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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주의 수선전도] 풍운의 역사 품은 아픈 손가락 '용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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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군· 일본군·미군 주둔지 아픔겪은 풍운의 땅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 영구 점령' 꿈꾼 일제의 전초기지
국가공원으로 돌아오는 용산...이젠 아픔 없어야

[편집자] 수선전도(首善全圖)는 조선의 수도 한양을 목판본으로 인쇄한 지도입니다.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쪽 도봉산부터 남쪽 한강에 이르기까지 당시 서울의 주요 도로와 동네, 궁궐 등 460여개의 지명을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수선전도에 있는 지명들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오승주의 수선전도'는 이 지도에 나온 동네의 발자취를 따라 지명과 동네에 담긴 역사성과 지리적 의미, 옛사람들의 삶과 숨결 등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오늘 숨가쁜 삶을 사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계획입니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사연없는 사람없고 사연없는 땅이 어디 있으랴만 서울 용산(龍山)의 사연은 가슴속 멍울처럼 단단하다. 외세의 역사가 핏방울로 맺힌 한국사의 아픈 손가락이다.

◆116년만의 귀환

서울 한복판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허락된 사람만이 드나들 수 있었던 '금단의 땅' 용산 미군기지가 개방된다. 정부가 서울 용산 미군기지 내 장교숙소 5단지에 대한 재단장을 끝내고 다음달 1일부터 상시 개방하기로 한 것이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1904년 일본군이 주둔한 이후 116년 만에 국민 누구나가 직접 찾아볼 수 있는 장소가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서울 중심에 자리잡은 우리땅이지만 한세기가 훌쩍 넘는 동안 허락을 받아야만 드나들 수 있었던 금단의 땅 용산기지가 110년 세월을 넘어 돌아온다.

용산이라는 지명의 역사는 길다. 고려시대에 이미 용산이라는 이름이 나올만큼 한반도에서 중요한 지리적 의미를 가진다.

최사추 등이 왕에게 "신들이 노원역·해촌·용산 등지로 나아가 산수를 살펴보니 도읍을 세우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오직 삼각산 면악의 남쪽이 산의 형태와 물의 기세에 있어 부합하였습니다. 청하건대 주간(主幹)의 중심이 되는 대맥(大脈)에서 임좌병향(壬坐丙向·서북쪽을 등지고 동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지형을 따라 도읍을 건설하십시오."하니 왕이 이를 따랐다.(고려사절요 권6)

고려 숙종 6년(1101년) 10월. 개경의 수명이 쇠약해져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천도론이 일었다. 물색된 장소는 개경 남쪽 한양. 한양을 남경이라고 이름 붙이고 남경개창도감이라는 궁궐건설기관까지 설립해 숙종9년 5월(1104년) 남경이궁이 완성된다.(고려사절요 권7)

궁궐의 위치는 현재 경복궁과 비슷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3년(1394년) 음력 9월 9일자 기사에는 '남경행궁의 영역이 좁아 그 남쪽을 경복궁 영역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 점에 비춰보면 경복궁 북측, 지금의 청와대 위치로 추측되고 있다.

용산은 궁궐자리로 지정되지는 못했지만, 그 이름이 고려사에도 나올만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고려사 지리지(고려사 권56, 지, 권제10)에 따르면 용산은 양광도 광주목의 과주에 속했다. 고려 충렬왕 10년(1284년)에 주(州)의 용산처를 승격시켜 부원현(富原縣)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시대 용산은 세곡의 집산지였다. 전국에서 거둬들인 쌀과 공물 등 조세가 바다를 타고 한강으로 들어온 뒤 집결되는 장소였다.

세종실록지리지 경도 한성부에는 용산에 대해 '숭례문 밖 서남쪽 9리에 있다. 배로 실어 온 세곡을 거둬들이는 곳'으로 설명돼 있다.

물품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자연스레 사람들이 모였을 것이다. 세곡선이 도착하면 물건을 지고 나를 인력이 필수적이다. 도성에서 9리(3.5km) 떨어진 용산에는 양반과 권세가들이 모여 살던 성 안과 달리 '먹고 살기' 위한 서민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사람이 많다 보면 사건사고는 필연적이다.

성종5년(1474년) 음력 3월25일자 조선왕조실록 기사. 세곡을 관리하는 관청의 수장인 호조판서 이극증이 용산의 들끓는 도둑들에 대한 대책을 왕에게 보고한다.

