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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D 폴리티션 스토리](상) 박용진 "역사 잃은 지혜, 잔꾀로 흐르고 민심 없는 정치, 술수로 흐른다"

기사입력 : 2025년01월14일 17:00

최종수정 : 2025년01월14일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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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전북 장수 출신, "학업에 열중 안했지만 나서는 아이"
전교조 결성 당시 고등학교 세 차례 교내 시위 주도, "가장 큰 충격"
학생 운동 거쳐 진보정당 운동, 민주당에서도 소신 지켜

[서울=뉴스핌] 채송무 기자 =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전 의원이 뉴스핌 KYD(Korea Youth Dream) '폴리티션스토리'에 출연해 어린 시절과 정치 입문 과정 및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했다.

박 전 의원은 14일 오후 유튜브 채널 '뉴스핌TV'를 통해 공개된 폴리티션스토리에서 어린 시절에 "막 나서는 아이였다"고 회상했다. "학업에 열중하지는 않았지만 친구 관계는 좋았다"고 말했다.

박 전 의원은 고교 시절 은사였던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이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 당시 구속된 이후 세 번의 교내 시위를 주도한 것에 대해 "저에게 가장 큰 충격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최장수 대변인이었던 본인의 마지막 논평이었던 '역사 없는 지혜는 잔꾀로 흐르고, 민심 없는 정치는 술수로 흐른다'는 문구에 대해 "그런 원칙을 잘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살았다"고 말했다.

그는 1971년 전라북도 장수 출신으로, 집성촌이 있는 장계면에서 거주하다가 부친의 근무지 이동에 따라 전주시 태평동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진북초등학교를 다니다 1979년 부친이 서울로 이동하면서 서울화계초등학교에 전학해 졸업했다. 이후 신일중학교, 신일고등학교를 거쳐 현재까지 서울 강북을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다.

[서울=뉴스핌] 채송무 기자 =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전 의원. 2025.01.13 dedanhi@newspim.com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 당시 그의 은사였던 이수호 선생이 구속된 이후 세 번의 교내 시위를 주도했고, 1990년 성균관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한 이후 1991년 대학 선배인 김귀정 씨가 시위 도중 숨지는 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1994년 성균관대학교 총학생회장, 이후 서총련 산하 북부총련 의장직을 역임했다.

전역 후 진보정당 건설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정치부장과 1997년 9월 국민승리21의 언론부장 등을 지냈고, 대선 이후에도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와 함께 진보정당 운동을 이어갔다. 2011년 진보대통합 논의가 확발해진 이후 야권대통합을 주장하면서 민주당에 합류했다.

2011년 9월 '혁신과통합' 상임운영위원을 맡았고, 이후 20대와 21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이건희 삼성회장의 차명계좌 문제와 현대자동차 문제를 지적해 리콜 결정을 이끌고 유치원 3법 등의 성과를 내면서 의정 활동으로 눈길을 끌었다. 

다음은 박 전 의원과의 폴리티션 스토리 인터뷰 전문이다.

-(채송무 기자, 이하 채 기자) 안녕하세요. 정치인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미래를 살펴보는 kyd 방송의 폴리티션 스토리. 저는 진행을 맡은 정치부 채송무 기자입니다. 옆에는 함께 진행을 맡아 주실 스웨덴 린넨대의 최연혁 교수님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연혁 교수, 이하 최 교수) 안녕하십니까?

-(채 기자) 오늘은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전 의원님을 모시고 정치 역정과 철학에 대해 이야기를 좀 나눠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박용진 전 의원, 이하 박 전 의원) 예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교수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채 기자) 의원께서는 그동안 진보 정당 활동과 민주당에서도 오랜 기간 진보의 그 소신을 지켜오신 정치인이십니다. 이는 어린 시절부터 쌓여 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어린 시절에 어떤 소년이었나요.

▲(박 전 의원) 약간 이렇게 막 나선다 라고 해야 될까요. 친구들이 볼 때는 약간 꼴뵈기 싫은 아이일 수도 있고요. 예를 들면 봄이면 선생님을 조르고 애들 선동해서 야외 수업하도록 하고 첫 눈 오면 수업 땡땡이 치고 선생님 첫사랑 이야기 해달라고 조르고. 교실 분위기를 학구적이지 않게 만드는 데 앞장섰던 사람인 것 같아요.

