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 북서물미술의 '회화반격' 특집전
이건희컬렉션 작가 8인 통해 회화에 주목
근대미술 최고걸작부터 현대거장 대표작
[서울=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미술전문기자=초현대미술 작가들은 '회화의 시대는 갔다'고들 하지만 회화의 저력은 여전하다. 오늘날에도 회화는 고유한 가치가 있고, 파워를 품고 있다. 회화의 저력과 가치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기획전이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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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미술전문기자=유영국 '작품' 1974. 캔버스에 유채. 133x161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2025.06.10 art29@newspim.com |
서울시립미술관(관장 최은주)은 이건희컬렉션 작가 8인의 여정을 통해 미술에 있어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장르인 '회화'에 주목하는 전시를 기획했다. 통상적으로 이건희컬렉션을 보여주는 전시가 아니라 이건희컬렉션과 함께 근현대미술 최고의 걸작을 묶은 이번 기획전의 타이틀은 '그림이라는 별세계:이건희컬렉션과 함께'이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1층 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는 격정의 우리 근현대사를 지나며 그림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나섰던 이건희컬렉션 작가 8인의 여정을 통해 미술에 있어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매체인 회화에 주목하고 있다. 전시의 출발은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과 지역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컬렉션과 리움미술관의 소장품 36점을 기반으로 했다. 여기에 서울시립미술관을 비롯해 공사립미술관과 갤러리, 개인 소장 작품 23점을 곁들여 개별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더욱 심도있게 보여주는데 주목했다.
◆이건희컬렉션 작가 8명을 통해 본 그림이란 별세계
미술의 가장 대표적인 장르인 '회화'는 형상을 그리고, 색을 올리는 작가의 행위에 기반한 평면예술이다. 여러 장르, 타 매체와 결합하고 확장되는 컨템포러리아트의 거센 흐름 속에서 어찌 보면 전통적 의미의 회화는 이제 과거의 것이 되어버린 듯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회화를 회화이게 하는 고유의 특징이며, 회화를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예술장르로 만드는 생명력의 원천이기도 하다.
전시작가는 강요배 곽인식 권옥연 김봉태 방혜자 유영국 이인성 하인두 총 8명이다. 출생연도가 1912년에서 1952년에 이르는 8명의 작가들에게 미술은 곧 '회화'이자 그리기였다. 이번 전시는 이같은 회화 특유의 성격이 될 수 있는 풍경, 색채, 물성의 개념을 토대로 해 '모습, 정경, 그리고 자연', '색은 살아 움직인다', '물질로 수행을 할 때'라는 3개의 큰 주제로 짜여졌다.
전시 타이틀인 '그림이라는 별세계'는 한국 근대화단을 상징하는 이인성이 "화가의 미의식을 재현시킨 별세계(別世界)"로 회화를 은유한 것에서 차용했다. 이는 작가들이 그림을 통해 도달하고자 했던 '궁극의 세계를 탐구하고자 함'을 함축한다. 또 '그리다'라는 행위와 '그리움'의 감정을 내포한 그림이 가진 깊은 뜻을 표현하기에 회화라는 단어는 부족하다는 참여작가 강요배의 생각에 착안해, 오로지 그림과 더불어 살고 숨쉬었던 8명 작가의 마음과 염원을 들여다본다는 뜻도 담겨 있다.
전시공간은 작가별로 독립된 8개의 방으로 구성됐다. 마치 작가들의 개인전에 온 듯 각 작가의 예술세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아치 형태의 문을 통해 각기 다른 벽색깔을 한 공간이 유기적으로 이어지며 회화의 진격을 음미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6·25전쟁과 남북분단, 전후 혼란기까지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작가들에게 화가로서의 삶은 녹녹하지 않았을 것이다. 팍팍하고 고단한 시절,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절박함은 그들을 캔버스 앞으로 이끌었고, 그림은 간섭받지 않을 자유 그 자체이자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길이었다. 이에 내면으로 파고들며 도달하고자 했던 꿈과 이상향이기도 했다.
