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핵심 요약
beta- 강나현 교육사는 29일 북한 교사에서 한국 통일전담교육사로 성장했다고 밝혔다
- 강 교육사는 탈북배경 학생과 학부모·학교 사이 소통을 도왔다
- 그는 매일 배우고 노력하며 따뜻한 교육과 남북통합에 힘쓰겠다고 말했다
!AI가 자동 생성한 요약으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재일동포 출신 경험 낯선 곳 적응 밑거름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길은 열립니다"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 북한에서는 중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쳤다. 한국에서는 탈북민 초등학생들이 낯선 학교생활에 적응하도록 돕고 있다. 함경북도 부령에서 인천까지, 강나현 통일전담교육사의 삶을 이어준 것은 아이들과 함께하는 교실이었다.
2007년 12월 한국에 입국한 강 교육사는 2012년 5월 인천 장도초등학교에서 다시 교육 현장에 섰다. 북한에서 교사로 일한 경험이 있었지만 한국 학교에서 자리를 잡는 일은 또 다른 도전이었다. 교육행정정보시스템 사용법부터 예산 편성과 각종 문서 작성까지 새롭게 배워야 했다.

그는 퇴근 뒤에도 컴퓨터 앞에 남아 다른 교사들이 작성한 문서를 읽었다. 모르는 일을 하나씩 익히며 자신의 자리를 넓혀갔다. 학생들에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자신부터 배움을 멈출 수 없었다. 강 교육사는 "'사람이 하는 일인데 열심히 하면 왜 못하겠나'라는 생각으로 계속 파고들었다"고 말했다
◆'귀국자' 가정에서 자란 국어교사
강 교육사의 고향은 함경북도 부령군이다. 청진제1사범대학 어문학부에서 국문학을 공부한 뒤 고향의 중학교에서 국어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결혼 후에는 청진으로 옮겨 남청진고등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교사가 부족해 전공 과목만 맡을 수는 없었다. 어릴 때 배운 아코디언 연주가 도움이 됐다. 국어와 함께 음악 수업도 맡으며 교단을 지켰다.
그의 성장 배경에는 친가와 외가 모두 일본에서 살다가 북한으로 이주한 재일동포 귀국자 가정이라는 특수성이 있었다. 친할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여성과 결혼했다. 이후 가족은 북한으로 이주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선택을 후회했다고 강 교육사는 전했다.
집 안에서는 일본에서 살던 시절의 이야기와 북한 밖 사회에 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가족을 통해 들은 다른 사회의 생활 방식은 훗날 한국에 정착할 때 낯선 환경을 받아들이는 밑거름이 됐다.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자연스럽게 일본 문화와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 방식에 대해 듣고 자랐습니다. 할머니와 부모님의 영향 덕분에 낯선 문화나 시장경제 시스템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죠."

그러나 다른 사회를 알고 있다는 것과 북한에서의 생활을 꾸려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을 거치며 생활고가 깊어졌다. 월급조차 제대로 받기 어려운 상황에서 교사로서의 보람만으로 가족의 생계를 지탱하기는 힘들었다.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도 커졌다. 먼저 한국에 정착한 시누이의 권유와 조언을 들으며 새로운 삶을 고민하던 그는 2007년 9월 탈북을 결심했다. 그해 12월 한국에 입국하면서 북한에서와는 전혀 다른 생활이 시작됐다.
◆다시 찾은 교실…퇴근 뒤 학교 행정 익혀
한국에서 다시 교육 현장에 서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장도초등학교에 부임한 것은 입국한 지 4년여가 지난 2012년 5월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일은 익숙했지만 학교가 운영되는 방식은 낯설었다. 수업을 준비하는 것뿐 아니라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필요한 예산을 세우며 행정 절차를 밟는 일까지 익혀야 했다.
"처음 학교에 왔을 때는 모든 게 낯설었어요. 교육행정정보시스템 사용법부터 기안서 작성, 품의 올리기, 예산 편성까지 북한과는 완전히 달랐죠. 당시에는 먼저 정착한 선배 교사도 없어서 물어볼 곳조차 마땅치 않았습니다."
