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리스크 관리 패러다임 對 전망 기반 패러다임
③ 버냉키의 패러다임 진화와 전망 기반 패러다임
좌우간 여기가 버냉키의 고민, 다시 말해 새로운 전략 혹은 버냉키 스탠더드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학계의 최적화 모형 이론과 그린스펀의 리스크 관리 패러다임에서 진화(?)해 온 버냉키의 ‘새로운 종합’, 즉 전망 기반 패러다임은 과연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을까? 아직 명쾌한 결론을 내리기는 이르지만, 연준 이사 시절부터 그가 고민해 온 일련의 궤적을 추적함으로써 개괄적이나마 그 윤곽을 그려볼 수는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단 그의 ‘억제된 재량’(constrained discretion)의 문제설정에서 출발해 보자. 사실 통화정책 운영과 관련해 한 가지 근본적인 쟁점은 바로 ‘재량 대 준칙’의 문제다.
준칙은 프리드먼의 ‘k% 준칙’이 가장 단적인 예지만, 현실적으로 이런 ‘엄격한 준칙’은 거의 활용되지 않는다. 한편 재량은 정책 결정가의 판단과 유연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재량에 대한 강조는 지난 1960년대 이른바 경제 관리의 ‘미세조정’에 대한 과도한 낙관론에서 정점을 이뤘지만, 그 결과는 70년대의 대인플레 혹은 스태그플레이션 충격과 같이 참담한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버냉키는 지난 2003년 가진 한 강연에서 아예 ‘재량 대 준칙’의 전통적인 대립 구도를 지양하고, 대신 ‘억제된 재량’이라는 통합 원칙을 제시한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통화정책의 적절한 틀”로서 “전세계적으로 통화정책에 대한 표준적 접근법”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억제된 재량이라는 ‘정책 운영체계’(policy framework)는 “엄격한 정책 준칙의 비유연성과, 정책결정자들의 족쇄 없는 재량에 고유한, 기율 및 구조의 결여라는 문제 간에 균형을 도모하는 것”으로 간략히 정의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2004년 말 그는 새로운 통화정책 운영체계로서 ‘전망 기반 정책’을 제시한다. 이와 억제된 재량 간에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버냉키가 양자를 직접 비교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재량 대 준칙이라는 고전적인 논쟁 구도에 기반했던 문제의식을 한 차원 진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사고 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정리될 수 있다.
(1) ‘준칙 없는 재량 없다’는 의미에서 순수한 재량을 배제해, 논쟁 구도를 ‘수단 준칙 대 타겟팅 준칙’으로 재편시킨 뒤, (2) ‘재량 없는 준칙 없다’는 의미에서 엄격한 준칙의 뉘앙스를 탈각시켜 “단순 피드백 정책” 대 “전망 기반 정책”의 논쟁 구도로 재정립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를 통해 오늘날의 보다 현실적인 정책 운영․선택의 틀이 확보된다는 게 버냉키의 진단이다. 이 두 가지 틀은 글로벌 중앙은행 전반에서 두루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각종 데이터 수집과 모델링 작업에 쏟는 막대한 자원들, 그리고 중앙은행 전망의 정교함과 상세함을 감안할 때, 그 무게 중심은 ‘테일러 준칙’과 같은 단순 피드백 정책보다는 전망 기반 정책에 쏠린다.
이런 점에서 보면, 버냉키의 전망 기반 패러다임은 억제된 재량처럼 역시 현대 글로벌 중앙은행의 컨센서스를 반영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강점은 기존의 컨센서스를 ‘추수’하기보다는 선도적으로 컨센서스를 ‘개척’하는 능력이다.
좌우간 이렇게 전망 기반 정책 패러다임은 현대 중앙은행 시스템 내에서 억제된 재량에 비해 한층 구체적인 지위를 얻게 된다. 특히 버냉키는 전망 기반 패러다임에서 재량의 구체적인 여지를 포착할 수 있다는 점에 긍정적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그린스펀을 끌어들여 리스크 혹은 불확실성, 나아가 비대칭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리스크 조정 전망 기반 패러다임”). 게다가 버냉키가 자신의 주요 관심사로 밀어붙이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문제도 이런 전망 기반 패러다임을 통해 정책 운영체계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로 편입될 수 있게 됐다. 굳이 인플레이션 타겟팅을 동원하지 않고서도 말이다.
사실 버냉키는 인플레이션 타겟팅을 (1) 정책 운영체계로서 억제된 재량과 (2) 커뮤니케이션 전략으로 분해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인플레이션 타겟팅=억제된 재량+커뮤니케이션’인 셈이다. 그렇다면 커뮤니케이션은 정책 운영체계와 분리된 별도의 자립성을 지니게 된다.