8인의 작가들은 서구의 근현대미술을 직·간접적으로 수용해 양식적 수단으로 삼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나의 정체성과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 끝없이 고뇌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이번 전시를 구성하는 3개의 주제를 넘나들며 아우르는 이들의 작품세계는 회화의 넓은 지평을, 그리고 '그림이라는 별세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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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미술전문기자=이인성 '가을 어느 날', 1934. 캔버스에 유채. 98x161cm. 리움미술관 소장 2025.06.10 art29@newspim.com |
◆풍경='모습,정경,그리고 자연' 이인성 강요배 권옥연
첫 번째 주제는 인물과 정물, 자연을 소재로 한 '풍경'이다. 현대미술 문외한이라 해도 누구나 편하게 이해하기 쉬운 주제다. 자연의 경치와 주변 인물과 사물, 그리고 꿈속에서 본 듯한 미지의 장소까지, 작가들의 시선을 멈추게 하거나 마음 속에 자리한 장면들이 풍경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풍경의 오랜 주제인 자연은 작가의 내면을 반영하는 중요한 주제로서 등장한다. 자연과 풍경은 때로는 민족적 정서가 흐르는 정경으로, 때로는 상상 속 초현실적 세계로 다양하게 변주된다.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작가는 대구 출신의 천재화가 이인성의 방이다. 리움미술관이 소장 중인 이인성의 대표작 '가을 어느 날'(1934)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작가에게 조선미술전람회 특선을 안긴 이 파워풀한 작품은 푸른 가을 하늘 아래 넘실거리는 해바라기와 옥수수, 그리고 그 아래 여인과 소녀가 질박하면서도 멋지게 어우러진 걸작이다. 1930년대 한국 화단에서는 청명한 하늘과 붉은색의 적토가 조선의 색으로 인식됐는데 이인성은 푸른색과 붉은색의 강렬한 색채 대비를 통해 조선 고유의 향토색을 그 어떤 작가보다 잘 표현했다. 작가는 "내게 붉은 흙은 한없이 친밀했던 고향"이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이인성의 또다른 대표작인 '경주의 산곡에서'도 이번 전시에 나왔다. 1935년 조선미술전람회의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은 작품이다. 찬란한 유적을 남긴 경주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아이를 업고 있는 소년의 시선 저 멀리 첨성대가 보이고, 바위에 걸터앉은 소년의 발치에는 깨진 기왓장들이 있다. 화면을 가득 채운 붉은 흙빛으로 인해 풍경은 더욱 강렬해졌지만, 왠지 모를 우수가 느껴진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먼 곳을 응시하는 인물들에서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향수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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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미술전문기자=강요배 '백련'. 2006. 캔버스에 아크릴릭. 112.5x162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2025.06.10 art29@newspim.com |
다음은 연한 베이지색으로 꾸며진 제주화가 강요배의 전시실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 중인 이건희컬렉션인 강요배의 대표작 '백련'이 관람객을 맞는다. 작가의 작업실 연못에 피어난 하얀 연꽃을 그린 이 작품은 담채기법의 수분 가득한 붓질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에서 자연의 리듬감이 느껴진다. 강요배는 자연에서 나는 물과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고 이를 추상화하는데 이로써 화면은 춤을 추고, 음악이 흐른다. 이는 '내면 리듬의 풍경'인 셈이다.
