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홍승훈 기자] # 2006년 3월. 정확히 9년 전이다. 국내 대형 자산운용사 한 주식운용본부장은 KT&G에 대해 적대적 M&A를 시도하던 칼 아이칸을 보면서 큰 결단을 내린다. 당시 KT&G 지분을 꽤 들고 있던 이 운용사는 KT&G과 칼 아이칸을 두고 고심끝에 칼 아이칸의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KT&G가 평소 주주가치에 대해 극도로 무심한 데다 기관투자자들에 대한 인식 자체가 부족했다고 판단했다.
펀드를 운용하는 매니저로서도 이 종목을 담은 펀드투자자들을 위해서라면 칼 아이칸의 손을 들어줘 주가를 올리는 게 유리하다고 봤다. 사장 보고도 마쳤다. 하지만 이튿날 상황이 뒤바뀐다. 출근해 관련 공시를 하기 직전 윗선에서 방향을 튼 것이다. 경영진으로선 외국자본의 편에 섰다가 이후 불어닥칠 파장이 두려웠던 것. 국수주의적인 시각도 어느정도 작용했다. 결국 이 기관은 하루 만에 마음을 바꿔 KT&G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국민연금 역시 KT&G의 편에 서면서, 상처는 컸지만 KT&G는 경영권 방어에 성공했다. 칼 아이칸은 당시 1500억원 가량의 시세차익을 뽑고 떠났다.
위 사례는 국내외 흐름이 국민연금, 대형 자산운용사 등 소위 '큰 손'들의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를 요구하는 분위기임에도 실제 이들 기관투자자의 의사결정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 단적인 예다. 찬성하는 쪽이 있으면 반대하는 쪽이 있게 마련이다. 연금과 펀드 수익률을 생각하면 투자한 기업들에 높은 배당 등 적극적인 주주친화정책을 요구해야 하지만, 자칫 기업 경영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고 정치논리도 의사결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최근 기관투자자들의 보다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로 이 같은 흐름이 조금씩 변화되고 있다. 작은 변화지만 방향면에서 보면 커다란 전환점으로 볼 수 있다.
13일 삼성전자 현대차 등 주요 대기업 68개사가 일제히 주주총회를 열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불어닥친 정부정책 영향으로 올해 주주총회 최대 이슈는 배당 등의 주주권익 보호가 화두였다.

앞서 포문은 브레인자산운용이 열었다. 현대차에 사내이사 재선임 반대라는 소수의견을 낸 것이 화제였다. 브레인은 지난 9일 공시를 통해 현대차 주총안건인 재무제표 승인건과 윤갑현 사장 재선임안에 대해 반대의 뜻을 밝혔다. 감정가의 3배에 달하는 가격에 한전부지를 인수하면서 주가가 급락했음에도 과도한 현금보유및 배당확대정책이 미진하다는 이유에서다. 또 윤 사장에 대해서도 사내이사로 재직하며 회사의 이익과 주주보호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며 반대했다.
이 같은 시도는 이날 주주총회 결과로 볼 때 '찻잔속 태풍'에 그쳤다. 현대차는 주총을 열고 윤 사장의 재선임 등 모든 안건을 원안대로 통과시켰다.
주총 결과에 대해 박건영 브레인자산운용 대표는 "상당수 기관투자자들의 불만과 피해가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는 문제제기를 해야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대변해 어필한 것"이라며 "글로벌기업들의 배당성향 등 주주친화정책 트렌드에 우리기업들도 맞춰가야 할 때"라고 심정을 전해왔다.
다만 박 대표는 추가 대응 여부에 대해선 "이미 한전부지 악재는 현 주가에 반영됐다고 판단, 주식은 계속 보유할 계획"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회사측이 앞으로 자사주매입과 배당정책에 대해 주주환원에 대한 인식을 조금 더 해달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번 현대차그룹 추총을 앞두고 '반쪽 의사결정'이란 비판도 있었지만 국민연금도 이 같은 분위기에 힘을 보탰다.
