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계 "투자 자율성 위협, 투자자 선택권 사라져"
"정부 '수익률 제고', 업계 '기금화 효과 불확실'"
[서울=뉴스핌] 송기욱 기자 = 정부가 퇴직연금의 '기금화'를 거론하면서 금융투자업계가 긴장하고 있다. 퇴직연금 시장에 참여해 온 증권사들은 민간 연금 시장의 위축과 더불어 소비자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27일 금융투자업계와 정치권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은 퇴직연금 기금화 필요성을 제기하고 관련 입법을 준비 중이다. 노동부 역시 최근 국정기획위원회에 퇴직연금공단 설립 등의 내용을 담은 퇴직연금 개선 방안을 보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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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AI생성이미지] |
퇴직연금 기금화는 현재 민간 금융사가 관리·운용하고 있는 퇴직연금을 정부 주도의 공적 기금으로 일원화해 관리하는 방식으로, 정부는 이를 통해 연금 수익률 제고, 수수료 인하, 연금 사각지대 해소 등의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다만 업계는 기금화 필요성이 거론되는 것이 다소 당혹스럽다는 분위기다. 퇴직연금은 증권사들이 수년간 '미래 먹거리'로 공들여 키워온 사업이다. 현재 증권사들은 특히 IRP(개인형 퇴직연금)와 DC(확정기여형) 계좌를 중심으로 ETF, TDF 등 실적배당형 연금 시장을 확대해왔다.
증권사들은 IRP 수수료 무료 등 출혈까지 각오하며 경쟁을 펼치고 있다. 단기적인 수익보다 은행권 고객 자금을 장기적으로 유치하기 위한 전략적 플랫폼으로 접근해온 셈이다.
퇴직연금 기금화가 본격화되면, 이 같은 증권사의 기존 연금 사업 모델이 구조적으로 흔들릴 것으로 보인다. 기금화가 도입되면 퇴직연금 계좌 관리와 운용이 모두 국가로 넘어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증권업계는 업계 피해는 물론 공적기금의 과도한 개입으로 인한 시장 혼란과 부작용 등을 우려하고 있다.
한 금투업계 관계자는 "정부 주도의 운용 체계에서는 정책 방향이나 비재무적 요소가 투자 결정에 개입될 수 있다는 점이 부담 요인이 될 것"이라며 "장기 운용의 성과를 위해서는 정치적 독립성과 운용 자율성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또 "금융투자업계는 TDF와 같은 장기 투자 상품을 중심으로 퇴직연금 시장에서 다양한 솔루션을 제공해왔는데, 기금화가 시장 생태계에 급격한 구조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도 지적했다.
정부는 퇴직연금 기금화를 통해 연금 수익률을 끌어올리겠다는 기대를 내세우고 있지만, 업계는 이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기금화로 자산 규모가 커진다고 해도 수익률이 반드시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국민연금 사례처럼 대형 기금도 수익을 내기 쉽지 않은 구조"라고 언급했다.
오히려 민간사가 운용하는 퇴직연금 수익률이 나쁘지 않다는 입장이다. 이 관계자는 "자산의 약 80%가 여전히 예금성 자산에 머물러 있어 전체 평균 수익률이 낮게 나타나는 것일 뿐, 실제 실적배당형 운용 자산에서는 괜찮은 성과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라고 짚었다.
퇴직연금 기금화가 소비자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현재 퇴직연금 가입자는 ETF, 펀드, TDF 등 다양한 상품과 운용사를 직접 선택해 투자할 수 있지만, 기금화가 진행될 경우 소비자가 개별 금융사의 상품을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연금 투자 방식이 일원화되면 소비자 입장에서는 투자 전략을 스스로 설계할 수 있는 자율성이 제한될 여지가 있다.
퇴직연금 기금화의 정책 취지와 별개로, 민간 연금 시장의 역할이 축소되고 소비자의 투자 선택권이 줄어들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고려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현재 DC나 IRP 제도는 다양한 상품 및 운용사 간의 경쟁을 통해 투자자의 자율 선택권을 보장하고 있는데, 기금화가 이 구조를 해칠 수 있다"면서 "민간 운용사의 참여 여지가 축소되면 경쟁과 혁신이 위축될 수 있다"고 꼬집었다.
또 다른 금융투자업계 관계자 역시 "기금화가 되면 소비자는 국가가 정한 일괄 포트폴리오를 따를 가능성이 높아지고, 지금처럼 다양한 운용사와 투자 상품을 고를 수 있는 구조가 유지되기 어려울 수 있다"며 "연금 기금화는 결국 소비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특정 운용 전략에 따라가야 하는 시스템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oneway@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