생활 기록부를 보면 리더십이 있고 이렇게는 쓰여져 있더라고요. 학업에 열중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고, 친구 관계는 다 좋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사는 것이 순탄치 않아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7년 6월 항쟁 과정이어서 사회 변화에 대한 관심은 상당히 많았던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최 교수) 장수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바로 서울로 전학을 온 케이스였는데요. 지금 살고 계신 곳에서 오랫동안 계셨더군요.

▲(박 전 의원) 아버지가 경찰이셨어요. 당시 서울에 인구가 펑펑펑 늘어나고 있을 때잖아요. 경찰서를 새로 지어서 전국에서 인원을 차출하셨는데 아버지가 어떻게 보면 운 좋게 서울로 오시게 된 것이죠. 아버지 때라서 온 가족이 서울로 왔구요. 장수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 입학은 전주에서 입학을 했어요. 전주 진북 초등학교라고 유명한 학교가 있습니다. 전주 진북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서울 화계 초등학교를 2학년 때 전확을 왔어요.

그 동네에서 화계초등학교, 신일중학교, 신일고등학교를 나왔고, 대학교도 제알 가까운 곳이 성균관대학교더라고요. 군대도 갔다 오고 결혼도 거기서 하고, 아이도 거기서 낳고 국회의원도 거기서 하고 지금도 그냥 계속 살고 있어요.

-(최 교수) 각자마다 어렸을 때의 인생 스토리가 하나씩 있거든요 기억에 남는 사람 혹은 이벤트가 있을까요.

▲(박 전 의원) 공부를 별로 안 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아마 중학교 때부터 반장도 하고 고등학교 2학년 때 부학생회장이 되고, 사실상 총학생회장 역할을 다 했어요. 임기를 마치고 나도 이제 공부하자 했을 때 1989년도에 전교조가 결성이 된 것이에요. 전교조 결성 한 달 전부터 낌새는 알았고, 학생회 활동도 했었고, 부학생회장으로 역할에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전교조를 지지하고 호응하는 액션을 해보자는 제안이 안팎에서 많이 왔었어요. 당시 전교조 위원장도 하고 민주노총 위원장도 했던 이수호 선생님이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이셨어요.

친구들한테 선생님을 지지하기 위한 보호하기 위한 무엇인가를 하자고 타협안을 제시하고 선생님들이 교무회이하실 때 자율학습 시간 30분 동안 아이들을 다 밖으로 끌어내서 집회를 하기로 한 거죠. 이제 그렇게 하려니까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더라고요 방송반 반장을 불러다가 '너 방송반 열쇠 있지 그 스위치 켤 수 있지'를 다 물어보고 그때 고3 학생회장한테는 이러이러한 내용의 성명서를 쓰도록 해서 읽도록 하고 또 각 반의 반장들하고는 몇 시 몇 분에 이 방송이 나오면 그걸 신호로 '다 나와라'고 했어요.

30분 안에 이것을 다 만들어 내야 되는 일이잖아요. 그거를 했던 과정이 되게 지금도 기억에 남아요. 지금도 친구들하고 만나면 그때 얘기해요. 어떤 느낌이었는지 얼마나 두렵기도 하고 흥분됐었는지를 이야기하고 '박용진 다시 봤다'고 하는 친구들도 많았어요. 그런데 당황했어요. 어쩌면 이렇게 친구들이 일사분란하게 다 같이 움직이나. 짜기는 같이 짰지만 5분, 10분 안에 1200명이 싹 다 교문 앞으로 소리 소문 없이 움직인 것이에요.

1200명이 다 교문 앞으로 모여서 교무실에서 선생님도 몰랐대요. 수위 아저씨가 교무실로 연락해서 그때서야 선생님들이 쫒아나오셔서 '들어가라'고 난리가 났었죠. 전교조 결성이 일요일이었는데 저희가 월요일 아침 8시에 집회를 했거든요. 전교조 결성을 지지하는 고등학생의 첫 번째 집회로 기록돼 있어요. 교내 시위를 두 번 더 했었어요.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나죠. 저한테는 가장 큰 충격이었고요.

