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건동 서울대병원 '이름 모를 자유전사의 비'
북한군 무차별 학살, 1000여명 희생 추정
진실화해委, 지난 4월 北 전쟁범죄 첫 인정
전시 국내 의료진과 국제 지원도 지속돼
[서울=뉴스핌] 조준경 기자 = 푹푹 찌는 듯한 6월 하순의 햇살을 받으며 혜화역 4번 출구에서 창경궁 방향으로 500여m를 걸어가다 보면 서울대병원 후문이 나온다. 3번 출구를 나와 서울대병원 캠퍼스를 가로질러 가더라도 언덕을 한참 오르내려야 올 수 있는 곳으로, '서울대병원 학살 사건'의 영혼(靈魂)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그곳에는 '이름 모를 자유전사의 비'라는 현충탑이 외롭게 서있다. 일부러 찾아와야만 볼 수 있는 이 탑은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 당시 서울시 종로구 연건동의 서울의대 부속병원(이하 병원)에서 북한군에게 학살당한 국군 부상병들과 의료진, 일반 시민들을 기리기 위해 1963년에 건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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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조준경 기자 = 서울시 종로구 서울대병원 후문에 서 있는 '이름 모를 자유전사의 비' 2025.06.24 calebcao@newspim.com |
◆ 국군 전상병과 민간 환자 최대 1000여명 학살 추정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을 돌파한 북한군은 3일만인 28일 서울에 입성한다. 오전 9시경, 조선인민군 육군 제9땅크여단으로 추정되는 병력들이 병원으로 밀려들어왔다.
국군 1개 소대가 경비 중이었으나 북한군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남씨 성을 가진 소위와 민씨 성을 가진 하사의 지휘 아래 경비소대와 움직일 수 있는 전상병(戰傷兵) 80여명이 뒷산에서 북한군에 응전했으나 모두 전사했다.
4개 병동 800병상 규모였던 병원에는 미처 후방으로 이송되지 못한 국군 전상병들과 의료진, 일반 환자들이 가득했다.
북한군은 병동을 순회하며 국군 전상병들을 총과 총검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일부 국군 장교들은 병실에서 권총으로 총격적을 벌이다 전사하거나 자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병원에는 일반 환자를 비롯해 위문 차 와있던 가족들도 있었는데 이들도 북한군에게 학살당했다.
북한군은 병원 안을 수색해 전상병 180여명을 추가로 찾아내고, 다음날인 29일 밖으로 끌어내 2차 학살을 자행했다.
현장 목격자였던 간호사 박명자(朴明子) 씨와 배명애(裵明愛) 씨는 <월간조선> 1999년 6월호 '두 목격자의 증언'에서 북한군의 만행을 알렸다.
박 씨는 "인민군들은 국군 부상병들을 무참히 죽였다. 운신을 못해 침대 위에 누워있는 중환자들을 그 자리에서 죽이는가하면, 달아나는 국군 부상병의 등 뒤를 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배 씨는 "영안실 쪽 언덕에 죽은 시체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울창한 나무들이 우거진 含春苑(함춘원·사도세자의 묘를 쓴 곳으로 지금은 없어졌다) 동산에도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고 기억했다.
북한군은 군과 민간 환자를 구분하지 않고 학살했다. 환자를 돌보기 위해 병원에 남아 있는 의료진도 화를 피하기 어려웠다. 일부 의료진은 남조선노동당(남로당)원 동료의 고발로 처형되거나 북한군이 서울에서 후퇴할 때 함께 납북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전쟁범죄조사단 기록에 따르면 이 학살의 가해 주체는 북한 인민군 제4사단 5연대장 인민군 대좌 이임철 등 북한군 50여 명과 성명 불상의 성동구 남로당원 9명이다.
그동안 희생자는 1000여명으로 추정돼 왔다. 지난 4월 8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국군과 민간인 희생자를 '최소 330명 이상'으로 규정했다. 기존 추정치와는 큰 폭의 차이가 있지만 '서울대병원 학살 사건'을 '집단 학살'로 최종 규정하며 75년만에 북한의 전쟁 범죄를 인정한 것이다.
