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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헌 교수의 더블린 서신] ⑧피비린내 나는 분쟁에서 평화로(상)

기사입력 : 2023년02월27일 08:00

최종수정 : 2023년03월30일 08:43

뉴스핌 창사 20주년 특별기고

아일랜드의 현대사는 참으로 다루기 무거운 주제이다. 아일랜드와 영국, 그리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아이리쉬의 디아스포라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사안들을 꼼꼼하고 치밀하게 되짚어야 한다는 점에서다. 필자도 이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두려움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간 많은 학자와 전문가, 언론인들이 다각적으로 깊이분석하여야만 이해가 되는 복합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하면서, 현재까지 온 상황을 한 번은 정직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목헌 트리니티대 교수

슬픈 사실이지만 아일랜드가 그 주권을 영국에게 빼앗긴 기간은 이럭저럭 800년의 세월이다. 원래 족장들이 각각의 지역을 다스리고 있고 이들을 연합하여 지배하는 상왕(High King) 제도를 가지고 있었던 아일랜드 섬은 1169년 앵글로 노르만 족의 침입으로 영국의 지배 하에 있게 된다. 그 후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왕비도 많았던 헨리 8세가, 당시 대륙에서 기독교의 부패를 대범하게 지적했던 마르틴 루터와 죤 칼방 등의 종교 개혁자의 물결에 무임 승차하여 잉글랜드 교회(Church of England, 성공회)를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분리시키고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이 박해는 영국과 아일랜드에 소재한 모든 수도원의 해산과 성당 재산 몰수부터 시작하여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개신교도들이 아일랜드의 얼스터 지방 (Ulster, 지금의 북 아일랜드 영토와 거의 동일)에 정착하게 되는 식민지 정책으로 이어진다. 이후 크롬웰과 의회주의자들에 의해 영국이 잠시 의회주의 공화국으로 바뀌자 아일랜드에서의 가톨릭 신자들의 핍박은 더욱 가세가 되고, 당시 아일랜드 인구의 5분의 1이 전쟁과 기아와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게 되는 참극으로 이어진다.

[목헌 교수의 더블린 서신] 글싣는 순서

1. '감자농사' 빈국서 1인당 명목GDP 세계 2위로
2. 대기근으로 인구 3분의 1 잃은 아일랜드 사람들이 잘사는 비결
3. 더블린 산책과 함께 하는 역사 기행
4. 영국의 강점에서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독립 투쟁
5. 아일랜드 글로벌 최저 법인세의 두 얼굴
6. 아일랜드의 세계 최고 기업들…기네스맥주에서 의료기기까지
7. 아일랜드 교육의 백미...중고생에 숨통 트여준 전환학년제
8. 피비린내 나는 분쟁에서 평화로 (上)
9. 피비린내 나는 분쟁에서 평화로 (下)
10. 한·아일랜드의 디아스포라와 재외동포 역량
11. 골칫덩이 국가에서 유럽의 실리콘밸리로...위기극복 DNA 채워진 아일랜드 (끝)

설상가상으로 17세기 내내 천주교인들에게 불평등한 형벌(Penal Laws)들이 제정되어 가톨릭 교도이면 아일랜드에서 교육을 받을 수도, 공직을 가질 수도, 재산을 소유할 수도 없는 등 일방적으로 불리한 종교 탄압이 18세기까지도 이어졌다.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였던 아일랜드 국민에게 가하여진 핍박이었으니 그들에게는 재산도 권력도 취할 기회가 없었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19세기 중반의 감자 역병 대기근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들 역시 이들일 수 밖에 없었다. 반면에 아일랜드 섬의 북동편 귀퉁이 북 아일랜드 지역에 몰려 살고 있었던 대부분의 개신교도들은 18~19세기의 산업 혁명의 경제 혜택이 바로 그들의 삶으로 전달되어 조선 공업, 마직 섬유 산업 등의 발달과 함께 삶의 질이 영국 본토와 보조를 맞춰가고 있었다.