-(최 교수) 고등학교 때부터 정치에 입문을 한 셈이네요.

▲(박 전 의원) 그게 무슨 정치겠어요. 그냥 해야 하니까 한다는 느낌이었고요. 저희가 아들이 셋이어요. 큰 형 두 분과 저, 밑에 여동생이 있는데 아버지는 딸을 갖고 싶어하셨는데 계속 아들만 나오니까. 그런데 셋째 아들이 늘 말썽인 거에요. 형들은 다 같이 신일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얌전하고 학교에서 있는 듯 없는 듯, 공부 잘하고 했는데 저만 유독 튀고 그러니까 어머니 부탁이 '제발 졸업만 해라'고 부탁하셨어요.

학교에서도 그렇고 외부 압력이 들어와서 '이런 식으로 하면 졸업 못합니다'는 위협이 있었을 것 아니에요. '검정고시 치죠'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어머니가 전라도 표현으로 기함을 하시면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가서 데모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대학을 가서 데모하니까 '데모 그만해라'고 그러시긴 했는데 아무튼 부모님 속 썩이는 일들은 참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채 기자) 대학 시절에도 학생 운동을 하셨잖아요. 의원님이 학생 운동을 하던 시기는 약간 쇠퇴기에 빠지는 시기였던 것 같아요. 당시 학생운동이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박 전 의원) 그때는 전대협 세대에서 한총련 세대로 바뀌었어요. 전대협과 한총련의 가장 큰 차이는 전대협은 그야말로 국가와 민족, 민중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지를 고민하기 위한 대표자들의 회의인데 한총련은 그야말로 생활, 학문, 투쟁의 공동체라고 이야기를 해서 대학생으로서 찾아야 할 권리, 자신의 위무 등을 잘 성실하게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냐라고 하는 학생회 본연의 역할에 집중하자. 대학 발전과 교육 재정의 확보, 이런 쪽에 집중하자고 더 넓기도 하고 문턱이 낮은 단체를 지향했어요. 이미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에요.

학생들이 투표로 정치 권력을 견제하거나 바꿀 수 있다라는 것을 국민들이 알고 있는 마당에가두투쟁, 돌멩이와 화염병이 난무하는 방식으로 정치적 의사를 전달할 필요는 이제 없다고 다들 느끼고 있었던 시절인데, 이상하게도 다른 거는 다 앞서가던 학생운동 세력이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뒤진 거죠. 나만 옳다고 생각하고 이 변화가 두렵기도 하고 '이것은 가짜다 우리가 속지 말아야 된다'라고 하는 자기 아집이 교차되고 있었던 시절이에요.

제가 총학생회장이 되니 1 2학년 때 봤던 그런 학생들이 아니고 그런 정국이 아닌 것이에요 대통령도 노태우에서 YS로 바뀌었고요. 야당은 큰 소리치고 국민들도 투표로 여기도 혼냈다 저기도 혼냈다를 몇 번 해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에 대한 고민을 꽤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총학생회장을 하는 중에는 답을 못 얻었고 오히려 군대를 가서 느꼈거든요. 평범한 친구들이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대학 1학년이 되자마자 온 혹은 대학을 다니지 못하고 바로 직장을 갔던 친구들과, 저보다 나이 어린 친구들과 같이 있었을 것 아니에요

제가 5학년을 하다가 군대를 가서 25살에 갔으니까. 20살, 21살로 나보다 한참 어린 친구들이 나보다 고참인데, 이들이 하는 고민을 들어보면서 '세상이 달라지고 있고, 이들의 고민은 되게 구체적인데 나는 추상적인 것만 이야기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학생 운동하다가 총학생회장을 하고 잡혀자기도 하고 구속도 됐잖아요. 군대를 안 가도 됐어요. 빠질 방법이 여러 개가 있었죠.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또 '제발 군대는 좀 가라'고 하셨어요. 웬만한 부모님들은 군대 안 갈 수 있으면 안 가게 하려고 그러셨는데 우리 어머니는 그런 것이 아닌 거야.