현대모비스 주총을 앞두고 국민연금은 현대차그룹의 한전부지 고가 매입건을 문제삼아 현대모비스와 기아차 사외이사 2명에 대한 재선임을 반대했다. 경영진에 대한 감시 감독을 제대로 못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다만 사외이사보다 영향력이 실제 더 큰 윤갑한 현대차 사장 등 사내이사에 대해선 의사표명을 포기했다.
국민연금 고위 관계자는 이와 관련, "현 상황에선 아주 조심스러우며 갑작스럽게 보폭을 넓히긴 부담인 게 사실"이라며 "특히 위원회(국민연금 주식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의 결정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고 한발 뺐다. 정서적으로는 3조원짜리를 10조원 넘게 인수해 배임으로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미래가치를 감안하면 사실 인수가가 비싸다고 결론내릴 수만도 없는 이슈였다고 개인적인 견해도 덧붙였다.
불과 몇달전 삼성엔지니어링과 삼성중공업 합병에 반대 매수청구권을 행사하며 삼성의 M&A계획을 원점을 돌렸던 국민연금을 떠올리면, 이번 주주권 행사가 후퇴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일각에서 나온다.
하지만 업계 전반적으로는 이들의 행보를 긍정적으로 풀이했다. 이채원 밸류자산운용 대표는 "브레인의 의견 개진은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 하루 아침에 바뀔 이슈는 아니지만 이 같은 분위기가 지속되면 기업 측도 국민정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논평했다.
◆ "세상이 변하고 있다"… 주주권 행사, 주주가치 제고 본격화
이 대표는 "다만 이것이 본질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재벌 지배구조가 개편돼 대주주 지분율이 50% 수준이 되면 선진국 시장처럼 요구하지 않아도 알아서 배당 확대정책을 펼치고 자사주매입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재벌기업들의 순환출자를 없애고 지주회사 전환으로 투명한 지배구조가 정착돼야 해결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익명을 요구한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최근 기관들의 적극적인 의견 개진은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며, "아직까진 재계가 이런 목소리에 크게 신경을 안 쓰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성숙해질 것으로 기대한다. 먼 길을 가는 채비를 마치고 이제 출발했다고 보면 된다"고 해석했다.
다른 투자자문사 대표는 "과거 정주영에 대한 신뢰와 정의선에 대한 신뢰가 다르다. 이건희와 이재용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오너 2세와 3세로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기업지배력은 약화될 것이고 주주들 역시 창업주가 아닌 2세와 3세 경영진에 대한 신뢰가 옅어질 수밖에 없다. 과거와는 달리 잘못된 의사결정에 대해 제동을 거는 주주들이 많아지는 이유다. 이 같은 패러다임의 변화를 기업들이 계속 모른척 할 수만은 없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국민연금의 주주권한 행사가 중요하다"고 힘줘 말했다.
금융정보업체인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현재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기업은 총 268개에 이른다. 네이버와 포스코, KB금융, 신한지주, 하나금융지주, KT 등은 국민연금이 최대주주고, 삼성전자 역시 이건희 회장(3.88%)의 2배 이상인 7.8%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또 현대차, 기아차, 현대모비스, LG전자, SK하이닉스 등도 5% 이상 지분을 보유 중이다.
한편, 이날 유럽 2대 연기금 운용사인 네덜란드의 APG는 현대차 주총에서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거버넌스위원회′ 설치를 요구했다. APG는 유럽2대 연기금 운용사로 총 자산은 490조원으로 현대자동차의 장기 주주다. 김충호 현대자동차 대표이사는 거버넌스위원회 설치와 관련해 적극 검토할 것이란 입장을 밝혔다.
APG 측은 "이러한 제안들이 한국에선 혁신적일 수 있겠지만 글로벌 기준에서는 특이한 사항은 아니다"면서 "현대차가 가지고 있는 혁신의 DNA가 발현이 돼 가버런스 측면에서도 글로벌 기업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뉴스핌 Newspim] 홍승훈 기자 (deerbear@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