즉, 종교적인 차별로 시작된 한 민족에 대한 불평등이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커다란 인권적이고 경제적인 격차를 가져오고 만 것이다. 지금도 간간이 보이는 이 인간 비극에 가슴이 아픈 이유는 가장 순수하고 심오하여야 할 종교가 단순히 사람과 사람을 분리시키고 가르는 프레임 뿐으로만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더더욱 가슴 아픈 것은 천주교와 개신교 모두 동일한 천주 하나님을 믿고 있는 신앙이며 공통적인 핵심 사상이 희생적인 사랑을 통한 백성의 구원이라는 것을 뻔히 앎에도 불구하고 이 모순된 차별을 이들이 계속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경제 논리로만 따지자면 1916년 아일랜드의 부활절 항쟁 이후 이어진 내전에서 당시 인간의 기본권을 빼앗기고 가난에 허덕였던 가톨릭 신자가 다수인 아일랜드 대부분의 지역이 영국으로부터 자주 독립을 얻기 위한 투쟁에 참여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반면 자신들의 생활권이 보장된 북 아일랜드의 사람들이 영국 연방에 귀속되고자는 하는 의지를 밝히는 것도 그리 이상하다고 여길 수는 없다.

그리하여 1922년에 체결된 영국-아일랜드 조약(Anglo-Irish Treaty)에 의하여 북쪽의 6개 카운티는 스코틀랜드, 웨일즈, 잉글랜드와 동등한 위상으로 영국에 귀속되는 북아일랜드(Northern Ireland)로, 나머지 26개 카운티는 영국으로부터 독립된 아일랜드 자유국(Irish Free State)으로 분리되고 만다.

아일랜드 공화군(IRA)의 등장과 폭력 투쟁

이 조약으로 성향과 경제적인 수준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북아일랜드가 구성되었다고 하더라도 개신교 다수 사람들 틈 속에 소수의 가톨릭교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도 민주주의에 의거한 다수결의 원칙을 실행하면서 소수 의견을 존중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수에 대한 차별과 이들을 내쫓고자 하는 폭력 행위가 곧바로 북아일랜드에서 시작되었다. 안 그래도 아일랜드의 통일을 염원하며 혹독한 내전을 치른 민족주의 노선의 아일랜드 공화군(Irish Republican Army, IRA)은 소수의 카톨릭 교도들이 핍박받는 데에 분개하여 북아일랜드에 사는 다수 개신교도들에 대해 역시 동일한 폭력으로 대항하였다. 이로써 아일랜드 내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형제 이웃 간의 피흘림이 북아일랜드에서 계속된다.  

다시 말해 역사적으로는 초기에는 종교의 탄압으로, 그리고 잉글랜드 민족이 아일랜드 민족을 이등국민으로 강등시키는 차별 정책이 400여년 동안 계속되다 보니 이제는 그 본래의 원인을 잊고 아일랜드 민족 간의 인권 탄압과 기득권의 유지를 비롯한 정치·경제·사회 문제로 고착화되고 만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이 모든 문제들이 폭력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아이리쉬인들 때문에 한정 없이 그 비극이 계속되고 이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름하여 북 아일랜드 분쟁 (The Troubles)이다. 이는 1960년대 말부터 약 30년간 아일랜드 통일을 목적으로 구성된 준군사조직(paramilitary group)인 IRA, 친영 준(準) 군사조직인 얼스터 의용군 (Ulster Volunteer Force, UVF), 그리고 이들간의 무력 살상을 막기 위하여 파견된 영국군과 왕립 얼스터 경찰 (Royal Ulster Constabulary, RUC) 등 네 개의 집단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아일랜드의 참극이다. 이 과정에서 생명을 잃은 사람이 3500여명, 부상을 입은 자들이 4만명 이상이었으며, 북아일랜드에 거주하는 사람 누구든 사상자의 가족 또는 친분이 없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이 비극을 피한 사람은 사실상 아무도 없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피의 일요일' 당시 영국군이 데리 주민들을 진압하는 모습. [사진=목헌 교수 제공]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라면 1972년 1월 30일 벌어진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을 들어야 할 것이다. 정부가 영장없이 피의자를 강제 구금할 수 있었던 북아일랜드 당시 이 제도를 반대하며 인권 평등과 회복을 되찾고자 데리(Derry)시의 시민이 평화 시위를 하던 중 영국군이 무차별 발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결과로 13명이 즉사하고 부상자 중 1명이 후일 사망하여 총 14명의 사망자를 가져왔다. 북아일랜드 분쟁 기간 중의 가장 어두운 나날 중의 하나로 기억되는 이 사건에 대해 영국 정부의 즉각적인 조사가 있었으나 영국군 공수여단의 진압이 정당하였다는 정부 옹호 결론만 나오고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26년 후인 1998년에 토니 블레어(Tony Blair) 총리에 의해 이 사건은 재조사에 들어갔고, 그로부터 12년 후인 2010년 데이비드 카메론(David Cameron) 총리는 공식적인 정부의 깊은 사과를 의희에서 발표하면서 영국군의 과잉 폭력 진압으로 데리의 시민이 부당하게, 그리고 일체 정당화될 수 없는 방식으로 희생 당하였음을 선언하였다.