큰 아들 군대 갔다 왔지, 작은 아들도 갔다 왔지, 그래서 아들 군대 보내면서 서운하고 아련한 것은 다 겪어본 것이에요. 뭐라고 하시냐면 "내가 너 때문에 제 명에 못 살 테니까 마지막 효도한다고 생각하고 군대 가라"는 거에요. "나 군대 안 갈 방법이 많은데"라고 했더니 "아 시끄러워. 군대 갔다 와"라고 해서 갔는데 생각해보니까 어머니 말씀 듣기를 잘한 것 같아요. 정치하면서도 떳떳하기도 하고 군대를 가서 오히려 못 봤던 것을 많이 봤거든요.

저는 되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하고 에너지가 좀 넘치는 타입이거든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라도, 감옥에 들어갔어도 늘 즐거웠어요. 즐겁고 매일매일 바쁘게 움직이고 아침 6시에 일어나서 할 일을 제깍제깍 다 해내면서 살았고, 군대에서도 그랬던 것 같아요. 군대에서도 적극적으로 하고, 못 봤던 것, 잘 만날 수 없었던 사람을 만나고, 저보다 어린 사람을 상관으로 모시면서 당하는 수모나 이런 것들도 저에게는 좋은 기억으로 승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있었던 것 같아요. 군대에 가서 학생운동에 대한 정립, 제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가다듬었던 것 같아요.

-(최 교수) 중요한 고비고비마다 어머님의 역할이 크셨는데 아버지의 역할은 무엇이었나요.

▲(박 전 의원) 불편했죠. 아버지는 대공과 형사도 하셨는데 아들은 데모해요. 총학생회장이에요. 이른바 운동권 우두머리야. 제가 처음 총학생회장 당선되고 학교 총장과 저녁 자리가 있지만, 관할 경찰서 서장과도 식사 자리를 한번 하더라고요. 동대문경찰서 서장과 자리를 했는데 제가 "윗사람들에게 좀 전해줘라. 나 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혹시라도 피해를 보거나 괴롭힘을 당하거나 하면 내가 가만히 안 있을 것"이라고 엄포 비슷한 것을 했던 것이 기억이 나요. 그런데 아머지는 평범한 경찰 공무원으로 지내셨는데 제가 처음 총학생회장을 하다가 노동자들 파업 지원 투쟁을 하다가 잡혀간 거였어요.

장안동 대공분실, 남영동은 유명한데, 장안동에도 그런 시설이 있는데 거기서 사장님으로 표현되든지 대표로 표현되는 분이 있었는데 아마 경찰서장쯤 되는 모양이에요. 무역상사로 외부는 위장이 돼 있고요. 거기 가서 조사를 한참 받고 있는데 잠깐 나오라고 해서 갔더니 사장 대공분실장이 가운데 앉고 소파가 있는데 아버지가 그 앞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계시더라고요. 제가 들어왔는데 아버지가 이 사람한테 허리를 계속 조아리면서 "죄송하다. 자식을 잘못 가르쳐서 이렇다"고 순간 아버지한테 미안한 것도 있는데 막 화를 냈어요.

아버지께 "아버지가 무엇을 잘못했는데,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데 이 사람한테 아버지가 이렇게 조아리고 계시냐"고 했더니 "용진아 앉아라"고 하셨어요. 저한테 별로 따뜻한 분은 아니셨거든요. 아들 둘이 있으니 셋째가 눈에 보이시겠어요. 밑에는 딸이 또 있으니까 막내 아들이 눈에 보이시겠어요. 그냥 집에나 들어오고 밥이나 먹고 다니면 다행이라고 생각을 하셨던 것 같고 저도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날 그 사람한테 조아릴 때 너무 속이 안 좋았고, 가시다가 저랑 헤어지는데 주머니에서 3만원을 꺼내서 딱 주셨어요. 그때 3만원은 아버지의 일주일 용돈이었을 것이에요. 이걸 주시면서 두 가지를 이야기하시더라고요. '매 맞지 마라. 괜히 골병 든다' 그리고' 밥 굶지 마라'. 그러고 가시더라고요. 한참을 혼자 울었네. 그리고 이제 서울 구치소로 넘어갔을 때 아버지가 면회를 오셨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아버지가 나가시더라고요. 그리고 어머니랑 이야기하다가 다음 면회 때 어머니가 오셔서 "어제 아버지가 오셔서 파란색 수위를 입은 것을 보고 눈물이 나서 나갔다"고 그러시더래요.

