세대 배우 대거 투입해 새바람
'한류 드라마 차단 차원" 분석도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북한이 새로 제작해 방영한 TV드라마 한편이 선풍적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황해도의 한 협동농장을 배경으로 초급 간부와 주민들의 일상을 그려낸 22부작 '백학벌의 새봄'이다.
평양에서 발간된 대외 선전 잡지 금수강산 7월호는 이 드라마에 대한 특집 기사에서 "지난 4월부터 방영돼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며 "오늘의 농촌생활을 담고 있는 현실 주제의 작품"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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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22부작 TV드라마 '백학벌의 새봄'에서 검사인 영덕 역을 맡은 배우 최현(오른쪽)과 농업연구사 경미로 열연한 리유경. 두 사람은 영덕 어머니의 반대로 갈등하다 헤어져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사진=조선중앙TV 캡처] 2025.07.08 yjlee@newspim.com |
이 잡지는 "수십 년 전에 나온 농촌물 주제의 TV연속소설 '석개울의 새봄'이 최고작으로 돼있었는데 이 작품도 그에 못지않다"며 "현대판 석개울의 새봄"이라고 평가했다.
북한 작가 천세봉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1992년 선보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작품에 견준 것이다.
잡지는 또 "수많은 시청자들이 제작 집단에 축하편지와 손전화 통보문을 보내왔고 길거리에서 주역배우들을 만나면 축하의 박수를 보내줬다"고 전했다.
최근 방영을 마쳤지만 여운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로 볼 때 북한 당국이 조만간 재방송을 통해 작품을 다시 선보일 가능성이 점쳐진다.
어떤 대목이 '백학벌의 새봄' 열풍을 일으켰는지 짚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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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신작 TV드라마 '백학벌의 새봄'을 소개한 북한 월간지 금수강산 7월호 기사. 드라마의 구성이나 배우 들을 상세히 소개한 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고 밝혀 눈길을 끌고 있다. [사진=금수강산] 2025.07.08 yjlee@newspim.com |
◆'인민생활' 리얼하게 그려내 공감
금수강산이 관련 기사에서 지적한대로 '백학벌의 새봄'은 과거 북한 TV드라마나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생생한 삶의 현장을 그려내고 있다는 평가다.
예비 시어머니의 반대로 훈남 검사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게 된 어느 농촌 연구사의 죽음을 담아낸 대목은 애절한 느낌을 갖게 한다.
배경 좋은 집안에서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 검사라는 게 자랑스러운 어머니는 교제중인 여성을 몰래 찾아가 "처녀 쪽에서 먼저 돌아서 달라"고 단호하게 통보한다.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임을 알게 된 여성은 연구에 골몰하다 중병으로 숨지게 되고, 두 청춘 남녀는 영원한 이별을 하게된다.
출신 성분이나 집안 배경 등으로 인해 결혼을 반대하는 모습 등에서 오늘의 북한 세태를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으로, 과거 북한 드라마‧영화에서는 좀체 찾아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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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남편이 앞치마를 두르고 밥상을 차리는 북한 TV드라마 '백학벌의 새봄' 한 장면. 과거의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남편의 이미지에서 탈피한 것으로, 젊은층과 여성의 감성에 맞춘 모습으로 분석된다. [사진=조선중앙TV 화면 캡처] 2025.04.27 yjlee@newspim.com |
북한 문화콘텐츠 전문가인 전영선 건국대 교수는 "아들과 사귀는 여성이 마음에 안 든다고 헤어지라하는 대목도 그렇고, 청춘남녀의 새드엔딩도 처음이라 당혹스럽기까지 하다"고 말했다.
시골 협동농장 간부로 자진해서 전출을 하려는 남편에게 대입을 앞둔 아들 생각은 않느냐고 따져 묻는 의사 아내의 모습도 등장한다. 도농 간의 생활수준 격차 못지않게 입시교육에 대한 부모들의 관심을 드러내는 장면에서는 교육열만큼은 남북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한다.
협동농장에서 좋은 땅을 배정받으려는 농장원들의 갈등과 담당 간부들과의 충돌 등도 이 드라마의 단골 소재다.
심지어 남편을 위해 상관의 부인에게 게사니(거위)를 뇌물로 은밀하게 건네는 상황까지 보여준다. 사실 이 드라마의 큰 흐름을 이루는 게 협동농장에서 생산된 곡물이 대량으로 빼돌려진 비리사건과 그를 둘러싼 에피소드이다.
통일부 당국자는 "북한 사회의 치부라 할 수 있는 비리 장면을 드라마에 묘사한다는 건 체제 특성상 과감한 연출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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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남편의 시골 전출을 앞두고 대입을 앞둔 자녀의 교육 문제로 다투는 부부의 모습을 그린 북한TV드라마 '백학벌의 새봄'의 한 장면. 도농 간의 교육 격차와 부모의 입시열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눈길을 끈다. [사진=조선중앙TV 캡처] 2025.07.08 yjlee@newspim.com |
◆'꽃미남' 배역으로 "처녀들 속에 호감"
연기력이 뛰어난 전문배우들 못지않게 젊은 신예 연기자들을 대거 내세운 대목도 인기몰이의 비결로 분석된다.