"충청좌도와 경상도의 전세를 용산강에 정박하는데, 용산은 거민(居民·거주민)이 매우 많아 세곡을 뭍에 내릴 때 무뢰한 무리들이 틈을 엿보아 도둑질을 합니다. 청컨대 금후로는 조선(漕船)을 노량으로 옮겨 정박하게 하고, 금도군(禁盜軍)을 정하게 하소서."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세곡을 노린 도둑이 많으니 경찰력을 강화해 도둑을 잡고, 사람들이 덜 거주하는 노량진으로 세곡 하역장소를 옮기자는 의견이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수선전도에 나타난 용의 모습을 닮은 용산. 2020.07.23 fair77@newspim.com

도둑도 도둑이지만, 용산은 날이 갈수록 세곡선 집하장으로 결점이 드러난다. 모래톱이 쌓여 세곡선이 정박하기 힘들게 된다. 여의도와 밤섬 등에서 보듯 한강 하류는 모래가 퇴적돼 만들어진 하천 내 모래섬이 있다.

성종 8년(1477년) 음력 11월28일. 용산포구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이뤄진다. 호조에서 아뢴다. "지금 용산의 강어귀가 모래로 차서 막혀 경상도 전세의 조운이 불편하니 청컨대 내년부터 경중의 여러 관사에 바치는 전세를 두모포(豆毛浦)에 정박시켜 수송하여 들이게 하소서."

용산포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니 조운선 정박을 동쪽으로 옮긴 두모포(현재 서울 성동구 옥수동 동호대교 북단)로 하자는 말이다.

8년이 흐른 성종16년(1485년) 음력 4월13일에는 모래를 파내는 논의도 고려된다. 모래톱이 쌓이는 원인과 해결책이 제시되지만, 결국 '들인 공에 비해 남는 것이 적다'는 이유로 유야무야되면서 용산의 세곡 집하장으로 위세는 약화된다.

이극증이 의논하기를 "전에는 용산강의 남변에 돌산이 수중으로 쑥 들어가 있으므로, 강물의 흐름이 이것에 부딪쳐서 수세가 북쪽으로 흘렀는데 뒤에 거민(居民)들이 돌을 떠서 사용하여 물이 격세가 없어지고 남변으로 직류해 내려가니, 이로 말미암아 북변의 물이 얕아지고 모래가 메워져 이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남변으로 쑥 들어간 산의 돌을 떠낸 곳에 큰 돌을 실어다가 보충하여 강물의 흐름을 예전과 같이 격세를 이루게 하고, 이어서 북변의 모래가 메워진 곳을 파내어 물길을 인도하면, 자연히 물이 북쪽으로 향하고 모래가 다시 메워지지 못할 것입니다."

정창손·윤필상·홍응·윤호가 의논하기를 "전자에 신중린이 진언하여 용산강의 모래가 메워진 곳을 파도록 청하였으므로, 대신에게 명하여 가서 살펴보게 하였는데, 공역의 어려움으로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지금도 파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툭하면 외국군대 주둔지

용산에 누적된 모래톱은 앞으로 다가올 용산의 비운을 점쳤던 것일까. 조정의 갑론을박이 펼쳐진 성종 시기에서 100여년이 흐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용산은 '왜군의 캠프'로 바뀐다.

한양 도성에서 9리(3.5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다, 강을 끼고 있어 물품 수송이 편리하다. 게다가 평지가 넓게 펼쳐져 있어 군대 주둔지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선조26년(1593년) 음력 2월23일 전라감사 권율의 장계다. "신이 주둔한 곳은 용산과 거리가 15리도 안 되는데, 흉악한 적들이 보복할 계책으로 한강 이남의 진들을 불러 모아 합세하여 다시 침범하려 한다는 소문이 경성에서 도망해온 사람들에 의해 여러번 발설되었습니다. 지금 용산에 진을 친 곳이 12개소라고 합니다."

용산에 진을 친 일본군은 적어도 2만명이었다. 이틀 뒤인 2월25일 도체찰사 풍원부원군 유성룡의 보고다. "15일에 충청수사 정걸이 수군을 이끌고 곧바로 용산창 아래에 다달아 왜적을 향하여 포를 쏘았는데, 강변에 진을 친 왜병이 2만명이나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주둔한 용산은 현재 미군기지가 위치한 장소는 아니다.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는 원효로 일대, 가토 기요마사 부대는 갈월동 부근에 주둔했다.(용산기지내 사라진 둔지미 옛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 김천수, 발간 용산구청, 2017년 12월)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부터 러일전쟁 후 일본이 건설하고 미군까지 이어진 현재 용산기지가 위치한 수선전도에 표시된 둔지방의 모습.2020.07.23 fair77@newspim.com

현재 미군기지가 들어선 '용산기지'는 엄밀히 말하면 조선시대 용산이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둔지방 또는 둔지미로 불렸다.