한편 1981년의 메이즈(Maze) 형무소에서 일어난  IRA 소속원들의 단식 투쟁도 언급지 않을 수 없다. 1970년대 초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IRA테러범들은 전쟁 포로로 간주되어 다른 재소자들처럼 죄수복을 입지 않고 강제 노역에 가담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함으로써 형무소 내에서도 IRA 소속원들간의 지휘 명령 체계가 유지됨을 본 영국 정부는 1976년 부터 전쟁 포로 특별 대우를 없앴으며, 이에 반발한 재소자들은 모포 투쟁(Blanket Protest)을 시작으로 여러 방식의 투쟁을 하다가 1981년 3월 부터는 연쇄 단식 투쟁에 들어간다.

단식을 최초로 개시한 사람은 IRA 지휘관 출신 보비 샌즈 (Bobby Sands)였는데, 이 와중에 북아일랜드에서 영국 하원 의원 보궐 선거가 발생하여 후보로 등록하고 민주적으로 옥중 선출되기도 했다. 샌즈로 시작된 단식 투쟁은 총 23명까지 늘어갔으며 66일만에 사망한 샌즈를 포함하여 총 10명의 IRA (또는 유사조직인 INLA) 소속 재소자들이 아사하게 되었다.  당시 들끓는 여론과 정치적인 논쟁 속에서도 마가렛 대처 총리 정부는 무력 집단과는 어떠한 협상도 완강하게 거부하였으며 평화적이고 정치적인 대화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암시하였다.

보비 샌즈를 추모하는 벨파스트의 벽화. [사진= Wikimedia Commons]

이에 대항해 IRA 는 오히려 무장 폭력 테러의 수위를 높이고 대처 총리에게 복수를 하고자 영국 보수당의 1984년 전당 대회가 열리고 있는 영국의 해변 휴양 도시인 브라이튼에서 대처 및 영국 내각이 숙소로 삼고 있었던 그랜드 호텔에 폭탄 테러를 감행하였다. 새벽에 터진 폭탄에 5명이 사망하였으며 당시 호텔 방에서 집무를 보고 있었던 대처 총리는 다음 날 아침 예정된 전당 대회 연설을 통하여 민주주의를 붕괴하는 테러를 부정하는 영국인의 의지는 그 어느 누구도 굽힐 수 없다고 열변을 토했다. 이는 IRA의 의도와는 정 반대로 대중의 지지를 얻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노벨상에 및나는 아일랜드 펑화주의 활동

