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핵심 요약
beta- 변상문은 6·25전쟁 희생자를 기리며 '화랑담배' 배경을 전했다.
- 제17연대는 부포항에서 LST 801함에 올라 해상 철수했다.
- 제2대대도 사곶리·연평도 거쳐 각지로 흩어져 생존했다.
!AI가 자동 생성한 요약으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변상문의 '화랑담배'는 6·25전쟁 이야기이다. 6·25전쟁 때 희생된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고, 그 위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제목을 '화랑담배'로 정했다.
해상 철수
옹진반도의 전선은 이미 여러 갈래로 끊어지고 있었다.
제17연대장은 더 이상의 공격이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는 각 부대를 중기동으로 철수시키는 한편, 강령 남동쪽 약 4km 지점의 조촌교를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공병대장에게는 북한군 전차가 우회할 수 없도록 조촌교를 폭파하라는 임무가 내려졌다.
6월 25일 20:00. 육군본부에서 회신이 왔다. 해군 함정이 곧 지원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언제, 어느 함정이, 얼마나 많은 병력을 태울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북한군이 언제 추격해 올지도 몰랐다.
제17연대장은 부포항에 집결한 차량 80여 대를 바라보았다. 차량을 모두 배에 실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세워두면 부포항에 병력이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에게 드러내는 꼴이었다.
그는 차량을 행군제대 대형으로 편성했다. 차량 3∼4대씩을 한 조로 묶어 부포항에서 중기동까지 왕복하게 했다. 전조등도 환하게 켰다. 멀리서 보면 국군 증원부대가 부포항으로 계속 들어오는 것처럼 보일 터였다. 아군을 철수시키기 위한 위장 작전이었다.
23:30. 해군 LST 801함이 부포항에 들어왔다. 제17연대장은 함장에게 요청했다. "26일 오전 5시까지는 병력을 모두 승선시켜 주시오." 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대장은 시간을 벌기 위해 죽교리와 중기동 일대에 병력을 배치했다. 그들이 북한군을 막고 있는 사이, 부포항에 모인 병력과 장비를 은밀히 배에 실어야 했다.

자정이 지나면서 차량들이 하나둘 부포항으로 들어왔다. 전조등은 꺼져 있었다. 운전병들은 엔진 소리마저 줄이려 했다.
05:00. 제11중대와 제12중대 병력, 공병과 57밀리미터 대전차포중대 등 연대의 주력이 부포항에 집결했다. 그제야 북한군이 국군의 철수를 알아차렸다. 포탄이 부포항 일대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제11중대가 도보로 먼저 중기동을 통과했다. 차량부대는 뒤에 남아 사격을 계속했다. 밤새 위장행군을 벌였던 차량들은 이번에는 실제 철수병력을 엄호하는 방패가 되었다.
부포항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전투는 3시간 30분가량 계속되었다. 북한군은 폭파된 조촌교 옆으로 우회로를 만들었다. 전차가 중기동으로 접근했다. 궤도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제17연대장은 제7야전포병대대장 박정호 중위에게 보병부대와 협조해 중기동을 지키도록 했다. 연대 57mm 대전차포중대장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57mm 대전차포 1개 소대를 갈림길에 배치하라. 전차를 막아야 한다."
북한군의 선두 T-34 전차가 갈림길로 들어섰다. 거리는 약 200m. 대전차포가 불을 뿜었다. 포탄이 선두 전차의 측면을 때렸다. 전차가 멈춰 섰다. 뒤따르던 전차들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 한 발이 부포항의 시간을 붙들었다.
부포항의 마지막 방어선
08:00. LST 801함은 조수 관계로 부포항에서 약 5km 떨어진 앞바다로 이동했다. 바닷물이 빠지면서 큰 배가 항구 가까이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병력은 VP정 4척과 민간 어선을 이용해 LST로 옮겨 타야 했다. 그러나 제17연대가 보유한 병력과 장비를 모두 실을 수는 없었다. 100여 명의 병력이 여전히 육지에 남아 있었다. 차량과 중화기도 대부분 포기해야 했다.
병사들은 장비를 적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 파괴했다. 105mm 곡사포 1문은 분해해 바다에 던졌다. 철제 부품들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병사들은 자신들이 함께 싸워온 무기가 사라지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10:30. 북한군이 부포항 부두 가까이 접근했다.
제17연대장과 제7야전포병대장은 파괴하지 않고 남겨둔 105mm 곡사포 1문을 향해 달려갔다. 포탄을 장전하고 접근하는 북한군을 향해 요란사격을 가했다. 포성이 부포항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연대장은 곧 출항을 결정해야 했다. 더 늦으면 LST 801함마저 북한군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 있었다.