서울역사편찬원에 따르면 조선시대 용산은 현재 마포구 일부를 아우르는 터였다. 용산방으로 분류됐다. 조선 영조 때 성 밖에 설치한 한성부 서부 9방 중의 하나다. 용산방은 도성 서쪽 무악에서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약현과 만리현을 지나서 서쪽 한강변을 향하여 꾸불꾸불 나아간 모양이 마치 용이 몸을 틀어 나아간 것 같고, 한강변 용산구와 마포구 경계에서는 용이 머리를 든 것 같아 용처럼 생긴 모양이라 용산이라 부른 데서 방 이름이 유래했다.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마포동, 이촌동, 토정동 일대와 공덕동, 신공덕동, 염리동, 대현동, 서계동, 청파 1·2·3가, 원효로 1·2·3·4가, 문배동, 용문동, 신계동, 신창동, 산천동, 청암동, 도화동, 효창동, 도원동 일부에 해당한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청일전쟁 때 만리창에 상륙한 일본군의 모습. 용산 일대에는 조선말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한 청나라 군대가 주둔했다. <자료=서울역사박물관> 2020.07.23 fair77@newspim.com

미군기지가 들어선 곳은 용산방이 아니라 둔지방이다. 조선 영조 때 성 밖에 설치한 한성부 남부 11방 중 하나다. 용산방과는 행정구역부터 다른 셈이다. 중앙에 둔지산이 자리 잡은데서 유래했다. 둔지산에는 둔전을 일구면서 이곳을 수비하는 둔병이 있어서 둔지뫼・둔지매・둔지미, 한자로 둔지산으로 불렀다.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이태원동·동빙고동 일대와 후암동·동자동·서빙고동·용산동4가 일부에 해당한다.

용산기지에 외국 군대가 처음 진을 친 것은 임오군란(고종13년·1882년) 때다. 신식군대를 양성하는 별기군은 급여와 보급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지만 구식군대인 무위영과 장어영 군졸들은 13달간 봉급미를 받지 못하는 등 불만이 높았다. 그러던 중 겨우 한달치 급여를 받게 됐지만 쌀의 양이 턱없이 부족한데다 모래가 절반 넘게 섞여 있었다. 격분한 구식 군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사달을 벌인 군졸들은 당시 권력에서 물러나 있던 대원군을 찾아 애원했다. 명성황후가 충주로 도망갔고, 대원군이 다시 전권을 잡았지만 명성황후 일파의 청원을 받아들인 청나라가 군대를 조선에 파견, 대원군을 중국 텐진으로 납치했다.

당시 청나라 군대가 주둔한 곳이 둔지미다. 이후 용산기지 풍운의 역사가 시작된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러일전쟁 이후 용산 일대에 새로 조성된 일본군 군영지를 이태원 방향에서 담아낸 전경사진. <자료=서울역사박물관>.2020.07.23 fair77@newspim.com

◆지금 용산은 '그 용산'이 아니다

1904년 러일전쟁은 조선왕조의 몰락이 본격화한 계기다. 누구도 이길수 없을 것이라던 러시아와 전쟁을 일본은 승리했다. 러일전쟁을 통해 조선의 지배권을 열강들에게 인정받은 일본은 둔지미 땅에 일본군 주둔지를 세운다.

일본군은 '조선 영구 주둔'을 위해 도시지역과 철도 중심지 성격을 가진 용산과 평양, 의주 세 곳을 군용지로 확정한다. 1904년 8월15일 한일의정서 제4조에 의거해 용산에서만 991만7355㎡(300만평)에 대한 토지수용을 조선 정부에 일방 통고한다.(용산 둔지미의 공간적 역사와 삶의 지속, 오문선, 향토서울 87호, 2014년 6월)

1905년 7월 26일 본격 군사기지 공사가 이뤄진다. 병력과 군수품 이동을 원활히 하기 위해 1906년 6월 서울역 앞에서 동자동, 갈월동, 남영동을 거쳐 용산역을 지나 한강으로 통하는 대로를 완성한다. 현재 용산을 가로지르는 큰 길이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한 대륙침략로였다. 일제의 용산기지 공사는 1913년 11월 각종 건물들이 완공되면서 끝난다. 이 과정에서 수십만명이 강제 지주를 당하며 삶의 터전을 잃었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일제강점기 일본이 제작한 서울 용산일대의 지도인 용산시가도. 일본군 병영과 대륙침탈을 위해 확장한 철도 등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자료=서울역사박물관> 2020.07.23 fair77@newspim.com

둔지미 일대가 용산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은 이 과정에서 비롯된다. '용산기지 내 사라진 둔지미 옛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에 따르면 일본군은 둔지미 일대를 '신용산'으로 불렀는데, 나중에 '신'자가 빠지면서 일대가 '용산'으로 둔갑했다.

