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자살 원인으로서 빚
자본주의 사회에서 빚은 목숨과 직결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인 한국에서 경제적 어려움은 자살 원인 2위를 차지할 정도로 정신건강에 큰 영향을 미친다. 경제적 어려움 중 가장 큰 고통은 채무, 즉 빚이다. 뉴스핌은 자살 요인으로서 빚을 바라보고, 빚이 채무자들의 정신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했다. 더 나아가 경제 문제가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지지 않을 방법을 모색해 본다.
[서울=뉴스핌] 지혜진 신도경 기자 = 2024년 11월 한 90대 여성은 가족들의 짐이 되기 싫어 극단적 선택을 했다. 아들이 암 수술을 하면서 아들과 딸의 집에서 거주하고 있었는데, 사위가 은퇴하면서 미안한 마음에 일을 저지른 것이다. 이 여성은 병원 측의 입원 권유에도 간병인을 둘 형편이 안 돼 집으로 돌아갔다.
자영업 등 사업이 어려워진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사업을 정리하고 고시원에서 거주하며 배달업에 종사하던 30대 남성도, 과도한 신용카드 채무에 시달리던 40대 자영업자도 모두 죽음을 생각했다.
[빚, 빛] 글싣는 순서
1. 그 죽음 뒤엔 빚이 있었다…극단적 선택 원인 2위
2.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빚…마음도 함께 무너졌다
3. 위기에 취약한 삶…제도권 대출도 헤어나오기 힘든 '늪'
4. "회생 신청자는 그나마 나아"…벼랑 끝 불법사금융 채무자들
5. "돈(Money) 워리, 비 해피"…경북, 상담사가 경제위기군 직접 발굴
6. 자살예방 최전선 응급실 사례관리자들...현실은 6개월 임시직
7. 새정부 서민금융·자살예방책 살펴보니…"정책 간 연계성 부족"
8. 채무자에게 필요한 것은…"조기발굴·정서 지원 등 원스톱 서비스"
1억원 이상의 보이스피싱 피해를 본 30대 남성, 코로나19로 실직 후 정신건강이 나빠진 50대 남성 등 모두가 돈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웠다.
28일 뉴스핌이 확보한 2024년 11월 한 달간 서울 보라매병원 응급실 내원 환자 가운데 경제적 자살군으로 분류된 이들의 자살 동기다.
이 한달간 총 34명이 극단적 선택으로 보라매병원 응급실을 찾았으며 이들 중 경제적 문제, 즉 돈이 문제가 된 사례는 11건(32.4%)으로 나타났다. ▲정신장애 32건 ▲경제적 문제 11건 ▲대인관계 8건 ▲입시/직장 4건 ▲주변죽음/질병 4건 ▲말다툼/싸움 4건 ▲충격적 사건 4건 ▲신체적 질병 3건 ▲법적문제 1건 ▲기타문제 2건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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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매병원은 2013년부터 '응급실 기반 자살시도자 사후관리사업'을 시행하는 선도 기관이다. 이 사업은 자살 시도로 응급실에 내원한 환자들이 다시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도록 돕는 자살예방 프로그램으로, 응급 처치에만 그치지 않고 정신과적 평가와 초기 상담을 진행한다. 병원 내 단기 사례관리(최대 4회)를 통해 환자의 상태를 점검하고 이후에는 지역 자살예방센터나 정신건강복지센터로 연계해 장기적인 관리와 지원이 이뤄지도록 한다.
2013년 9월 1일부터 올해 7월 31일까지 보라매병원 응급실을 찾은 자살시도자 7044명 중 경제 문제가 원인이 된 사례는 348건이다. ▲정신장애 5020건 ▲대인관계 1083건 ▲말싸움/다툼 445건 ▲학교/직장 381건에 이어 다섯번째로 높은 자살 원인인데, 보라매병원 관계자는 실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이들은 더 많을 수 있다고 봤다. 자살시도자를 상담하는 과정에서 경제적 문제를 언급한 경우에만 경제적 문제를 원인으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경제 문제는 극단적 선택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다. 빚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일은 더 이상 놀랄 만한 사건이 아니다.
2023년 4월 발표된 제5차 자살예방기본계획(2023년~2027년)을 보면 정신적문제(39.8%), 경제 생활문제(24.2%), 육체적 질병(17.7%) 문제 순으로 극단적 선택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특히 가장의 역할을 많이 하는 31~60세 남성의 경우 자살 원인의 1위가 경제적 이유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보건복지부가 발간한 '2023년 심리부검 면담 결과보고서'를 보면 자살사망자는 사망 전 평균 4.3개 스트레스 사건을 다중적으로 경험한다. 이 가운데 경제적 요인은 3번째로 높다. 정신건강(86.3%), 가족(61.8%), 경제(60.7%), 직업(58.9%), 성장 과정(47.6%), 부부(36.3%), 신체 건강(29.7%), 대인관계(24.8%), 연애(13.1%), 기타(8.8%) 순이다.
자살사망자들이 겪는 경제적 스트레스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부채, 즉 빚 때문에 받는 고통이 경제적 스트레스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경제적 스트레스를 호소한 이들 가운데 부채 때문인 비율은 62.7%다. 수입 감소를 원인으로 꼽은 이들은 26.2%로 뒤를 이었다.
국가적 경제 위기도 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살예방기본계획 보고서는 "1997년 외환위기, 2002년 카드대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등 사건을 계기로 자살률은 상승한 뒤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적 문제는 정신건강 문제나, 대인관계 등 다른 자살 원인에 비해 비교적 물리적으로 실체가 명확한 편이다. 자살예방사업을 통해 경제위기군이 금전적 문제 해결까지 지원받을 수 있다면 이들의 자살률을 대폭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과중채무 경험이 정신건강의 위험 요인임을 지적한 '가계부채가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 – 우울감과 자살생각을 중심으로'(박정민, 오욱찬, 구서정) 논문에서도 "과중채무자를 위한 지원제도가 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비경제적 측면에 대한 고려도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채무 관련 상담 이용자들의 정신건강 상태에 관한 선별과 모니터링, 지원서비스로의 의뢰 필요성을 살펴볼 것"을 제안하고 있다.
뉴스핌은 여러 자살 원인 중 비교적 원인이 뚜렷한 경제 생활 문제가 자살로 이어지지 않도록 금융·신용·복지서비스 제공 시 정신건강 서비스를 안내해 고위험군 발굴·지원 필요하다는 문제의식 하에 자살 원인으로서 빚을 바라봤다.
heyjin@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