다행히 서로가 서로를 폭력과 억압으로 맞대응하는 시도만큼이나 눈앞에 전개되는 이 비극을 종료시키기 위한 노력 역시 수 없이 많았다. 1976년 한 IRA 소속원이 운전 도중 영국군의 총격을 맞고 즉사하면서 그 자동차가 인도를 침범해 마침 걸어가고 있던 어머니와 세 자녀를 덮쳐 자녀들 모두 목숨을 잃은 사건이 있었다. 이를 직접 목격했던 33세의 베티 윌리엄스, 그리고 목숨을 잃은 어린 세 아이의 이모였던 32살의 메어리드 코리건은 1만여명의 천주교와 개신교 여성들과 함께 평화의 행진을 시작했다. 이어 3만 5000여명의 '평화를 위한 여성회 (Women for Peace)'의 행진을 벨파스트 시에서 개최하게 된다. 그 이후 여성들에게만 제한되지 않는 운동이다 보니 그 이름이 바뀐 '평화인 공동체 (Community of Peace People)' 는 계속하여 북아일랜드의 평화를 위하여 시위를 하게 되었고 이듬해 1976년에 윌리엄스와 코리건은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하게 된다. 

이런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인도주의와 만민 평등을 염원하는 아일랜드 국민들은 한동안 묵묵히 목도하기만 했던 비극의 연속과 혼몽과 좌절의 대물림을 끊고자 의지를 드러내 보이기 시작하게 된다. 그 연장선으로 외교적인 차원에서도 북아일랜드의 문제는 영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리쉬 민족 및 미국 그리고 유럽연합(EU) 등이 함께 풀어 가야할 숙제임을 깨닫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북아일랜드 정부가 아일랜드 정부의 자문을 받으며 북아일랜드 국민의 과반수의 찬성이 있을 시에 아일랜드 섬의 통일이 가능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영국-아일랜드 협정(Anglo-Irish Agreement)을 1985년 영국의 대처 총리와 아일랜드의 가렛 피츠제럴드 총리가 체결하게 된다.