해방 이후에도 용산기지는 여전히 군사기지였다. 1945년 9월 미국 극동군사령부가 오키나와 주둔 제24군단 예하 7사단 병력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며 미군이 용산에 주둔한다. 이후 1949년 7월까지 미군은 군사고문단 482명만 남기고 모두 철수했지만,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군이 다시 한국에 투입됐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57년 7월 주한미군사령부가 용산기지에 정식으로 창설됐다.

미군기지는 2003년 5월 한·미정상회담에서 한미연합사령부와 유엔군사령부를 포함한 미군기지를 모두 평택, 오산으로 이전하는 내용의 합의가 이뤄졌다. 2005년 국가공원 조성을 발표한 이후 최근 반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서울=뉴스핌] 정일구 기자 = 2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용산공원부지 내 장교숙소 5단지 개방행사가 열렸다. 사진은 이날 공개된 공원모습. 2020.07.21 mironj19@newspim.com

러일전쟁 이후 '영구적 지배'를 꿈꾸며 군 주둔지를 만들었던 일본의 야욕은 물거품이 된 지 오래다. 일본에 이어 눌러앉은 미군기지도 이제 공원으로 탈바꿈해 2029년을 목표로 한국인의 품으로 돌아온다.

왜군과 청나라 군대,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받은 상처만큼 용산땅도 깊은 생채기를 안고 있다. 이제는 용산의 아픔이 역사 속 기억 너머로 사라져야 할 때다.

