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법 개정 전 인가된 사건, 엄격한 심사 없이 회생기간 단축 안돼”
서울회생법원, 지침 폐기…13년 전에는 대법이 먼저 예규 바꿔
백주선 회장 “소급입법 아냐…법 취지 고려 안 한 판결 아쉬워”
[서울=뉴스핌] 고홍주 기자 =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 여파로 늘어나는 신용불량자를 감당할 수 없었던 2004년, 국회는 개인채무자회생법을 제정했다. 월급 중 최저생계비를 제외한 나머지만 성실하게 갚으면 채무를 모두 면해주는 회생제도가 도입된 것이다.
물론 맹점은 있었다. 바로 최대 8년을 최저생계비로만 살아가야 한다는 것. 2년 후 국회는 개인채무자회생법을 폐지하고 통합 채무자회생법을 제정하면서 개인회생기간을 최장 5년으로 하도록 했다.
이후 대법원은 법 개정 이전에 회생기간을 8년으로 인가 받은 사건들에 대해서도 변제기간을 5년으로 단축하도록 예규를 바꿨다.
하지만 같은 사안을 놓고 대법은 최근 정반대 해석을 내놨다. 서울회생법원은 지난해 변제기간을 최대 3년으로 하도록 법이 개정되자, 법 개정 이전에 5년 계획으로 채무를 변제하고 있던 이모 씨의 계획 변경 신청을 인가했다.
그러자 이 씨의 채권자인 대부업체가 소송을 제기했고, 대법은 대부업체의 손을 들어줬다. 법 개정 이전의 사건에 대해서는 채권자 등 이해관계인의 신뢰를 보호하기 위해 엄격한 심사 없이 함부로 기간을 단축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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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최상수 기자 = 서울 서초구 대법원의 모습. 2018.11.20 kilroy023@newspim.com |
백주선(46·사법연수원 39기) 한국파산회생변호사회장은 지난달 29일 뉴스핌과 만나 “채무자회생법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고려해야 하는데, 판결문 어디에도 그런 고민의 흔적이 없다”고 대법 판결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백 회장은 “채무에 관한 우리 법 제도는 추심소송을 하고 집행권원을 얻어 강제집행하는 등 90% 이상이 채권자를 위한 것”이라며 “나머지 10% 정도밖에 되지 않는 채무자 회생 영역에서까지 채권자의 신뢰를 보호한다는 관점에서 판결을 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 그게 정말 법 정책적으로 온당하다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한국파산회생변호사회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과 참여연대 등과 함께 지난 2017년 개인회생 변제기간을 최장 3년으로 하는 채무자회생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는 데 ‘1등 공신’ 역할을 했다. 2006년 이후 법원은 아주 일부의 사례를 제외하면 변제기간을 일괄적으로 5년으로 인가해왔다. 하지만 5년도 너무 긴 기간인 게 문제였다.
백 회장은 “개인회생 변제계획을 인가 받은 채무자들은 대부분 3년에서 5년 사이에 못 갚기 시작해 결국 회생 자체가 폐지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3년을 넘으면 못 갚는 거구나’라는 공통의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며 “법원이 충분히 5년 이하로 변제기간을 정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으니 법을 아예 바꾸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19대 국회 때 법 개정을 추진해서 20대 때야 겨우 통과가 됐다. 그만큼 제도를 바꾸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서울회생법원은 최장 3년으로 변제기간이 단축된 후 당시 법원장이었던 이경춘 변호사와 수석부장판사들이 먼저 나서서 회생사건 처리지침을 만들었다. 변제계획에 따라 이미 변제를 이행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계획 변경신청을 하면 변제기간을 줄여주겠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대법 판결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서울회생법원은 대법 판결 일주일 만에 “더 이상 종전 실무를 유지할 수 없으니 신중히 신청해달라”는 입장을 내놨다. 특히 이미 변제 신청을 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가용소득 및 재산의 현저한 감소사유를 알 수 있는 자료와 이를 반영한 변제계획변경안을 제출하거나 신청을 취하해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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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정일구 기자 = 백주선 한국파산회생변호사회 회장. 2019.03.29 mironj19@newspim.com |
백 회장은 “당시 회생법원은 그동안 5년의 변제기간을 고집해왔던 것에 대한 반성적인 고려로서 ‘이미 인가받았다는 것만으로 기간 단축을 하지 못하는 건 불합리하다’, ‘형평에 어긋난다’는 취지로 업무처리 지침을 만들었다”면서 “개인적으로는 회생전문법원으로서 그게 마땅한 태도라고 본다. 그래서 이번 결정이 더욱 아쉽다”고 토로했다.
특히 백 회장은 국가가 나서서 회생제도를 운영하는 기본 취지에 대한 고려를 다시 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그는 “채권자 입장에서는 ‘왜 내 돈을 돌려받을 권리를 파산회생제도를 통해서 제한하느냐’고 제도 자체에 충분히 불만을 가질 수 있다”면서도 “이 제도는 채권자만을 위한 게 아니기 때문에 이해당사자의 입장에서만 보면 해결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가사사건에서 미성년 자녀의 보호를 위해 법원이 적극적으로 직권을 발동하는 것처럼 후견적 기능을 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가계부채 문제는 국가경제와도 밀접한 연결이 돼 있다. 사실상 부실채권은 신속하게 정리해주는 것밖엔 답이 없다”면서 “회생 인가를 받은 사람이 후에 형편이 좀 나아졌다면 복지재정 없이도 그만큼 더 밥벌이를 할 수 있게 되어 사회 전체적으로 매우 바람직한 게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현재 한국파산회생변호사회는 다양한 대응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사실상 대법이 판례를 만든 이상, 하급심에서는 당분간 이에 따른 판결이 이어질 수밖에 없고 행정소송이나 헌법소원 대상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백 회장은 “현재 채무자 분들이나 민변·참여연대 등이 모여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지 논의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adelant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