* 목헌 교수는 = 아일랜드에 2006년에 정착한 후 현재까지 트리니티 대학교 (Trinity College Dublin)의 생화학⋅면역학부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단백질 3차 구조 연구 및 항암제 개발을 수행하고, 신약 개발 회사인 해믈리트 파마 (HAMLET Pharma, 스웨덴)의 기술 고문을 맡고 있다. 또, EU와 우리나라를 비롯한 40여개국의 산업 기술 개발을 위하여 설립한 공동 연구개발 R&D네트워크인 유레카 (Eureka)의 전문 심사 위원, ICMRBS 의 이사 등을 지내고 있다. 목 교수는 서울 대학교 약학 계열 1학년 과정을 이수한 후 도미, 버클리 대학교 (UC Berkeley) 에서 학사, 퍼듀 대학교에서 (Purdue University) 박사, CJ제일제당 종합 연구소 선임 연구원, 그리고 영국 외무성 치브닝 Chevening 장학생으로 옥스포드 대학교 (University of Oxford)에서 박사후 연구원을 지낸 바 있다.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며, 그 실천을 생색내지 않고 묵묵히, 꾸준히 하는 아름다운 분들을 벗삼으며, 더블린 한글 학교 발기위원장 그리고 아일랜드 한인회장을 역임하고, 수행하는 연구와 더불어 아일랜드에서의 재외 한국인의 위상 제고 및 그늘진 곳에 살며 탄식하는 아일랜드 인의 구제 활동에 몸과 마음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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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힘들어도 환자 위했는데, 공공의 적 됐다" 전공의 '울먹' [서울=뉴스핌] 방보경 노연경 기자 = 의과대학 학생, 전공의 등은 정부가 독단적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전공의 대표는 '정부가 우리를 악마화하는 과정에서 (환자와의) 신뢰를 깨고 있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서울의대 비대위)가 30일 개최 의료개혁 관련 긴급 심포지엄에서 박재일 서울대병원 전공의 대표는 "국민 위한 의료개혁이 올바른 방향 무엇인가를 고민했는데, 공공의 적이 돼버렸다"며 울먹였다.  [서울=뉴스핌] 윤창빈 기자 =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 병원 제일제당홀에서 열린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협의회 비대위 긴급 심포지엄에 의료진들이 참석해 있다. 2024.04.30 pangbin@newspim.com 이날 열린 심포지엄은 의대 정원 확정을 앞두고 이뤄졌다. 교수들은 의료대란의 배경 및 정부에 제시할 정책 대안을 짚었다. 김민호 서울대 의과대학 학생회장과 박재일 서울대병원 전공의대표 역시 자리에 참석해 입장을 표명했다.  특히 박 대표는 혈액종양내과에서 일해오면서 느꼈던 개인적인 소회를 털어놨다. 박 대표는 "수련받으면서 몸이 힘든 시간이 있었지만, 몸이 힘들수록 내 환자의 몸은 건강해질 거라고 믿었다"고 했다.  그는 "내과 1년차 때 맡았던 환자에게 매일 울면서 어떤 말을 해드려야 하는지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신을 믿지 않지만 인생에서 처음으로 기도를 했다"며 "(그분을 볼 때마다) 복도로 다시 나와서 심호흡하고 커튼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걸 반복했다"며 개인적인 경험을 공유했다.  박 대표는 "2년 후 그분이 완치된 것을 보고 힘든 상황에 환자들 곁에 있고 싶어서 혈액종양내과를 지원했다"며 "회복한 환자들의 감사인사와 편지를 마음속에 품는데 정부는 전공의를 악마화해서 국민 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어 "자부심과 긍지 갖고 환자 곁에서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달라"며 "기피과가 있다면 시스템 개선해서 모든 전공의들이 소신껏 지원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다.  박 대표의 발표가 끝나자 30초 이상의 큰 박수소리가 이어졌다. 박 대표는 자리로 돌아간 뒤에도 휴지를 손에 쥐고 연신 눈물을 닦았다. 동료 전공의로 보이는 몇몇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방재승 분당서울대학교병원 교수는 "교수이자 선배의사로서 부끄럽기도 하고 마음이 심란하다. 전공의 대표가 저렇게 슬픈 모습 보이는 것은 진심이 아니면 나올 수 없다"며 "정부는 전공의 복귀를 이야기하기 전에 진실된 마음으로 의대생과 전공의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뉴스핌] 윤창빈 기자 =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 병원 제일제당홀에서 열린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협의회 비대위 긴급 심포지엄에 의료진들이 참석해 있다. 2024.04.30 pangbin@newspim.com 박 대표는 발표에서 정부가 전문직, 수련생, 노동자 등의 정체성이 혼재된 전공의의 입장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의료계는 오래전부터 의료체계 문제점 분석해 정부에게 해결책을 제시해 왔다. 하지만 정부는 보건의료정책 심의위원회에서도 알 수 있듯, 의료계 현장 목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특히 "타국과 비교했을 때 전문가 의견 태도가 반영되지 않았고, 의료개혁특별위원회까지 지속됐다"며 "정부는 의료체계 전반적 문제점을 잘못 진단하고 엉뚱한 해결책을 내놓고 있다"며 초기 진단과정부터 되짚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민호 의과대학 학생 대표 역시 정부가 의료계와 교육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는 점을 지적했다. 김 대표는 "정부는 필수의료만이 국민의 건강을 위해 필요하며, 비필수의료는 시스템을 왜곡하는 주범인 양 몰아가고 있다"며 "저수가 박리다매 의료 시스템이 고성장 시대가 끝나자 통째로 무너져내리고 있는데, 이를 정부가 좁고 자의적인 범위로만 보고 있다"고 했다.  이어 "증원으로 교육 질 저하, 의료 질 저하 발생하면 책임 결과 또한 의료인이 같이 안게 된다"며 "학생들은 (정부 정책이) 의료와 의학을 위하는 진심 어린 정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김 대표는 ▲시스템적 접근 필요 ▲현장의 목소리 청취 ▲필수의료패키지 반대 등의 안건을 내놓으며 대정부 요구안을 제시했다.  hello@newspim.com 2024-04-30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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