fair77@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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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참 "북한군 지뢰일 가능성 매우 높다" [서울=뉴스핌] 오동룡 군사방산전문기자 = 합동참모본부는 지난 21일 육군 25사단 지역 비무장지대(DMZ)에서 발생한 지뢰 폭발 사고의 원인을 "북한군 지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했다. 부상 장병의 장구류에서는 TNT 성분과 갈색 계열 이물질이 검출됐다. 폭발하지 않은 채 발견된 1발은 북한군 수지(樹脂)반보병지뢰로 추정된다. 합참 현장조사 태스크포스(T/F)장인 권대원 합참차장(육군 중장)은 28일 저녁 국방부 청사에서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권 차장은 "최종조사 결과 북한군이 매설한 지뢰로 판정되면, 군사분계선(MDL) 이남에서 정상적으로 작전하던 우리 장병이 북한군 지뢰에 부상을 당한 것"이라며 "모든 책임은 북한에 있고, 합당하고 상응한 조치를 시행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최종 결과는 유엔군사령부와 평가를 거쳐 발표할 예정이다. 권대원 합참차장(육군 중장)이 28일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에서 '25사단 지역 DMZ 내 지뢰 폭발 사고'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권 차장은 "국과수 1차 감정에서 TNT 성분과 갈색 계열 이물질이 검출됐고 철제 파편은 없었다"며 "이번 지뢰 폭발 원인은 북한군 지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밝혔다. [사진=국방부 브리핑 화면 캡처]2026.09.29 gomsi@newspim.com ◆폭발 지점 MDL 남쪽 10여m…"철제 파편 없어 아군 지뢰 아냐" = 합참에 따르면, 폭발은 21일 오전 10시 51분쯤 MDL 남쪽 10여m 지점에서 일어났다. 이곳은 북한군이 최근 지뢰를 매설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형 변화 지역에서 10여m 떨어진 곳이다. 폭발은 2발이었고, 철수 과정에서 1발을 더 발견했다는 진술을 근거로 원점 일대에 모두 3발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국과수 1차 감정 결과는 이날 오후 4시 4분 합참에 통보됐다. 작전 병력의 피복·장구류와 화약흔 채취 거즈 등 10종을 감정한 결과, 방탄헬멧 1개와 방탄조끼 2개 등 3개 품목에서 TNT 성분과 갈색 계열 이물질이 나왔다. 양진혁 합참 작전부장(육군 소장)은 "주 장약이 TNT인 아군 지뢰는 폭발 시 철제 파편이 다량 발생하고 살상 반경이 20m 이상"이라며 "이번에는 철제 파편이 없고 갈색 이물질만 있으며 살상 반경도 상대적으로 작아 아군 지뢰는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합참은 북한군 지뢰로 판단한 근거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우선 해당 지역에는 아군 지뢰 매설 기록이 없는 반면, 인근에서는 2025년 9월 북한군의 지뢰 매설 흔적이 발견됐다. 국과수 1차 감정에서 갈색 이물질이 검출됐고 철제 파편은 나오지 않았다. 1차 폭발 지점에서 1m가량 떨어진 곳에서 갈색의 북한군 수지반보병지뢰를 봤다는 진술도 있었다. 폭발 지점의 화구와 화염 형태, 장병들의 부상 정도, 작전 인원들의 진술 역시 북한군 지뢰를 가리킨다는 것이 합참의 판단이다. 폭발 당시 영상은 확보되지 않았다. 다만 800여m 떨어진 GP의 집음기에 약 58초 간격으로 비슷한 폭발음 두 번이 녹음됐고, 작전 요원들도 "1분 정도 간격이었다"고 같은 진술을 했다. 양진혁 합참 작전부장(육군 소장)이 28일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에서 '25사단 지역 DMZ 내 지뢰 폭발 사고'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수색로 개척 종료 시점과 1·2차 폭발 당시의 대형(隊形)을 요도로 설명하고 있다. 양 작전부장은 "철수를 준비하던 공병 요원이 왼발을 내딛는 순간 1차 폭발이 일어났고, 쓰러진 요원을 구하던 중 2차 폭발로 수색대대장이 중상을 입었다"고 밝혔다. [사진=국방부 브리핑 화면 캡처] 2026.09.29 gomsi@newspim.com ◆미폭발 1발은 '북한 수지반보병지뢰' 추정…탐지기엔 안 잡혀 = 미폭발 지뢰는 1차 폭발 지점에서 약 1m, 탐지를 마친 수색로 끝에서 5~10㎝ 깊이에 매설돼 있었다. 2차례 폭발 뒤 공병 요원이 무릎을 꿇고 손곡괭이로 땅을 찔러 가며 탈출로를 내던 중 발견했다. 발견한 요원은 "갈색의 네모난 형태에 표면은 매끄러운 플라스틱이고 무늬가 있었다"고 진술했고, 북한군 교리에 나오는 지뢰 사진을 보고는 "대단히 유사하다"고 했다. 