강요배의 '알' 또한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 중인 이건희컬렉션이다. 제주도의 오름 사이로 해가 뜨는 장면을 간결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작가는 해를 새하얀 색으로 그려 둥근 알처럼 보이게 했다. 단순함의 미학을 전해주는 매력적인 그림이다. 강요배의 '담일'은 흐린 날 하늘 풍경을 포착한 작품이다. 앙상하게 꺾인 멀구슬나무 가지사이로 흐린 날이어야만 윤곽이 비로소 보이는 해가 살포시 고개를 내밀었다. 나뭇가지의 거친 질감과 그 속에서 부드럽게 피어오른 해의 모습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강요배는 "그림의 획과 속도는 매우 중요하다. 나는 쉭쉭하고 소리나게 선이 그어지지 않으면 그림이 안 그려지는 것 같다. 속도가 있어야 하고, 선들이 다 벡터를 가져야 하고, 강약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자연을 관찰하고, 자연을 만지고, 자연 속에 살아봐야 그런 선이 나온다는 거다. 디지털 이미지나 사진 등 인간이 가공한 이미지로부터 출발하면 획이 나올 수 없다. 이 차이는 매우 크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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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미술전문기자=권옥연 '살구꽃 필 무렵'. 1991. 캔버스에 유채. 88x98.5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2025.06.10 art29@newspim.com |
세번째 방은 신라토기의 은근한 빛깔을 주조로 초현실적 무드를 추구한 권옥연의 방이다. 권옥연이 즐겨 그린 인물화인 '소녀'는 이국적인 생김새의 소녀가 주인공이다. 권옥연은 여인 누드, 소녀상과 같은 인물화를 평생에 걸쳐 200여 점 가까이 그렸다. '인물그림이야말로 평생 공부'라고 했던 작가는 늘 모델 없이 그렸다. '누군가를 닮게 그리지 않고, 표정과 고유성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림은 속일 수 없는 자기표현이라고 믿었던 그에게 인물화는 자신의 진실과 내면세계를 읽을 수 있는 자화상이기도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 중인 이건희컬렉션이다.
권옥연의 대표작으로 역시 이건희컬렉션인 '살구꽃 필 무렵'은 연분홍색 살구꽃이 피는 봄의 정경을 담고 있다. 파리에서 귀국한 후 권옥연은 전통문화와 민속적 소재를 작품에 대입하는데 주력했다. '살구꽃 필 무렵'에는 정자에 꽂혀 있는 솟대가 풍년을 기원하며, 둥근달을 연상시키는 원형의 형상과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이 펼쳐진다. 과거의 근원적 세계에 대한 환상과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이 작품은 '한국적 초현실주의'라 불리는 권옥연식 풍경의 세계가 잘 드러나 있다.
◆색채 '색은 살아 움직인다' 유영국 김봉태 하인두
두 번째 주제는 이미지를 넘어서는 '색'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구한다. 회화를 구성하는 조형적 요소로서 색을 중요시 했던 작가들은 기하학적인 형태의 색면을 바탕으로 한 추상작업에 헌신한 것이 공통점이다. 이들의 작품에 보이는 선과 면의 단순하고 간결한 구성은 화면에서 색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작품 속 색은 그 자체로 생동하며, 순수한 자연의 원형과 생명력 넘치는 근원적 세계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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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그림이라는 별세계:이건희컬렉션과 함께' 중 유영국 화백의 작품을 모은 전시실. [사진=이영란 미술전문기자]2025.06.10 art29@newspim.com |
이 파트에서는 '산의 화가' 유영국 전시실이 가장 압도한다. 노란색 벽으로 조성된 전시실에서 유영국의 아름답고 탄탄한 작품들이 빛을 발하고 있다. 유영국은 1930년대 일본 유학시절부터 구상적인 회화가 강세였던 화단 풍토 속에서도 기하학적 경향의 추상을 과감하게 선택했다. 일평생 자연을 대상으로 한 조형실험에 몰입했던 작가는 특히 산을 주제로 선, 면, 색, 형태와 같은 조형요소들이 세련되게 어우러지는 순수추상의 세계를 선보였다. 서울시립미술관이 소장 중인 유영국의 1967년 작품인 '산'은 산의 원형을 상징하는 노란색 삼각형이 화면 중앙에 과감히 자리하고 있다. 1960년대 후반기 유영국 작업의 특징인 균형 잡힌 기하학적 색면추상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유영국의 1970년대 작업은 1960년대 후반의 직선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완만하게 굽어지며 원경으로 뻗어나가는 움직임이 느껴진다. 유영국이 작품 주제를 산으로 정한 것은 산이 우리 민족이 지닌 정서를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산을 그리다 보면 그 속에 굽이굽이 길이 있고, 그것이 우리의 인생인 것 같다"며 그림 속 산에 여러 결의 삶을 녹여냈다.
