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가 피해자에 합의 이행 압박하는 '초현실'
폐기하지도 이행하지도 않는 어정쩡한 상태 유지
그 사이 생존 피해자는 46명에서 6명으로 줄어
[서울=뉴스핌]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15년 12월 28일 한·일 양국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선언했다. 이날 윤병세 당시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무상은 서울 세종로 외교부 청사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합의문을 발표했다.
이 합의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으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엄존하는 역사적 사실을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했다고 선언한 합의 자체도 문제였지만 한국의 정권이 바뀌면서 후속 조치가 중단되면서 있으나 마나한 합의가 됐기 때문이다.

이 합의는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 정부의 대일 외교 중 가장 대표적인 실패 사례다. 문제 제기는 합리적이 않았고 협상 과정에서는 피해자를 포함한 국민들과 소통하지 못했다. 또 도출된 결과는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지 않았다.이 합의는 현재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남아 위안부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한국의 국제적 위상에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는 중이다.
◆위안부 합의의 의미와 한계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합의를 통해 일본은 "책임을 통감한다"는 표현과 함께 공식 사죄를 언급했다. 무엇보다 일본이 제공한 10억엔은 민간 기금이 아니라 일본 정부의 예산이라는 점이 의미가 있다. 이전에 있었던 일본의 위안부 관련 조치 중 가장 진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이 정부의 책임을 분명하게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기시다 외무상은 "군의 관여 하에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로서, 이러한 관점에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고 말했다. 군이 잘못한 것에 대해 정부가 책임을 느끼고 있다는 요상한 화법이었다.
또한 일본 정부예산을 피해자 존엄 회복과 상처 치유에 사용하도록 했지만 일본 측이 피해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정부가 설립한 지원재단에 기부하는 형태였다.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일을 가해자인 일본이 직접 하지 않고 한국 정부가 알아서 하도록 한 것이다.
특히 일본의 조치에 대한 한국 정부의 상응 조치가 국민들을 분노하게 했다. 윤 장관은 "이번 발표를 통해 일본 정부와 함께 이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고 했다. 또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이전 문제가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향후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 상호 비난·비판을 자제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 합의에 위안부 피해자들이 반발했다. 시민단체는 일본의 법적 책임 인정과 배상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국민들은 합의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배제된 점을 문제로 지적하면서 10억엔을 내놓고 '더 이상 이 문제를 거론하지 말라'고 통보하는 일본의 오만한 방식에 분노했다.
◆박근혜 정부의 잘못된 접근법
사실 이같은 위안부 합의는 박근혜 정부가 자초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무엇 때문인지 취임 초기부터 퇴로가 없는 초강경 대응으로 일관했다. 박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일 정상회담도 없다"고 못박았다. 국민들이 위안부 문제 해결 안되면 일본 총리와 만나지도 말라고 요구한 것도 아니었는데 박 대통령은 처음부터 한·일 관계의 입구를 거대한 바위로 틀어막았다.
한·일 관계의 최대 난제인 위안부 문제 해결을 대일 외교 출발의 전제 조건으로 내건 것은 커다란 판단 착오였다. 당시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한·미·일 협력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박 대통령의 대일 접근법은 외교적 입지를 스스로 좁힌 자충수여서 오래 버티기 어려웠다.
결국 박근혜 정부는 스스로 빠져든 위안부 문제의 덫에서 벗어날 방법을 서둘러 모색해야 했다. 박 대통령은 2015년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식에서 "과거사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자"면서 완전히 다른 기조의 메시지를 내놓았다. 또 역사 수정주의적 시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전후 70주년 담화(아베 담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이 기대 이하의 위안부 합의가 곧 나올 것임을 예고하는 전조였다. 합의 이후 '역대 어느 정부도 하지 못했던 일'이라는 박 대통령의 항변인지 자화자찬인지 모를 주장은 국민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
◆문재인 정부 대일외교 실패의 출발점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를 강력히 비판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이 합의의 절차적·내용적 흠결을 지적하며 합의 과정을 검증했다. 문 대통령은 국민들이 이 합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점을 들어 사실상 폐기를 시사했다. 결국 일본의 정부예산 출연으로 만들어진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함으로써 합의 이행을 중단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 합의를 미국이 지지하고 환영한다는 점을 간과했다. 일본의 반발은 무시할 수 있었지만 미국의 압박을 피해갈 방법이 없었다. 문 대통령은 결국 위안부 합의 재협상 요구를 접고 기존 합의를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미 폐기된 것이나 다름없는 위안부 합의의 운명이 바뀌지는 않았다. 문재인 정부 동안 위안부 합의는 아무 것도 이행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가 대안을 제시한 것도 없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 직후부터 국민 정서를 의식해 위안부 합의를 폐기하고 재협상하겠다는 태도를 보인 이후 한·일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들었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는 임기 내내 일본과 관계 단절 상태에 빠졌다.
대일 외교에 정통한 관료 출신의 일본 전문가는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합의 재검토 때문에 대일외교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고 평가했다. 그는 "위안부 합의가 잘못된 합의라는 점을 충분히 비판할 수 있지만, 비판에 그쳤어야 했다"면서 "합의를 깨면 새로운 해법을 제시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일 외교가 어려워진 잘못을 전임 정부에 돌리고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전략을 썼더라면 문재인 정부의 외교적 반경이 훨씬 넓어졌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과거사 '도덕적 우위' 무너져
한·일 위안부 합의는 이행 중인 것도 아니고 깨진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공중에 떠 있다. 위안부 합의로 설립된 화해·치유 재단이 해산됐지만 일본 정부가 제공한 10억엔은 돌려주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돈을 돌려주면 한국이 위안부 합의를 깼다는 것이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돈을 어떻게 할 것인지도 방향이 서 있지 않은 상태다.

한·일 양국 간에는 위안부 합의와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는 '당분간 관망하겠다'는 무언의 공감대가 있다. 딱히 해결책이 없어 손대기도 어려울뿐 아니라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것은 한·일 관계 전체를 흔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위안부 합의가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도 "국가 간 약속이므로 뒤집지는 않겠다"고 했다. 합의를 인정하지만 이행할 생각은 없다는 뜻이다.
위안부 합의는 이처럼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존재가 됐다. 이 때문에 합의 이후 위안부 문제는 오히려 더 꼬이고 있다. 10년 간 한·일 간 위안부 문제 논의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이나 방향성도 없다. 그 사이에 합의 당시 46명이던 생존 위안부 피해자는 계속 줄어들어 이제 6명만 남은 상태다.
이 합의로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일본이 국제사회에 이 문제를 말할 때 "위안부 문제는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당당히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한국에게는 틈만 나면 "합의를 이행하라"고 촉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일 위안부 합의와 이에 따른 국내적 혼란은 인류역사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반인도적 범죄의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초현실적 상황의 근거를 제공했다. 대일 외교에 오래 종사했던 퇴역 외교관은 "한·일 과거사 문제는 한국이 절대적인 '도덕적 우위'를 가진 사안"이라며 "한국 정부의 일관된 전략 부재와 감정적인 국내 주장 등으로 이같은 도덕적 우위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opento@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