주변에서 함께 본 3명의 진술은 '적색', '갈색', '목함지뢰' 등으로 엇갈렸다. 합참 공보실은 이 지뢰를 목함지뢰가 아닌 수지반보병지뢰로 정정했다. 합참 관계자는 "목함지뢰와 형태는 같고 재질만 플라스틱"이라며 "북한이 1969년부터 운용해 온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국과수가 검출한 갈색 이물질이 나무인지 플라스틱인지는 아직 구분되지 않았다. 지뢰를 수거할지는 29일 현장에서 유엔사와 협의해 판단한다. 지뢰 3발이 1~2m 간격으로 있었는데도 탐지기가 잡아내지 못한 데 대해 합참 관계자는 "탐지기를 바닥에 최대한 붙여 나갔지만, 수년간 쌓인 잡목 등으로 지뢰가 탐지 성능 깊이 아래에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3발 모두 매설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미폭발 1발은 매설로 추정되지만, 터진 2발은 매설인지 유실인지 아직 특정할 수 없다"고 했다. 28일 현장조사에는 유엔사 군사정전위원회 비서장과 25사단 작전부사단장 등 40여 명이 참여해 2차 폭발 지점 2m 앞까지 접근했다. 1차 폭발 지점은 여기서 2m 더 떨어져 있다. 조사단은 작전 병력의 군장과 방탄헬멧, 지뢰화를 확보하고 웅덩이 형태의 화구 2곳을 육안으로 확인했다. 목격 진술이 나온 지뢰 추정 물체와 잔해물까지는 가지 못했다. 합동조사팀 조사도 시간 관계상 진행하지 못해 29일 다시 들어간다. 지난 28일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비서장과 25사단 작전부사단장 등 40여 명으로 구성된 조사단이 '25사단 지역 DMZ 내 지뢰 폭발 사고' 원점 일대에 접근해 촬영한 현장 모습이다. 흰색 원 두 개는 지뢰 폭발로 생긴 웅덩이 형태의 화구로, 아래쪽이 2차 폭발, 위쪽이 1차 폭발 지점으로 추정된다. 조사단은 2차 폭발 지점 2m 앞까지 접근했고, 1차 폭발 지점은 거기서 2m 더 떨어져 있다. [사진=합동참모본부] 2026.09.29 gomsi@newspim.com ◆1차 폭발 뒤 전우 구하다 2차 폭발…GP 집음기에 58초 간격 폭발음 = 이날 합참은 사고 경위도 처음으로 자세히 공개했다. 이번 작전은 북한군의 지뢰 매설 추정 지역을 유엔사와 함께 조사하기 위해 새 수색로를 여는 작전이었다. 수색대대장 등 18명은 GOP 철책에서 소형 전술차량과 산악 바이크로 추진철책 소통문까지 이동한 뒤, 기존 수색로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이어 MDL 방향으로 수십 년간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수풀 지대를 공병 요원이 앞장서 탐지와 예초를 번갈아 하며 약 200m 전진했다. 18명 가운데 9명은 탐지조·지휘조·작전지원조로 앞에 섰고, 나머지 9명은 20~100여m 뒤에서 통신, 후방 경계, 의무 지원을 맡았다. MDL에 근접했다고 판단한 대대장이 철수를 결심했고, 철수를 준비하던 공병 요원이 왼발을 내딛는 순간 1차 폭발이 일어났다. 주변 3명이 동시에 쓰러졌고, 수색 요원이 화구에 빠진 요원을 끌어내던 중 2차 폭발이 이어졌다. "괜찮아?"라고 외치며 달려가던 대대장이 쓰러졌다. 대대장은 왼쪽 발목에 심한 부상을, 오른쪽 허벅지 등에 파편상을 입었다. 서 있던 정보참모는 얼굴 등에 파편상을 입었고, 1m 옆에 웅크리고 있던 수색 요원은 다치지 않았다. 지난 21일 육군 25사단 지역 DMZ 지뢰 폭발 사고 직후, 메디온 의무후송헬기에서 하강한 응급구조사가 중상을 입은 수색대대장을 호이스트에 결속하고 있다. 장병들은 폭발 직후 지혈 조치를 한 뒤 수색대대장을 2인 1조로 안고 옮기다가 들것으로 교대해 가며 약 200m 떨어진 호이스트 지점까지 후송했다. [사진=합동참모본부] 2026.09.29 gomsi@newspim.com GOP 대대는 오전 10시 59분 의무사령부 의료종합상황센터에 지원을 요청했다. 메디온 의무후송헬기 3대가 차례로 출동했다. 합참의 요청에 유엔사는 11시 38분 DMZ 진입을 승인했고, 헬기는 11시 40분쯤 진입했다. 장병들은 대대장을 2인 1조로 안고 옮기다가 들것으로 교대해 가며 약 200m 떨어진 호이스트 지점까지 후송했다. 대대장과 공병 중사는 호이스트로 각각 헬기에 올라 국군수도병원으로 옮겨졌고, 나머지 인원도 모두 헬기 2대로 후송돼 정밀검진을 받았다. 18명 중 15명은 퇴원했고 중상자 2명과 경상자 1명은 입원 중이다. 대대장의 지뢰 덧신 착용 여부에 대해 합참 관계자는 "일부는 착용하고 있었다고 진술했다"면서도 "조사 중인 사안이라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대대장은 중환자실에 있어 아직 면담하지 못했다. 지난 21일 육군 25사단 지역 DMZ 지뢰 폭발 사고로 중상을 입은 수색대대장이 호이스트에 결속된 채 메디온 의무후송헬기로 끌어올려지고 있다(흰색 원). 수색대대장은 첫 번째 헬기에, 부상한 공병 중사는 두 번째 헬기에 태워져 국군수도병원으로 옮겨졌다. 