나가서 우셨다고 그래서 "왜요"라고 했더니 당신이 죄 지은 사람들을 잡아다 감옥에 넣고 나면 그 옷을 입고 다시 경찰서에 가서 조사 받는 모습을 봤는데 당신 아들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 옷을 입고 있나 싶으니까 화도 나고 내가 왜 경찰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드셨대요. 그래서 나와서 막 우셨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지금은 아주 효도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때 불효를 많이 해서 너무 죄송하고, 아버지 사랑합니다.

-(최 교수) 말씀을 아주 잘하시는데 어디서 배우셨나요. 아니면 어릴 때부터 좌중을 이끄는 능려깅 있었나요.

▲(박 전 의원) 대변인은 5년을 했어요. 우리 정치사에서 최장수 대변인일 거에요. 민주노동당에서 3년, 민주당에서 2년을 했는데, 민주당에서 2년 한 것도 기록이었어요. 김대중 대통령 이후에 배지를 달지 않은 당 대변인을 2년 동안이나 했는데 그 동안 대표가 엄청 많이 바뀌었어요. 당 대표가 10번 바뀌는 동안 계속 당 대변이었어요. 다른 대변인은 계속 바뀌었는데 기자들이 박용진은 바꾸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기자들하고 인연도 깊고, 험난한 시절을 같이 겪으면서 큰 대과 없이 말 실수 없이 했던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껴요.

대변인들이 사실 파리 목숨이거든요. 말 한 마디 잘못하면 휙 하고 날아가는데 그런 무리함이 없었던 것은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요. 말을 잘하고 말고는 스타일이었겠죠.

부모님이 물려주신 성격상도 있는 것 같은데 제가 감옥을 좀 오래 갔었어요. 나중에는 2년 3개월 동안 있었는데 그때도 계속 독방이었어요. 하루에 편지지로 A4 용지 정도로 치면 거의 3장을 앞뒤로 빽빽하게 채워서 편지를 쓰거나 일기를 써서 밖으로 내보냈어요. A4용지로 보면 한 7장을 쓰는 것인데 어떤 내용으로 채울것인지를 머리 속에 정리해놓고 한 번에 쭉 써 내려가는 과정이 매일매일 훈련을 했다고 봐야해요. 아주 작은 일을 묘사하는 훈련도 되더라고요.

제가 결혼하고 6개월 만에 잡혀가서 감옥에서 2년 3개월 있다 나왔거든요. 와이프한테 얼마나 미안해요. 매일매일 반성문을 와이프에게 써서 보냈는데 매일 사랑해요. 미안해요 이야기만 쓸 수는 없으니까 '내가 혼자 방에 있는데 거미 한 마리가 지붕에서 내려와서 집을 짓는 과정을 쭉 지켜보는 거에요. 거미줄에 햇살이 스쳐지나가고 먼지가 흩날리는 과정, 겨울해와 여름해의 비교, 아침 공기에 까치가 날아가는 모습, 까치가 바람을 타는 모습을 혹시 보셨어요? 바람을 타면 그네를 타는 것 같아요. 까치가 바람을 거슬러 가는 것을 보면서 '까치가 오늘 그네를 타네요'라고 쓴다거나 작은 푷션을 미세하게 쓰려고 하는 과정이 필력에는 도움이 크게 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논평을 쓸 때도 길게 안 쓰고 어떤 때는 짧게 해버렸어요.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호가 일해에요. 날일 자에 바다 해자인데 그분의 고향인 합천에서 공원이 지금도 있다고 해요.