그때 제7야전포병대대 예비대 중위와 동 중대 전포대장 박승옥 소위가 연대장에게 건의했다. "아직 승선하지 못한 병력이 남아 있습니다." 두 사람은 포사격으로 철수를 엄호하던 병사들을 남겨둔 채 출항할 수 없다고 했다.
제17연대장은 출항을 늦췄다. 마지막 엄호병력까지 승선한 뒤에야 LST 801함은 부포항을 떠났다. 6월 26일 11:00였다.
바다로 나왔지만 안도하기에는 일렀다. 짙은 해무가 시야를 가렸다. LST 801함은 방향을 잃고 한동안 바다를 헤맸다.
마침 인근을 지나던 어선이 함정을 발견했다. 어선의 안내를 받은 LST 801함은 그날 19:00경 연평도에 도착했다.
연평도에는 제17연대 병력 40여 명과 연평면 향토방위대가 남아 있었다. 그들은 섬을 지키기 위해 임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해군본부는 제17연대 병력을 철수시키기 위해 해군함정 2척, JMS 302함과 JMS 307함을 연평도로 보냈다.
6월 27일 08:00. 제17연대 주력은 연평도를 떠나 수원으로 이동했다. 이후 육군본부의 작전명령에 따라 6월 28일 다시 대전으로 향했다.
연대는 대전 선화동의 국민학교에서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고 부대를 재편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병력이 부포항에서 철수한 것은 아니었다. 옹진반도의 다른 한쪽에서는 제2대대가 사곶리로 향하고 있었다.

사곶리 철수
제2대대장 송호림 소령은 역습을 중지한 뒤 불당산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흩어졌다가 다시 모인 병력 400여 명이 있었다. 지친 얼굴들이었고, 탄약은 얼마 남지 않았다.
수색대를 내보내 적정을 확인한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양원과 강령은 이미 북한군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옹진에는 북한군 제38경비 제3여단의 선발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부포항으로 가려면 북한군이 점령한 지역을 돌파해야 했다.
송호림은 지도 위에 놓인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 부포로 갈 수 없다면 바다로 나갈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그는 철수 목적지를 사곶리로 정했다.
대대는 행군제대를 편성했다. 보병이 앞에 섰고, 그 뒤로 차량제대가 따랐다. 차량제대는 2.5톤 트럭 7대로 구성되었다. 중간 집결지는 옹진 남쪽 약 3km 지점의 연곤산이었다.
제7중대장 조경학 중위가 도보제대를 지휘했다. 그는 옹진 남쪽으로 우회해 연곤산으로 향했다. 공병대는 철수로를 확보하고 차량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살폈다.
차량제대는 제1대대 부대대장 박주용 대위가 지휘했다. 차량들은 옹진 시내로 들어갔다. 병사들은 차량 위에서 사방을 경계했다. 기관총 사수들은 골목과 지붕을 향해 총구를 돌렸다.
옹진 시내를 통과하는 동안 북한군과 여러 차례 교전이 벌어졌다. 차량에 거치된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차량제대는 멈추지 않고 19:30경 연곤산 동쪽에 도착했다.
그때까지 옹진에는 북한군 제14연대와 제38경비 제3여단 선발대가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제2대대 차량제대의 기습적인 사격과 빠른 행군에 당황한 듯, 북한군은 차량제대가 옹진을 빠져나갈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옹진 남쪽 어귀에서 연대 연락장교가 송호림을 찾아왔다. 그는 연대장의 명령서를 전달했다. "제2대대장은 제1대대와 제2대대를 통합 지휘하여 사곶리로 철수하라."
연곤산에는 제4중대와 제10중대, 까치산의 제9중대 일부, 제7중대 오병진 중위가 이끄는 병력, 그리고 흩어졌다가 길을 찾아온 낙오병들이 모여들었다. 병력은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송호림은 북한군의 추격에 대비해 제7중대를 후위로 배치했다. 20:00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두 시간이 지나서야 대대는 사곶리에 도착했다.
배를 찾아라.
사곶리는 작은 어항이었다. 수심이 얕아 큰 배가 들어올 수 없었다. 옹진반도 남서쪽의 섬들과 가까워 어선과 군용선이 자주 드나들었지만, 전쟁이 시작된 뒤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군부대가 과천대까지 주둔하고 있었고, 피란민들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배가 나타날 때마다 부두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날은 각 기관원과 그 가족, 피란민들이 항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작은 어선 한 척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송호림은 부두로 나가 연평도를 향해 공중전화 다섯 차례를 걸었다. 전화선이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마침내 연평면 김두익 경사와 연결되었다.