현장에 하강한 응급구조사는 "수색 요원들의 신속한 응급처치가 출혈을 최소화해 더 큰 피해를 막았다"고 진술했다. [사진=합동참모본부] 2026.09.29 gomsi@newspim.com ◆"고의 지연 없었다"…매설 시점·고의성 판단은 유보 = 현장조사 지연 논란에 대해 합참 관계자는 "축소·은폐, 북한 눈치 보기, 상부 지시 같은 의혹은 일절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현장 안내를 맡을 작전 병력이 모두 입원해 있었고, 1군단장이 직무배제된 상황이었다는 설명이다. 22일 합참의장 주관 상황평가에서 군단장 직무대리가 29일 투입을 건의했고, 의장은 이를 승인하면서 앞당길 방안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25일 의장이 25사단을 방문했을 때 직무대리가 "제한 사항이 해소돼 더 일찍 들어갈 수 있다"고 건의해 일정이 27일로 당겨졌다고 합참은 밝혔다. 안내를 맡은 수색중대장, 공병중대장, 공병 중사 3명은 23일 퇴원했다. MDL에서 10여m까지 접근한 경위도 논란이다. 합참 관계자는 "최초 계획 경로의 개척이 어려워 대대장이 더 양호한 지역으로 판단한 곳으로 갔다는 중대장 진술이 있지만, 대대장에게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고 했다. 사고 초기 '수십m 떨어진 곳'이라고 알린 데 대해서는 "통신 난청 지역이라 위치를 찍은 지점과 차이가 있었고 GPS 오차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다족보행로봇 등 무인장비는 시험해 봤지만 덩굴과 급경사 때문에 기동이 어려워 투입하지 않았다. 북한군의 지형 변화는 지난해 9월 위성영상으로 처음 식별됐다. 작업 시기는 지난해 8~11월로 추정되지만, 북한군 병력의 활동이 직접 포착되지는 않았다. 매설 시점에 대해 합참 관계자는 "당시 표시한 흔적보다 바깥에 있어 과거에 매설한 지뢰일 가능성도 있다"며 "양면성이 있다"고 했다. 고의성 판단도 유보했다. 합참 관계자는 "2015년 목함지뢰 도발은 우리 장병이 매일 드나드는 통문 앞뒤에 심은 것이어서 의도가 명확했다"며 "이번 지역은 50여 년간 사실상 가지 않은 곳이라 아군 병력을 노렸다고 보기에는 제한이 있다"고 말했다. 2015년 8월 10일 북한군 목함지뢰 도발 현장인 경기 파주 서부전선 GP 추진철책 통문에서 국방부 출입기자들이 취재하고 있다. 당시 한·유엔사 합동조사단은 현장에서 철제 용수철·공이 등 잔해물 43점을 수거해 북한군 목함지뢰 3발이 의도적으로 매설된 것으로 결론 냈다. 폭발 지점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는 경사지라 떠내려온 지뢰일 가능성도 배제됐다. [사진= 국방일보] 2026.09.29 gomsi@newspim.com MDL에 대해서도 "1292개 표지판이 촘촘히 있는 것이 아니어서 남북 간, 유엔사와도 인식 차이가 있다"며 "북한이 자기 땅으로 여겨 매설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군은 유엔사와 MDL 기준선을 일치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군은 사고 이후 DMZ 2단계 수색로 개척 작전을 잠정 중단하고 원점에서 재평가하고 있다. 대응 수위에 대해 양 작전부장은 "최종조사 결과가 나오는 대로 합참은 군사적으로, 국방부는 정책적으로 모든 옵션을 올려놓고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gomsi@newspim.com 2026-09-29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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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공개] 靑 신규 참모 6명 재산공개 [서울=뉴스핌] 김미경 기자 = 올해 6월 21일 임명된 청와대 신규 참모 가운데 박지영 사법제도비서관이 92억여 원을 신고해 재산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본인·배우자 명의로 주택 2채 이상을 보유한 다주택자는 김경자 사회수석비서관 1명이었다.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가 29일 관보에 게재한 9월 수시 재산등록사항을 살펴보면 대통령비서실과 국가안보실 신규 재산공개 대상자 6명 중 박 비서관이 92억1772만 원으로 재산이 가장 많았다. 이어 성기홍 홍보소통수석비서관이 86억6347만 원, 한찬식 민정수석비서관이 58억6067만 원으로 뒤를 이었다. 강건작 국가안보실 제1차장은 10억4150만 원, 김태근 자치발전비서관은 5억5398만 원, 김경자 수석은 5억748만 원을 신고했다. 청와대 전경 [사진=뉴스핌 DB] ◆ 김경자 수석, 성남 태평동에 아파트·다가구주택 보유 본인과 배우자가 소유권을 가진 주택을 기준으로 다주택 여부를 판단하면 신규 참모 중 다주택자는 김 수석뿐이다. 