그 공원이 일해공원으로 이름을 짓고 비석을 세운다고 했는데 다른 당에서는 군사 반란 수괴에 공원 이름을 붙이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역사적인 반동행위라고 내는데 제가 냈던 논평을 '일해라고 한은 말은 횟집에나 어울린다'는 것으로 끝났어요. 더 욕할 필요도 없고, 일해라고 하는 말을 공원에 붙이지 말라는 걸로 그냥 끝났어요. 간략하게 하는 연습을 그때 감옥에 있을 때 했어요. 가장 힘들고 어려워도 나주에 다 좋게 해석하고, 그러려고 되게 노력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최 교수) 역사 잃은 지혜는 잔꾀로 흐르고 민심 없는 정치는 술수로 흐른다는 말을 남기고 이런 말을 남기고 대변인직을 내려놓았습니다.

▲(박 전 의원) 말이 멋있잖아요. 원래는 원문이 뭐냐면 '역사 잊은 지혜는 잔꾀로 흐르고 민심 잃은 정치는 술수로 흐른다'예요.그런데 제가 쓸 때는 둘 다 없는 것으로 맞췄어요. 그래서 역사 없는 지혜는 잔꾀로 흐르고 민심 없는 정치는 술수로 흐른다가 됐는데 이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1988년에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사계절 출판사에서 벽초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 광고를 지하철에 이렇게 붙여놨어요. 그 옆에 카피가 딱 그거였어요. '역사를 잊은 지혜는 잔꾀로 흐르고 민심을 잃은 정치는 술수로 흐른다'고. 우와 가슴에 확 박히더라고요. 좋은 말이야 하고 기억을 하고 있었어요.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갈 때 그것을 딱 내걸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역사와 민심 팀이에요. 그리고 평생 그것을 했어요. 역사와 민심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나는 그냥 술수와 잔꾀로 흘러갈 거야. 그렇게 하면 안 돼. 원칙 잘 지켜야 돼. 이런 생각을 늘 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민주당으로 와서 2012년에 당대표 선거를 나갔어요. 한명숙, 박지원, 이인영, 박영선, 김부겸 문성근 이렇게 출마를 했어요. 이렇게 짱짱한 분들과 했는데 제가 컷오프를 통과했어요. 중앙위원회에서 박용진이 5등으로 통과했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결과는 안 알려주지만 박용진이 최고위원은 되겠구나 하고 난리가 한번 났었는데 그때 궁금해지더라고요. 이 카피 내용이 책 안에 있는 줄 알았더니 없어요. 그래서 사계절 출판사에 전화를 했죠. 그랬더니 자기도 모른데요. 사장님이 아실까요 했더니 연결을 해주더라고요.

그때가 2012년인데 제가 상황을 설명하고 제가 누구라고 했더니 '어떻게 그것을 기억하시냐'고 그러는데 "남편이 원래 사장이었는데 돌아가셨대요. 그리고 대표를 맡으셨는데 남편이 벽초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을 발행하실 때 그냥 거기다 쓴 카피였대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글을 뽑아내셨는지 모르겠다. 어디서 보신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자기는 모르고 아마 남편이 본인이 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그 문구를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박용진 쓴 걸로만 나와요.

아마 사계절 출판사 사장님이 처음 쓰셨을 것 같아요. 말씀 그대로 저는 역사와 민심을 가지고서 정치를 해야지 잔꾀와 술수를 부리면 지금 당장은 어떻게 보면 살아날 수 있다고 봐요.지금 당장은 배지 잃지 않고 뭐 재선 3선 4선 5선 6선 선수는 쌓여 나갈 수 있겠죠. 그런 선수가 쌓이면 뭘 합니까. 잔꾀와 술수로 평가돼 버리면 끝이지. 어릴 때 고등학교 2학년 때 봤던 글귀를 지금까지 잊지 않고 계속 해가고 있어요.