하지만 그는 커뮤니케이션 혹은 “발언”(talk)이 그 자체로 독립된 정책 수단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여기에 전망 기반 패러다임의 의미가 있다. 즉, 이제 커뮤니케이션을 정책 운영체계에 내재적으로 포함시킬 수 있게 된 것. 아마도 이런 인식이 최근 그가 특정한 제도나 운영체계로서 인플레이션 타겟팅을 고집하기보다는 전망 기반 패러다임 하에서 구체적인 쟁점(즉, 수치적이고 명시적인 목표 혹은 타겟 자체)에 천착하게 만들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상의 분석에 기반, 이제 버냉키의 전망 기반 패러다임의 내재적 구성요소들을 점검해 보기로 하자. 크게 네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우선, ‘억제된 재량’이 그 하나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이런 패러다임은 재량 대 준칙이라는 고전적인 대립 구도를 정책 현실에 부합하는 하나의 틀로 통합한 것이다. 물론 그 자체로만 보자면 너무도 일반적인 접근으로, 실제 정책 운영 과정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는 맹점이 있다. 특히 재량 혹은 정책 판단의 구체적인 개입 여지가 모호하다는 점이 문제다. 하지만 전망 기반 정책을 통해 재량의 개입 여지가 구체화됨으로써 이런 맹점은 해소될 수 있게 된 셈이다.
둘째는 금리 행보의 ‘점진주의’(gradualism)다. 여기서는 무엇보다 불확실성이 문제다. 사실 그린스펀 못지않게, 버냉키도 불확실성이라는 테마에 큰 관심을 기울인다. 즉, 경제 분석 및 전망, 나아가 정책 효력에 있어서의 불확실성 말이다. 그는 예의 ‘현황 분석’과 관련해서도 “불확실성의 원천을 식별하는 것 자체가 바로 이런 분석의 한 가지 중요한 요소”라고 역설한 바 있다. 그의 이런 불확실성 인식은 결국 이른바 “보수적 행동원리”(브레이나드), 곧 점진주의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정책 결정자들이 경제의 기저 구조나, 정책 조치가 경제적 결과에 미칠 효과를 확신할 수 없고, 또한 경제 상황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연속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금리 조정 시에는 언제나 더디고 신중하게 움직여야한다”는 것.
셋째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의사소통)의 중요성이다. 이는 특히 전망 기반 접근에 고유한 복잡성의 문제와 결부돼 있다. “다양한 모형들과 경제 기법, 그리고 각종 재량과 식견 있는 전문가들의 통찰력을 결합시킨” 이런 접근방식은 그 자체로 정보 부담이 너무 크며, 따라서 민간 주체들이 제대로 소화하기 힘들다는 맹점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중앙은행 스스로 자신의 전략과 목표, 그리고 향후 행로에 대한 전망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적극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도모하는 게 불가피해 진다. 또 이제 커뮤니케이션은 별도의 재량적인 지위가 아니라 통화정책 운영체계의 내재적 구성요소로 위치지어 진다.
마지막으로 ‘기대 관리’의 문제다. 이는 무엇보다 통화정책의 한계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다. 실제로 통화정책은 대부분 그 자체로 초단기 금리에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통화정책의 파급경로에서 관건은 실물경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장기 금리와 각종 자산 가격이다. 그리고 단기 금리와 장기 금리 간에는 직접적이거나 기계적인 연계는 없다. 여기서 작동하는 게 바로 미래 기대 변수다. 즉 연준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단기 금리가 장기 금리에 효력을 미치기 위해서는 장기 금리의 기대 변수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 이 점에서 점진주의나 커뮤니케이션은 이런 기대 관리의 중요한 수단이 되는 셈이다.
사실 버냉키는 인플레이션 타겟팅의 구성요소로서 커뮤니케이션의 필요성을 설명하면서, 경제 관리 혹은 거시경제 정책이라는 것이 이른바 “확률적 최적 제어 방법”에 기반해 탄도 미사일을 일정한 궤도상에 유지하려는 “로켓 과학”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역설한 바 있다. 미사일의 구성요소들과는 달리 경제를 구성하는 민간 주체들은 언제나 자신에게 가해지는 힘을 이해하고 예견하려 든다는 이유에서다.
전망 기반 패러다임이야말로 이런 기대 변수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이제 커뮤니케이션이 정책 운영체계 내의 일 구성요소로 정당한 지위를 찾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점진주의는 일정한 패턴의 확립을 통해 역시 전망을 기대 관리와 결부시켜 이런 기대 관리에 일조할 중요한 구성요소로 자리매김 된다.
[뉴스핌 장보형 객원이코노미스트]
※본 특집의 저자인 장보형은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와 한신대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지난 10여년간 국내 정보컨설팅 업체인 와이즈 인포넷에서 '국제금융/경제 팀장'을 맡아 국제 금융시장과 세계 경제 동향 점검 및 이슈 분석을 전담한 후, 현재는 '글로벌 마켓 이코노미스트'로서 프리랜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올해부터 뉴스핌 객원 이코노미스트로 합류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