1974년작으로 곡선적인 움직임이 두드러진 '작품'은 색면의 표현에 있어서 그 형태와 색감이 더욱 짜임새있게 압축됐다. '산에는 어떤 것이든 다 있다'는 유영국의 말처럼 봉우리의 삼각형과 능선의 곡선, 원근의 면, 그리고 다채로운 색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대표작이다.
다음 전시실은 밝은 원색과 단순한 도형을 특징으로 하는 김봉태 작가의 방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김봉태의 '창문'연작은 "세상을 어떤 창으로 보는지에 따라 삶의 방향이 바뀐다"는 책의 한 구절에서 시작됐다. 수직의 창들이 압도적인 크기로 펼쳐지는 '창문 시리즈 97-192'는 밝은 원색의 창을 통해 경쾌하고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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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김봉태 '창문 시리즈 97-192' 1997. 패널, 천에 아크릴릭 등 혼합재료. 182.5x514.4cm [사진=이영란 미술전문기자] 2025.06.10 art29@newspim.com |
또다른 연작인 '춤추는 상자'에서 김봉태는 플렉시글라스라는 새로운 바탕재료를 도입했다. 투명한 아크릴판의 앞면과 뒷면에 색면을 채색하는 작업방식은 화면에 공간감을 주는 동시에 색면들이 살아움직이는 듯한 효과를 준다. 김봉태의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원색은 삶에 대한 긍정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으로 표현해준다.
종교적 정신성을 담은 기하학적 색채추상을 전개한 하인두의 전시실은 그 경건함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작가는 1970년대 후반 '막연한 전위나 실험이 아닌 한국냄새가 짙은 작품을 해야 한다'며 재료는 서양의 것을 쓰더라도 내용은 한국의 전통을 녹여낸 '참 멋'을 담고자 했다. 그 결과 선택한 것이 불교의 우주관을 담은 '만다라'형상이었다.
규칙에 따라 반복되는 만다라의 화려한 색채는 사찰의 단청에서 온 것으로, 전통적 색감을 정신성으로 받아들이는 추상적 종교회화로 귀결됐다.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인 하인두의 1985년작 '만다라'는 만물이 중심점을 시작으로 그물처럼 얽혀 있는 추상적 패턴이 생명의 질서와 무한의 세계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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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미술전문기자=하인두 '만다라', 1988. 캔버스에 유채. 162.2x131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2025.06.10 art29@newspim.com |
하인두는 1985년 "만다라는 부처가 자신의 마음을 깨닫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며, 인류의 이상으로서의 불교적 우주의 본질을 지향하는 것이다. 만다라는 본래 '본질'을 나타낸다. 나는 그림에 만다라 형상을 찾아내려고 하는데, 이는 서로서로 힘차게 얽히면서 불변하는 중심을 둘러싸고 돌고 도는 무한의 세계, 그 신묘한 우주와 자연의 질서다."라고 했다.
◆물성 '물질로 수행을 할 때'. 방혜자 곽인식
이번 기획전의 마지막 주제는 반복적인 작가의 행위로 인해 2차원 평면에 깊이 발현되는 '물성'이다. 마음을 비우고 신체 호흡으로 정신을 집중하며, 물질과 대면하는 작가들의 작업과정은 수행자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 이들은 종이의 앞면 뿐 아니라 뒷면에도 끊임없이 색을 쌓아간다. 서로 겹치고 스며들며 움직임을 갖게된 색은 종이의 물성과 만나 표면 너머 빛의 공간으로 환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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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미술전문기자=방혜자 '하늘의 땅', 2011. 패널 종이에 천연안료, 지름 179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E2025.06.10 art29@newspim.com |
8명의 화가 중 유일한 여성작가인 방혜자의 전시실은 검푸른 차콜빛으로 조성됐다. 1961년 도불 후 60년간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활동한 작가는 '파리에 가서야 자신이 한국인임을 실감했다'로 토로했다. 작가는 서양의 물감과 함께 한국의 재료인 한지를 사용해 독특한 콜라주 기법을 선보였다. 자연의 요소를 유기적으로 표현한 듯한 방혜자의 작품은 은은한 색감과 어우러지는 한지의 부드러운 질감이 특징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인 방혜자의 '하늘의 땅'(2011)은 빛과 생명의 기운이 모이는 무한한 원의 공간, 우주를 상상하게 하는 작품이다. 방혜자는 우주가 빛과 색, 에너지로 이뤄져 있다는 생각으로 그림을 그려왔고, 우주와 자신이 하나가 되는 과정을 담았다. 작업에 임하기 전 늘 빈 종이를 앞에 두고 기공(氣功)수련을 했던 작가는 우주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고 에너지를 모은 후 자신의 내면에 열리는 우주공간을 화폭에 표현했다.