-(최 교수) 그 말의 출처에 대해서는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 

dedanhi@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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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 7·8호-부앙가 23호...환상 '흥부 듀오' [서울=뉴스핌] 박상욱 기자 = 손흥민이 시즌 7·8호골을 연달아 터뜨리며 4경기 연속골을 기록했다. 드니 부앙가도 시즌 23호골을 넣어 '흥부 듀오'는 3골을 합작하며 팀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LAFC 손흥민은 28일(한국시간)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에너자이저 파크에서 열린 2025 MLS 정규리그 서부 콘퍼런스 세인트루이스 시티SC와의 원정 경기에서 3-4-3 포메이션의 원톱 스트라이커로 선발 출전했다. LAFC는 '흥부 듀오'의 활약을 앞세워 3-0으로 완승을 거뒀다. LAFC는 승점 53을 기록하며 서부 콘퍼런스 4위 자리를 유지했다. [세인트루이스 로이터=뉴스핌] 박상욱 기자= 손흥민이 28일(한국시간) MLS 34라운드 세인트루이스 시티 SC와의 원정 경기에서 자신의 첫 번째 골을 넣고 '찰칵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2025.9.28 psoq1337@newspim.com [세인트루이스 로이터=뉴스핌] 박상욱 기자= 손흥민이 28일(한국시간) MLS 34라운드 세인트루이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자신의 첫 번째 골을 넣고 골 셀레브레이션을 하고 있다. 2025.9.28 psoq1337@newspim.com 손흥민은 1-0으로 앞선 전반 추가시간 시즌 7호골을 뽑아냈다. 그는 중원에서 단독 드리블로 페널티박스 왼쪽까지 돌파한 뒤 오른발 슈팅으로 골망을 흔들며 선제골을 기록했다. 후반 15분에는 페널티박스 정면에서 수비수를 앞에 두고 오른발 슈팅으로 시즌 8호골을 추가, 이날 멀티골을 완성했다. 손흥민은 이번 시즌 MLS에서 8경기 만에 8골 3도움을 기록하며, 출전 경기마다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MLS 기록 기준으로 이번 4경기 연속골은 지난 2021년 12월 토트넘 소속으로 EPL 14라운드부터 4경기 연속골을 기록한 이후 약 3년 9개월 만이다. 경기를 중계하던 현지 해설진은 "손흥민과 부앙가는 피할 수 없다(inevitable)"며 두 선수의 뜨거운 활약을 추켜세웠다. [세인트루이스 로이터=뉴스핌] 박상욱 기자= 손흥민이 28일(한국시간) MLS 34라운드 세인트루이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자신의 두 번째 골을 넣고 골 셀레브레이션을 하고 있다. 2025.9.28 psoq1337@newspim.com [세인트루이스 로이터=뉴스핌] 박상욱 기자= 손흥민이 28일(한국시간) MLS 34라운드 세인트루이스 시티 SC와의 원정 경기에서 골을 넣고 부앙가과 손을 마주치고 있다. 2025.9.28 psoq1337@newspim.com 손흥민과 함께 공격을 이끄는 드니 부앙가(31)도 전반 15분 선제골을 터뜨리며 5경기 연속골로 시즌 23골을 기록, 리오넬 메시에 이어 득점 랭킹 2위에 올랏다. 두 선수는 최근 LAFC가 터트린 15골 중 절반 이상을 책임지고 있다. 경기 도중 손흥민과 부앙가는 높이 뛰어올라 하이파이브를 주고받는 세리머니를 펼치며 팀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세인트루이스에서는 정상빈이 왼쪽 날개 공격수로 선발 출전하며 '코리안 더비'가 성사됐다. 정상빈은 전반 2분 수비 뒷공간으로 빠르게 침투하다 LAFC 골키퍼와 충돌하며 경고를 받았지만 경기 내내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는 후반 20분 공격포인트 없이 교체돼 벤치로 돌아갔다. 이날 승리로 LAFC의 스티브 체룬돌로 감독은 2022년 1월 지휘봉을 잡고 나서 통산 100승(36무 9패)째를 달성하는 기쁨을 맛봤다. psoq1337@newspim.com 2025-09-28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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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이 타령'은 광복군의 희로애락"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신개념 국악 방송 '최한이·변상문의 작금작금' 제4편이 26일 종합뉴스통신사 뉴스핌 유튜브 채널 '뉴스핌TV'와 'K스팟(K·SPOT)'을 통해 공개됐다. '최한이·변상문의 작금작금'은 국악이라는 전통 예술 분야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대중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가려는 시도이다. 