김 수석은 경기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 선경태평아파트(35.51㎡·1억6700만 원)와 같은 지역의 다가구주택(59.91㎡·2억2200만 원)을 본인 명의로 신고했다. 두 주택에는 임대보증금 채무가 각각 1000만 원, 1466만 원 잡혀 있다. 김 수석은 예금 8474만원을 신고했다. 임대보증금과 은행 대출을 합친 채무는 1억7502만원이었다. ◆ 박지영 비서관, 반포자이 부부 공동명의…임대보증금 29억5000만원 박 비서관은 서울 서초구 반포동 반포자이 아파트(165.45㎡)를 본인(132.39㎡)과 배우자(33.06㎡) 지분으로 나눠 신고했다. 신고가액은 본인 지분 36억6400만 원, 배우자 지분 9억1600만 원으로 모두 45억8000만 원이다. 이 아파트에 걸린 임대보증금 29억5000만 원은 채무로 올렸다. 박 비서관은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 센트럴파크 아파트 전세권(114.50㎡·21억3000만 원)도 신고했다. 배우자는 전북 군산·김제·완주 일대 밭과 임야 지분 1억2779만 원어치를 보유했다. 금융자산 규모도 컸다. 박 비서관 일가의 예금은 28억5785만 원, 증권은 24억440만 원이었다. 박 비서관 본인은 한국전력 3853주, 한화오션 1371주, 삼성전자 422주 등 상장주식 8억9937만 원어치를 신고했다. 배우자는 LS 일렉트릭 1321주, 이수페타시스 1750주, 한국전력 5030주 등 13억1834만 원어치를 보유했다. ◆ 성기홍 수석, 대치우성 부부 공동 39억 성 수석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 대치우성 아파트(125.17㎡)를 배우자와 절반씩 나눠 보유했다. 지분별 신고가액은 각 19억5000만 원으로, 모두 39억 원이다. 본인·배우자 기준으로는 1주택자다. 성 수석 일가의 예금은 14억1605만 원, 증권은 13억6567만 원으로 집계됐다. 성 수석 본인은 삼성전자 2194주와 SK하이닉스 6주, 달바글로벌 192주 등 상장주식 8억3159만 원어치를 신고했다. 연합인포맥스 비상장주식 248주(4162만 원)도 갖고 있다. 배우자는 미국 국채 등 채권과 마이크로소프트·엔비디아·브로드컴 등 해외 주식을 보유했다. 성 수석은 비트코인 0.74개(7187만 원)도 신고했다.  ◆ 한찬식 수석, 서초 아파트분양권·강남 아파트 전세권 보유…채무 10억 한찬식 수석은 소유권을 가진 주택 없이 서울 서초구 신반포로 '디에이치 클래스트' 아파트 분양권(130.96㎡·25억5665만 원)을 신고했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 현대2차아파트 전세권(165.08㎡·12억 원)도 함께 올렸다. 한 수석의 배우자는 경기 부천시 소사구 괴안동 근린생활시설 지분(14억6559만 원)과 경남 산청군 임야(1억4410만 원)를 보유했다. 장남·장녀·차녀는 경기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임야 지분을 각각 1307만 원어치씩 신고했다. 한 수석은 농협은행 9억 원을 포함해 금융채무 9억5178만 원을 신고했다. 가족 전체 채무는 10억350만 원이었다. 한 수석 본인은 반얀트리클럽 앤 스파 서울 회원권(1억5000만 원)을, 배우자는 서울클럽 회원권(5000만 원)을 보유했다. ◆ 강건작 1차장·김태근 비서관, 1주택 강 1차장은 서울 은평구 불광동 메트로타워 아파트(104.49㎡)를 배우자와 공동명의로 보유했다. 지분 가액을 합치면 8억9000만 원이다. 강 1차장은 예금 2억340만 원, 채무 7155만 원을 신고했다. 김 비서관은 울산 중구 태화동 일신아파트(59.84㎡·1억1300만 원) 1채를 본인 명의로 신고했다. 김 비서관 일가는 예금 2억2180만 원, 증권 2억1887만 원을 보유했다. 배우자는 로킷헬스케어 1260주와 삼성전자 200주, 삼양식품 26주 등을 신고했다. 박 비서관은 모친, 김 비서관과 강 1차장은 장남에 대해 독립생계유지 등을 이유로 재산 고지를 거부했다. the13ook@newspim.com 2026-09-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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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이 내용에 포함된 데이터와 의견은 뉴스핌 AI가 분석한 결과입니다. 정보 제공 목적으로만 작성되었으며, 특정 종목 매매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투자 판단 및 결과에 대한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주식 투자는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으므로, 투자 전 충분한 조사와 전문가 상담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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