강 교육사가 택한 방법은 학교 안에 쌓인 문서를 교재로 삼는 것이었다. 다른 교사들이 작성한 기획서와 품의안을 하나씩 살펴보며 문서의 형식과 업무 처리 순서를 익혔다. 병가 신청서처럼 일상적인 행정 문서도 배움의 대상이었다.
"매일 퇴근도 미루고 시스템에 들어가서 남들이 쓴 기획서, 품의안, 병가 신청서까지 하나하나 클릭하며 독학했습니다."
처음에는 낯설기만 했던 업무도 반복하며 익숙해졌다. 북한에서 쌓은 교직 경험 위에 한국 학교의 행정과 교육 환경에 대한 이해가 더해졌다. 그렇게 쌓은 경험은 후배 교육자들에게 조언을 건넬 수 있는 바탕이 됐다.
◆학생과 학부모·학교 사이의 간격 좁히기
강 교육사가 맡은 일은 탈북배경 학생들의 학습을 돕는 데 그치지 않았다. 학생과 학부모가 학교를 이해하고, 학교 역시 이들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연결하는 역할도 필요했다.
남한 출신 교사와 탈북민 학부모 사이에는 서로의 경험 차이에서 비롯된 소통의 어려움이 있었다.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해도 일부 학생이 정해진 시간을 지키는 데 어려움을 겪어 운영이 순조롭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강 교육사는 아이들의 현재와 함께 앞으로의 삶을 생각했다. 지금 교실에 있는 학생들도 언젠가는 부모가 되고, 다음 세대를 키우는 어른이 된다는 생각이었다. 당장 눈앞의 수업을 마치는 것만큼 일상에서 필요한 약속과 책임을 익히도록 돕는 일에 마음을 쏟았다.
자신 역시 낯선 제도와 생활 방식을 하나씩 배워야 했기에 학생들이 겪는 어려움을 자신의 경험에 비춰 헤아릴 수 있었다. 북한과 한국의 교육 현장을 모두 경험한 이력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대화를 이어가는 자산이 됐다.
◆남편도 달라졌다…서로 배려하며 정착 힘써
학교 밖에서는 가족이 정착의 버팀목이었다. 함께 북한을 떠나온 남편도 한국 사회에 적응하며 시청 공무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부부에게 정착은 일자리를 얻는 것만을 뜻하지 않았다. 함께 살아가는 방식도 바꿔가는 과정이었다. 강 교육사는 남편이 한국의 직장 생활과 사회 문화를 경험하면서 가정에서도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남편도 권위적인 북한식 가부장제 문화에서 벗어나, 한국의 직장 생활과 사회 문화를 경험하며 스스로 많이 변했습니다."
아내와 아이를 배려하는 태도가 늘었고, 부부는 의견이 다를 때 서로 타협하며 가정을 꾸려갔다. 목숨을 걸고 함께 떠나온 만큼 새로운 삶 역시 함께 지켜가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강 교육사는 "서로 타협하고 봐주면서 끝까지 가정을 지키는 것이 아이들을 위해서도 맞는 길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북한에 남겨둔 부모에 대한 걱정도 부부가 함께 감당했다. 부모를 모셔오는 데 수천만원이 들었지만 두 사람은 힘을 모았다. 이후 부모가 한국과 일본을 여행하며 기뻐하는 모습은 부부에게 큰 보람으로 남았다.
◆"아이들에게 따뜻한 교육 전하고 싶어요"
강 교육사가 들려주는 정착의 경험은 특별한 성공 비결보다는 매일의 배움과 책임에 가깝다. 모르는 업무는 시간을 들여 익혔고, 학생과 학부모 사이에 소통의 어려움이 생기면 서로를 이해할 방법을 찾았다. 가정에서는 부부가 익숙한 생활 태도를 돌아보며 함께 달라졌다.
"어디서든 살아남으려면 스스로 헤쳐 나가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어떤 어려움도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부령의 중학교에서 시작한 교육자의 길은 인천의 초등학교로 이어졌다. 가르치는 학생들의 나이도, 학교의 제도도 달라졌지만 아이들의 성장을 돕겠다는 마음은 그대로다.
강 교육사는 "앞으로도 아이들에게 따뜻한 교육을 전하며 남북통합의 한 부분에서 책임을 다하고 싶다"고 말했다.
<뉴스핌-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yjlee@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