사물의 물성을 탐구했던 선구적 작가 곽인식의 전시실 또한 검은 빛으로 조성됐다. 일찌기 유리 철판 전구 등의 사물로 실험미술을 구가했던 곽인식은 1970년대 후반들어 붓으로 찍은 원형의 점들로 종이를 가득 채운 화면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1978년 작품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이건희컬렉션인 '무제'는 농담을 달리한 회색조의 작은 점들이 서로 겹치며 화면을 빈틈없이 꽉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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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미술전문기자=곽인식 '작품 81-c'. 1981. 캔버스,종이에 수채. 164.5x227cm. 유족 소장 2025.06.10 art29@newspim.com |
곽인식의 투명하면서도 깊은 작품의 분위기는 종이 뒷면에서 채색하는 전통기법인 배채법에서 비롯됐다. 수없이 찍힌 뒷면의 점들이 앞면으로 옅게 배어나오며 작품에 은은한 깊이감을 형성한다. 곽인식은 자연의 재료가 가진 물성이 결국 영혼의 빛으로 환원되어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것을 꿈꿨다.
1982년에 작가는 "나는 작가가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작품에서 내가 추구하고 싶었던 것은 물질 자체가 스스로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질 자체가 말해주는 이야기를 조금 더 분명하게 들을 수 있도록 분명하게 대상의 존재성을 재건한다는 것이다. 나의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표면을 추구하면서 표면을 초월하는 것. 점은 점을 부르고 점은 점을 초월한다. 초월하고 극복하는 동시에 거기서 빛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을 나는 나의 예술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최은주 서울시립미술관장은 이번 전시가 "가장 오래된 예술매체인 회화로서 자유, 아름다움, 내면, 이상향을 탐구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작가들을 통해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의 중요성과 회화 교유의 가치를 조명하고 있다"며 "지금 이 시대 여전히 유효한 이들의 회화 언어와 메시지를 재발견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모두 36점에 이르는 이건희컬렉션의 정수와 함께, 쉽게 한자리에 모이기 어려운 중요한 근현대 회화와 판화 60여 점이 한데 어우러졌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는 놓쳐선 안될 뜻깊은 전시다. 6월 19일에는 작가들의 수행적 태도를 따라가 보는 명상 프로그램 '별세계와 나의 생애'가 마련되며, 7월 2일에는 최은주 서울시립미술관장의 전시 연계 특강('한국근대미술의 천재들')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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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의 회화반격 특집전 '떨어지는 눈' 중 윤영빈의 작품. 왼쪽 '부드럽고 날카로운 구멍'. 오른쪽 '유영하는 구멍'. 2025.서울시립미술관 커미션. [사진=이영란 미술전문기자] 2025.06.15 art29@newspim.com |
한편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은 8명의 동시대 작가들의 회화 작품을 소개하는 '떨어지는 눈'전도 동시 개최하고 있다. 미술관 3,4전시실에서 열리는 이 기획전에는 박미나 박아람 윤미류 윤영빈 이은새 장예빈 전혜림 정수진 작가가 참여했다. 역시 '회화반격' 특집으로 디지털시대 시각 중심의 세계에서 이미지에 붙어버린 눈(eyes)을 재감각하고 새롭게 움직이도록 하는 회화작업을 한 편의 서사극처럼 꾸민 자유분방하고 신명 나는 전시다. 두 전시 모두 7월 20일까지 이어진다. 월요일 휴관. 무료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