송호림은 사곶리의 상황을 설명했다. "병력과 피란민이 항구에 집결해 있습니다. 배가 필요합니다." 김두익은 용호도에 정박 중인 대성호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잠시 뒤 대성호가 사곶리에 도착했다. 20톤급 기선이었다. 국군 병력을 포함해 경찰, 민간인 등 약 2천여 명이 항구에 모여 있었다. 그러나 대성호의 승선 정원은 90명에 불과했다.
사곶리와 용호도 사이의 거리는 약 1km였다. 대성호가 두 곳을 왕복하는 데는 약 30분이 걸렸다.
송호림은 승선 순서를 정했다. 국군이 먼저였다. 그다음은 경찰, 마지막은 일반 민간인이었다.
대성호는 사곶리와 용호도 사이를 오갔다. 한 번, 두 번, 열 번. 사람들을 내려놓고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스무 번째 운항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북한군 포탄이 사곶리 부근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송호림은 수송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제3대대의 잔여 병력 100여 명이 범선 2척을 타고 용호도에 도착했다. 이로써 용호도에 철수한 국군 병력은 1천 4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송호림은 용호도에서 부대를 다시 편성했다. 경계태세를 강화하고, 대대 보급관 박건근 중위에게 피란민과 장병들의 식량을 확보하도록 했다. 그러나 섬에는 그 많은 사람을 먹일 식량이 없었다.
그때 연대 선박단장이 대성호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약 네 시간이 지난 13:00 그는 20톤급 기선에 대형 화물운반선을 예인해 돌아왔다.
제2대대는 대성호와 새로 확보한 기선에 화물선을 연결했다. 선박 승무원과 그 가족들도 함께 태웠다. 용호도를 떠난 선단은 영종도를 향했다.
항해 도중 짙은 안개가 내려앉았다. 뱃길이 끊길 듯 보였다. 영종도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8시경이었다.
세 선단의 항해
영종도에서 제2대대는 기선 한 척을 더 확보했다. 송호림은 선박을 세 선단으로 편성했다.
제1선단은 송호림 자신이 지휘했다. 제2선단은 제2대대 부대대장 이동호 대위가, 제3선단은 제1대대 부대대장 박주용 대위가 지휘했다.
각 선단은 서로 한 시간의 간격을 두고 출항하기로 했다. 한꺼번에 움직이다 적에게 발견되면 모든 병력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장병들에게 잠시 쉴 시간이 주어졌다. 지난 며칠 동안 그들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고지와 도로에서 싸웠고, 철수로를 찾아 밤길을 걸었으며, 배 한 척을 구하기 위해 항구에서 기다렸다.
6월 27일 18:00. 제1선단이 연평도를 출발했다. 북한군 함정과 마주칠 경우에 대비해 선단 사이의 거리는 한 시간으로 유지했다.
6월 28일 06:00. 제1선단이 인천항에 들어왔다. 그러나 인천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식은 또 다른 절망이었다.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송호림은 장기간의 이동에 대비해 식량부터 확보하려 했다. 인천 시내의 행정기관들을 찾아다녔지만, 혼란에 빠진 도시에서 식량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동안 제1선단의 장병 가운데 절반 이상은 대대장을 기다리지 못하고 수원 방향으로 이동했다.
나머지 병력은 남쪽으로 향하는 선박을 구했다. 송호림은 인천에 혼자 남아 제2선단을 기다렸다. 제2선단이 입항하자 그는 그들과 함께 인천항을 떠났다.
피란선은 군산을 향했다. 6월 29일 07:00. 제2대대 병력은 군산에 상륙했다.
박주용 대위가 지휘한 제3선단은 같은 날 11:00 인천항에 도착했다. 병력은 수원을 거쳐 대전으로 이동했다.
옹진반도에서 싸운 장병들은 서로 다른 배를 타고, 서로 다른 항구에 도착했다. 누군가는 수원으로 갔고, 누군가는 군산으로 향했으며, 또 다른 병력은 대전으로 내려갔다.
부대는 흩어졌지만 살아남았다.
그들이 버리고 온 옹진반도에는 파괴된 포와 차량, 무너진 참호, 미처 수습하지 못한 전우들이 남아 있었다.
1950년 6월의 바다는 그 모든 것을 말없이 품고 있었다.
/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