평양연극영화대 최향이를 비롯한 뉴페이스들이 등장해 요즘 북한 세대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 호평을 받았다.
극 중 간부집 딸인 도미래 역할을 맡은 최향이는 권투선수 출신인 동창이 적극적인 구애에 나서자 "처음엔 다들 그렇게 걸치더구만요"하며 거절의사를 밝히는 등 톡톡 튀는 신세대 연기로 주목받았다.
검사역을 맡은 최현에 대해 금수강산은 "최근 영화들에 출연한 신인배우지만 이번에는 또 다른 개성적인 모습으로 처녀들 속에서 호감을 불러 일으켰다"고 전했다.
탈북 1호 박사인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은 "후덕한 이미지의 전통적인 북한의 미남형 배우들과 달리 호리호리한 얼굴의 젊은 배우는 마치 한국 드라마의 꽃미남이나 훈남 스타일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했다.
북한 신세대들의 취향에 맞게 배우 캐스팅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는 얘기다.
시골 할머니 역할을 맡은 배우 류금희도 눈길을 끄는 인물이다. 오랜 기간 북한TV에서 소개되는 외국영화의 더빙 전문 배우(성우)로 활약해온 그가 처음 드라마 배역을 맡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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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북한 TV드라마 '백학벌의 새봄' [사진=조선중앙TV 캡처] 2025.07.08 yjlee@newspim.com |
◆"배우와 스텝 몇 달간 농촌에서 현실체험"
드라마의 작가 김송림과 연출을 맡은 엄창걸은 모두 농촌 출신이다. "하여 작가와 연출가는 현지 취재를 하지 않고도 농촌물 주제의 작품을 어렵지 않게 엮어낼 수 있었다"는 게 북한 측 설명이다.
인기 TV연속극인 '방탄벽'을 쓴 김 작가는 5개월 남짓한 기간에 시나리오를 완성했다고 한다.
전영선 교수는 "방탄벽의 정옥금이 '백학벌의 새봄'에서 리당비서 부인 숙영으로 나오는 등 몇몇 등장 배역이 겹치는 것도 이런 배경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염 연출은 모든 배우들이 몇 달 동안 농촌에서 실제 생활을 체험하며 실제 농사꾼의 체모를 갖추도록 했다는 것.
금수강산은 "창작집단은 2023년 5월부터 황해남도 신천군의 어느 한 농장에 나가 농장원과 함께 일도 하며 촬영을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드라마 엔딩 부분에는 황남 백암협동농장이 촬영장소 협찬을 해주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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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김일성 출생 112주를 맞아 지난 2024년 4월 14일 밤 평양 청년공원 야외극장에서 열린 대학생 예술소조 종합공연. 객석의 대학생들이 일제히 핸드폰 플래시를 켜들고 호응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사진=조선중앙통신] |
◆"한류 드라마 맞대응에는 역부족"
새로운 형식과 구성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하지만 '백학벌의 새봄'이 북한 드라마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다.
금수강산도 이 드라마를 소개하며 '농촌진흥의 새봄을 형상한 TV연속극'이라고 규정한 데서도 이는 드러난다.
군 안에서 가장 뒤떨어진 백학리 리당비서로 부임한 주인공이 농장원들과 아픔을 함께하며 각성하게 만들고, 부정과 원칙적으로 투쟁하며 과학적 영농법으로 식량 생산 할당량을 계획보다 넘쳐 수행한다는 스토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이나 '어머니 노동당' 같은 북한의 드라마‧영화에 틈만 나면 등장하는 체제 선전이나 김정은 찬양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점은 달라진 대목이다.
시나리오나 연출 과정에서 김정은이 '지도'했다거나 제작 과정을 지원하고 각별한 관심을 갖고 봐주었다는 식의 언급도 없는 점도 눈길을 끈다.
이는 북한이 의도적으로 수령이나 최고지도자 운운하는 내용을 빼버리거나 빈도를 낮추었다는 의미다.
대북정보 관계자는 "김정은과 최고 핵심부의 승인 없이 드라마‧영화 촬영에서 임의로 체제선전이나 수령을 절대시 하는 부분을 건드리기 어려운 게 북한 문화예술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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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만수대언덕의 김일성·김정일 동상을 참배하는 북한 주민들. [사진=뉴스핌 자료] |
이는 북한 체제와 김정은에 대한 변화하는 북한 주민들의 인식을 어느 정도 반영한 측면이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특히 틀에 박힌 북한 드라마에 식상한 신세대를 주축으로 한 주민들을 다시 TV 앞에 앉히려는 의도일 수 있다.
청년층의 한류 드라마‧영화 탐닉에 충격을 받은 김정은이 반동사상문화배격법 등을 만들어 차단에 나섰지만 여의치 않자 새로운 TV드라마로 마음을 돌려세우려는 움직임이란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의 변화로는 세계적으로 정상급에 올라있는 K-드라마의 재미와 매력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란 지적에 무게가 실린다.
yjle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