전쟁이나 무력 충돌 시 군인, 포로, 민간인의 보호와 대우를 규정한 '제네바 협약(1949)' 제12조 '전지(戰地)에 있는 군대의 부상자 및 병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조약'에 따르면 적군이라 할지라도 부상자는 보호해야 하며, 생명에 대한 위협 또는 신체에 대한 폭행이 엄중히 금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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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조준경 기자 = 서울대병원 내에 있는 구(舊) 국립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제1병원 본관. 2025.06.24 calebcao@newspim.com |
◆ 전시 간호인력 헌신과 유엔군의 의료지원도 지속돼
전쟁 기간 동안 의료진의 헌신과 희생은 지속됐다. 최경혜 국군간호사관학교장(준장)은 지난 2015년 8월 '한국전쟁과 간호史'를 <대한간호>에 기고하며 많은 수의 간호장교가 부상병들을 돌봤다고 강조했다.
최 교장에 따르면 총 1257명의 간호장교가 참전하여 3년간 39만7519명의 입원 환자를 간호했다. 개전 3일째 3200여명의 환자가 일시에 군 병원으로 밀려들자, 군은 간호장교만이 아니라 민간병원 간호사를 포함하여 간호학생들을 동원했다. 급박한 상황 하에서 단기 교육을 통해 많은 학생들이 간호장교로 임관했다.
군 간호인력들은 열악한 물자 상황에 맞춰 명주실이나 낚싯줄을 봉합사(絲)로 사용하기도 했고, 과도를 달궈 총알을 제거하는 등 필요시 외과치료반의 임무도 수행했다.
유엔군의 지원도 빼놓을 수 없는 공로다. 한국전에 전투부대 파병 외 의료지원단을 파견한 국가는 미국, 스웨덴, 덴마크, 이탈리아, 인도, 노르웨이 등이다.
한봉석 연세의대 교수가 지난 2021년 6월 기고한 특집논문 '한국전쟁기 의료지원 연구'에 따르면 전쟁 발발 당시 국내에 남아 있던 미군 의료진은 9명(의사 2, 간호사 1, 병사 6)에 불과했다. 이들은 후방으로 퇴각했다가 같은 해 7월 7일 대구에 미 제8군 사령부가 설치되며 11명 규모의 '의무 전방제대(advance echelon)'로 돌아왔다.
미 극동사령부는 관할 지역의 군의관을 될수 있는대로 긁어모아 7월에 333명이던 숫자를 12월에는 472명으로 확대시켰다. 군의관 부족 상황을 해결한 것은 1950년 말 미국 내에서 전시 부족한 의료진 충원을 위해 입안됐던 '의사징집법(the Doctors Draft Act)'이었다. 미국은 이후에도 1951년까지 부족한 군의관을 지속적으로 충원했다.
유엔군과 미군 의료진은 육군이동외과병원(MASH, MObile Army Surgical Hospital)에 소속돼 활동했다. 이들은 군 외과수술 외에도 질병 퇴치를 위한 예방의학과와 신경정신과적 치료도 진행했다.
한 교수는 논문에서 "미국을 필두로 다양한 국가와 주체들을 통해 의료지원이 쇄도했다"면서 기독교세계봉사회 등 종교단체, 그리고 한미재단 등 민간자선단체 등의 의료적 지원도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기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찾은 연건동 서울대병원은 75년 전과는 다르게 높고 깔끔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현충탑 앞에서 매년 6월 5일(서울대병원)과 같은 달 28일(서울북부보훈지청)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다.
자료를 조사하며 이미 서울대병원 학살 사건에 대해 많은 매체와 영상 컨텐츠들이 다뤄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더 첨언할 것이 있을까 고민했지만 75년 전 거동하지 못하는 환자를 끝까지 곁에서 지켰던 의료진과 국군 장병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것에 의의를 뒀다.
calebcao@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