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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반세기전 사회주의 중국의 설

기사입력 : 2018년02월13일 16:21

최종수정 : 2018년02월14일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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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핌=백진규 기자] 반세기 전 중국 춘제(春節, 중국 설)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지금처럼 먹거리가 풍족하지도 않고 스마트폰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지도 못하던 그때. 빛 바랜 사진 속 가족들이 모여 앉은 춘제 풍경은 그래서 더 애틋하고 따뜻하게 느껴지는데요. 신중국 설립(1949년) 이후 개혁개방 초기까지 40년간 중국 춘제 모습을 사진으로 되돌아보겠습니다.

◆ 1950년대, 신중국 초기의 설 

<사진=신랑망>

1950년대 춘제에서 가장 인기를 끈 녠화(年畫, 새해 맞이 그림)는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 그림이었습니다. 그림도 흔하지 않던 시절, 학교 선생님이나 고마운 이웃에게 달력과 그림을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진=신랑망>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문맹률이 높았던 그 시절엔 글을 쓸 줄 아는 것이 하나의 큰 자랑이었는데요. 새해 복을 바라는 마음에 사진 속 등장인물들 표정이 모두 밝습니다.

<사진=신랑망>

새해에 장만해 입는 새 옷을 설빔이라고 하죠. 시골에서는 공장에서 생산한 옷을 구입하기보다는 어머니께서 솜씨를 발휘해 주신 옷을 입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옷을 입고 기뻐하는 아이의 표정이 참 해맑아 보이죠?

<사진=신랑망>

1956년, 마을 사람들이 모여 라디오로 중국 공산당의 춘제 환영인사를 듣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흑백 텔레비전을 자체 생산한 게 1958년이니, 그 전에는 뉴스를 라디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죠.

◆ 1960년대,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과 함께한 춘제

<사진=신랑망>

1960년대 중국은 정치운동에 의한 집단 생활의 시대였습니다. 50년대 말부터 시작된 대약진운동과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사회 구성원들의 단합을 무엇보다 중요시 했는데요. 설 맞이 마라톤 행사도 이때 시작됐습니다. 톈안먼(天安門, 천안문)에서 시작하는 설 연휴 베이징 마라톤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죠.

<사진=신랑망>

빙탕후루(冰糖葫蘆) 들어 보셨나요? 과일을 꼬치에 꽂아 물엿을 발라 굳혀먹는 중국 전통 간식인데요. 설 맞이 초대형 빙탕후루를 들고 즐거워하는 아이들 표정이 참 귀엽습니다. 베이징 교외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사진=신랑망>

뭐든지 부족했던 시절입니다. 돈이 있어도 가게에서 물건을 사지 못할 때가 많았는데요. 그래도 설 전에는 정부에서 공급을 늘려 담배 술 과자 등을 사가는 손님들이 상점에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 1970년대, 나아진 살림살이 여유있는 표정들

<사진=신랑망>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살림살이도 많이 나아졌습니다. 가족사진 속 옷 입은 모습이 꽤 세련돼 보이죠? 사진이 보편화되면서 가족사진을 찍는 집도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사진=신랑망>

아이들이 폭죽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시면 왼쪽 구석에 어른들은 귀를 막고 조마조마한 표정을 짓고 있죠. 70년대 들어 폭죽의 종류도 다양해졌는데요. 폭죽놀이는 악귀를 쫓고 새해 복을 바란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사진=신랑망>

1970년대의 녠예판(年夜飯, 섣달 그믐날 저녁 가족들이 함께 모여 하는 식사) 사진입니다. 전보다 고기와 생선 요리가 많아졌는데요. 술잔을 든 어른들 표정에서도 여유가 느껴집니다.

◆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 다양해진 춘제 풍습

<사진=신랑망>

1978년부터 본격화한 개혁개방은 중국 사회를 크게 바꿔놓았습니다. 1983년 첫 방송을 시작한 설 특집 TV 프로그램 춘제롄환완후이(春節聯歡晚會, 춘완)는 지금까지 이어지며 새로운 설 문화로 자리잡았죠.

<사진=신랑망>

새해를 맞아 컬러TV를 사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컬러TV 냉장고 세탁기 녹음기가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사진=신랑망>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길거리 행사도 더욱 다양해졌습니다. 꽃등 장식을 단 가두행렬을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네요. 한쪽에선 털모자를 쓴 폭죽장수가 폭죽을 팔고 있습니다.

 

