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기준에 투자·경영 리스크 확대
정치·학계 "경영판단원칙 보호해야" 주장
[서울=뉴스핌] 김정인 기자 = 기업 경영 과정에서 내려진 판단이 결과에 따라 형사 책임으로 이어질 수 있는 현행 배임죄 구조가 투자와 의사결정을 위축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기준이 모호한 배임죄가 사후 평가 방식으로 적용되면서, 실패 가능성을 안고 있는 정상적인 경영 판단까지 범죄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산업 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대규모 투자가 불가피해진 상황에서, 배임죄가 기업 활동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확산되고 있다.
◆ "모호한 배임죄가 투자·경영 판단 위축"
한국경제인협회는 10일 서울 여의도 FKI타워 컨퍼런스센터에서 '배임죄 문제점과 개선방안' 세미나를 열고, 현행 배임죄 규정이 기업 경영에 미치는 영향을 점검하고 제도 개선 방향을 논의했다.
개회사에 나선 김창범 한경협 상근부회장은 배임죄를 둘러싼 경제계의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김 부회장은 "경제계가 원하는 것은 명백한 배임 행위나 분명한 잘못을 처벌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모호한 기준을 합리적으로 개선해 정상적인 경영활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법 리스크와 불확실성을 해소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제는 과거와 차원이 다른 투자가 요구된다.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십조 원, 수백조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규모의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며 "하지만 실패할 경우 형사처벌까지 감수해야 하는 지금의 배임죄 구조 하에서는 기업인들이 모험적 결단을 내리기가 어렵다"고 했다. 또 "과거의 낡은 잣대가 미래를 위한 혁신을 가로막는 셈"이라며 "70년 넘은 한국의 배임죄 법리가 과연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지도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정치권에서도 경영 판단에 대한 과도한 형사 개입을 경계해야 한다는 인식이 공유됐다. 권칠승 더불어민주당 경제형벌·민사책임합리화TF 단장은 이 자리에서 "경제계가 가장 강하게 요구하는 것이 경영판단원칙의 명확화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며 "이 부분은 여야, 당정 간 사실상 이견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배임죄 개편의 입법 형태가 어떻게 되든, 정상적 경영판단원칙을 배임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내용은 반드시 포함될 것"이라고 전했다.
◆ 배임죄 모호성·위험범 해석 논란…해외와 다른 적용 구조
주제 발표를 맡은 안태준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배임죄 규정의 구조적 문제를 짚었다. 안 교수는 현행 배임죄가 형법상 죄형법정주의가 요구하는 명확성의 원칙과 예측가능성을 저해할 소지가 크다고 지적했다.
특히 '신의칙상의 의무 위반'이 곧 범죄로 이어질 수 있는 해석 구조가 형성되면서, 배임죄의 성립 범위가 지나치게 확대됐다는 설명이다. 이로 인해 경영자들이 자신의 행위가 형법상 금지되는지 여부를 사전에 판단하기 어렵다는 점도 문제로 제시됐다.
안 교수는 '위험범' 법리가 오남용될 가능성도 지적했다. 현실적인 손해가 발생하지 않더라도 '손해 발생의 위험'만으로 처벌이 가능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경영 판단까지 범죄로 몰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민간 영역의 계약 위반이나 분쟁이 형사 처벌로 전환되는 '민사의 형사화'를 초래해 기업인의 경영 의지를 위축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해외 주요국과 비교해도 한국의 배임죄는 적용 범위가 넓다는 평가가 나왔다. 독일은 미수범을 처벌하지 않고 업무상 배임죄나 특별배임죄 가중 규정을 두지 않는다. 일본은 고의 외에도 '자기 또는 제3자의 이익을 꾀하거나 본인에게 손해를 가할 목적'이라는 엄격한 주관적 요건을 요구한다. 미국과 영국은 배임죄 규정 자체가 없거나, 유사 조항이 있더라도 적용 범위가 제한적이다.
안 교수는 배임죄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한 입법 대안으로 ▲경영판단원칙 명문화 ▲배임죄 전면 폐지 후 필요한 유형만 별도 규정 ▲구성요건 정교화를 제시했다. 이익 충돌 없이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합리적 경영 판단은 배임죄의 '임무 위배'로 보지 않도록 명시하자는 것이다.
◆ "폐지보다 해석 엄격화…소명 부담은 경영인에 전가돼선 안 돼"
토론에서는 배임죄를 전면 폐지하기보다는 적용 기준을 엄격히 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홍영기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부원장은 "모호성을 이유로 법 자체를 폐지하는 것보다도, 실무에서 규정을 엄격하게 해석하고 개별 사안에 이를 정형적으로 적용함으로써 법치 국가성을 유지하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며 "이는 최근 판례와 학설의 주된 경향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강원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경영 판단과 관련한 소명 부담이 과도하게 기업인에게 전가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피고인에게 요구되는 무죄의 소명은 경영판단원칙의 범위에 국한돼야 하며, 그 이상의 설명 부담을 피고인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며 "이는 공정거래위원회가 동일인 제도를 적용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어 "동일인 해당 여부는 규제 대상자가 아니라 규제 기관이 스스로 판단하고 입증해야 할 사안"이라며 "경영인이 과도한 소명 책임을 부담하게 되면,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방어에 경영 역량을 소진하게 되고 이는 기업 경쟁력 약화로 직결된다"고 강조했다.
류혁선 KAIST 경영공학부 교수(경영학박사·법학박사)도 배임죄 규정의 모호성이 형사책임의 확대를 불러왔다고 설명했다. 법원이 배임죄의 '임무 위배'를 소위 '기대 신뢰를 깼다'는 '신의칙 위반'으로까지 해석을 확장시켰다는 것이다. 또 배임죄 성립 여부를 판단할 때, 행위 당시의 규범적 판단보다는 사후적 결과 평가가 상대적으로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이와 달리 독일·일본의 배임죄는 '형법의 보충성 원칙' 즉, 형벌권이 민사적 통제 장치를 보완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기능한다면서, 우리나라의 배임죄도 형사책임과 민사책임의 경계를 보다 명확히 재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경영판단원칙을 충실히 적용하여 형사책임이 사후적으로 확장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진환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경영판단원칙의 엄격한 적용과 주관적 고의의 개별적 심사를 통해 단순한 경영 실패가 형사책임으로 전이되는 문제를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kji01@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