[뉴스핌 Newspim] 백진규 기자 (bjgchina@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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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일본군 무장해제 "항복사실 모르느냐? 변상문의 '화랑담배'는 6·25전쟁 이야기이다. 6·25전쟁 때 희생된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고, 그 위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제목을 '화랑담배'로 정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전의(戰意)가 없는 것을 보이기 위해 기관단총을 모두 어깨에 걸쳤다. 그러고도 만일을 위해서 각각 산개하면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몸을 날렸다. 아. 그때 그 바람 냄새, 그 공기의 열기, 아른대는 포플러의 아지랑이, 그리고는 아무것도 순간적이었지만 보이지 아니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가? 우리 주변엔 돌격 태세에 착검한 일본군이 포위하고 있었다. 워커 구두 밑의 여의도 모래가 발을 구르게 했다. 코끼리 콧대 같은 고무관을 제독총에 연결한 험상궂은 방독면을 뒤집어쓴 일본군이 차차 비행기를 중심으로 원거리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너무나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것이 그리던 조국 땅을 밟고 처음 맞은 분위기였다. 동지들은 눈빛을 무섭게 빛내면서 사주경계를 했다. 그러나 아직 기관단총을 거머쥐지는 아니했다. 여의도의 공기가 움직이지 않는 고체처럼 조여들어 왔다. 뿐만 아니었다. 타고 온 C46형 수송기로부터 한 50여m 떨어진 곳의 격납고 앞에는 실히 1개 중대나 되는 군인들이 일본도를 뽑아 든 한 장교에게 인솔되어 정렬해 있었다. 그 앞에는 고급장교인 듯한 자들이 한 줄 또 섰고, 장군 몇 명도 있는 듯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8월 18일 한낮의 그 뜨거운 여의도 열기가 우리를 더욱 긴장시켰다. 격납고 뒤에까지 무장한 군인이 대기하고 있었다. 중형전차의 기관포도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환호하는 광복군.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비행장 아스팔트 위엔 한여름의 복사열이 그 위기의 긴장처럼 이글대고 있었다. 어느새 우리는 땀에 젖어 있었다. 기막힌 침묵이 십여 분이나 지났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행동도 취해 오지 않았다. 마침내 우리가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일본군 고급 장교들이 늘어선 쪽으로 한걸음 씩 움직였다. 각자 산개, 조심하라! 누군가가 이렇게 나직하게 말했다. 서해 연안으로 비행기가 고도를 낮출 때 누군가가 유서를 쓰던 일이 이 순간 내 머릿속에서 상기되었다. 일본군 병사들은 우리가 다가서자 의외로 포위망을 풀 듯이 비켜섰다. 우리는 아직 기관단총을 어깨에 멘 그대로였다. 일본군이 길을 열어주자, 그들도 일본군 육군 중장을 선두로 한 장교단이 우리 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그가 바로 조선주차군사령관 죠오쯔끼(上月良夫)였다. 쬬오쯔기는 그의 참모장 이하라 소장과 나남 사단장과 참모들을 뒤로 거느렸다. 우리도 좌우로 벌려 섰다. 쬬오쯔기가 「나니시니 이라시따노?(무슨 일로 왔소?)」말문을 열었다. 퍽 야무지게 보였다. 우리는 말 대신 영등포 상공에서 뿌리다 남긴 선전 전단을 내밀어 주었다. 우리의 임무가 일본어와 우리말로 적힌 전단이었다. 거긴 또 우리가 이렇게 들어오게 된 사연도 적혀있었다. 우리는 한 장씩 그 전단을 다른 일본군 장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쬬오쯔끼는 이를 받아 읽고, "일본은 정전만 한 상태이니 일단 돌아갔다가 휴전 조약이 체결된 다음에 재입국하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은근히 위협했다. 자기네 병사들이 꽤 흥분되어 있으니, 만약 돌아가지 않으면 그 신변 보호에 안전책임을 지기가 어렵다는 분위기라고 했다. 이에 이범석 장군이 "네 놈들의 천황이 이미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 사실을 모르느냐? 이제부터는 동경의 지시가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맞섰다. 그러나 쉽사리 양보하지 않았다. 옥신각신 말이 몇 번 건너 왔다 갔다. 갑자기 쬬오쯔끼는 한 일본군 대령에게 일을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그는 동경서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어 마중을 나와 있던 참이란 말을 하고는 물러가 버렸다" 이범석 장군은 일본군 측에 "조선 총독을 만나 담판 짓겠다'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일본군 무장해제 임무를 띠고 국내로 들어 온 '광복군 국내정진군'은 아무런 소득도 올리지 못한 채 다음 날 8월 19일 14:30분 여의도 기지를 이륙하여 중국으로 돌아갔다. 광복군은 미군정이 시작되고 나서 한참이나 지난 다음에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조짐이 좋지 않았다. /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2025-09-2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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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기차 주행거리 두배 증가 배터리 개발 [베이징=뉴스핌] 조용성 특파원 = 중국이 에너지 밀도를 두 배 증가시킬 수 있는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해 낸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 칭화(淸華)대학 화학공학과의 연구팀은 '음이온이 풍부한 용매화 구조 설계'를 개발해 냈으며, 이를 기반으로 불소 함유 폴리에테르 전해질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고 중국 관찰자망이 30일 전했다. 해당 연구 성과는 논문 형식으로 국제 학술지인 네이처에 등재되었다. 연구진이 만들어낸 폴리에테르 전해질은 고체이며, 연구팀은 해당 전해질을 사용하여 전고체 배터리를 제작했다. 제작된 전고체 배터리는 604Wh/kg의 에너지 밀도를 기록했다. 이는 현재 리튬 이온 배터리의 에너지 밀도가 150~320Wh/kg인 점을 감안하면 에너지 밀도가 두 배 이상 높아진 것이다. 동일한 무게의 배터리이지만 해당 전해질을 사용한 전고체 배터리는 두 배 이상의 전력을 충전할 수 있는 셈이다. 이론적으로 전기차의 1회 충전 주행 거리가 두 배 증가할 수 있게 된다. 현재 500km가량을 주행할 수 있는 전기차가 1000km를 주행할 수 있게 된다. 해당 전고체 배터리는 안전성 테스트도 통과하였다. 못을 박아도 화재와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120도의 높은 온도의 박스 안에 6시간 동안 방치되었지만, 연소나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500회 이상 충방전을 거치면서도 에너지 저장 용량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연구진이 만들어낸 전고체 배터리가 상용화된다면 많은 분야에서 활용이 가능해진다. 전기차의 주행 거리는 두 배 증가하며, 드론의 비행 거리도 두 배 증가하게 된다. ESS(에너지저장장치) 역시 부피당 저장 용량을 크게 끌어올리게 되며 ESS 소형화가 가능해진다. 칭화대 연구진이 개발한 전고체 전해질의 도식도 [사진=네이처 캡처] ys1744@newspim.com 2025-09-30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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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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