젊은 국악인들의 시선으로 전통음악을 재해석하고 현대사회 속 국악의 의미를 재조명하며, 소리꾼 최한이와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팝페라 가수 오윤석과 소리꾼 박나현, 김보성, 가야금 병창 박혜정 등이 출연한다. '최한이·변상문의 작금작금'의 제목 속 '작금(昨今)'은 역사적 사건과 역사적 인물 이야기를 국악으로 풀어 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작금(作金)'은 '금을 캐 부자가 된다'는 뜻도 포함돼 있다.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최한이·변상문의 작금작금' 제4편 '광복군'이 공개됐다. 본편은 종합뉴스통신사 뉴스핌TV의 유튜브 채널 '뉴스핌TV'와 'K·SPOT'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맨 왼쪽부터 최한이, 김보성, 변상문. 2025.09.25 alice09@newspim.com 이날 제4편 '광복군'에서는 가야금 병창 박나현과 경기소리꾼 김보성이 함께했다. 4편 '광복군'에서는 의병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변 이사장은 "의병은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후, 1919년 9월 상해 임시정부가 세워질 때까지 개인 신분으로 일제와 싸운 분들"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 광복군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꼐 국군이 됐다"고 부연했다. 당시 독립군이자 광복군 출신으로 초대 국방부 장관을 맡은 사람은 이범석이며, 초대 국방부 차관은 최용덕이 맡았다. 제4편 '광복군'의 시대적 배경은 1944년 겨울이다. 변 이사장은 "평안도 출신 김준엽을 비롯한 1500여 명의 청춘은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20사단에서 4주간 훈련을 받고, 당시 중국군과 전쟁 중인 일본군에 배치됐다. 그런데 이들 중 40여 명이 일본군영을 탈영하게 된다. 대표적 인물이 전 고려대 총장 김준엽, 창작과 비평 출판사를 운영했던 장준하, 임시정부 초대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의 아들 노능서"라고 말했다. 최한이 소리꾼은 장준하의 '돌베개' 책 부분을 읽으며 "흥이 오르자 안익태 씨가 작곡한 애국가를 불랐다. 회식을 주관한 김주임은 사발가를 불렀다"고 말했다. 이어 "여기서 나오는 '사발가'는 1900년대 초부터 1910년 한일병탄 무렵까지 우리 민족의 울분을 노래한 곡"이라고 소개했고, 김보성 소리꾼은 가창을 시작했다.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최한이·변상문의 작금작금' 제4편 '광복군'이 공개됐다. 본편은 종합뉴스통신사 뉴스핌TV의 유튜브 채널 '뉴스핌TV'와 'K·SPOT'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은 김보성 소리꾼. 2025.09.25 alice09@newspim.com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최한이·변상문의 작금작금' 제4편 '광복군'이 공개됐다. 본편은 종합뉴스통신사 뉴스핌TV의 유튜브 채널 '뉴스핌TV'와 'K·SPOT'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은 박나현 가야금 병창. 2025.09.25 alice09@newspim.com 탈영한 이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 중앙육군군관학교를 마치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김구 선생을 만나게 된다. 해당 자리에서 김성근이라는 청년은 '각설이 타령'을 부르게 된다. 박나현 소리꾼은 '품바'라는 가사가 들어간 '광복군 환영가'를 가창했다. 최한이 소리꾼은 이를 들은 후 "지금으로 말하면 타령은 강한 수능금지송이 됐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후 변상문 이사장과 최한이는 오늘의 '금맥'으로 "각설이 타령은 광복군의 희로애락 그 자체였고, 국악은 곧 군악이었다"고 정의를 내렸다. 올해 8월 15일 광복 80주년을 맞아 선보이는 특집 프로그램인 '최한이·변상문의 작금작금' 제1화 '광복'은 총 4개로 나뉘어 방송됐다. 제1편은 '작금', 2편 '김구, 판소리 배우다', 3편 '이승만과 아리랑', 4편 '광복군'이다.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최한이·변상문의 작금작금' 제4편 '광복군'이 공개됐다. 본편은 종합뉴스통신사 뉴스핌TV의 유튜브 채널 '뉴스핌TV'와 'K·SPOT'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맨 왼쪽부터 최한이, 김보성, 변상문. 2025.09.25 alice09@newspim.com 앞서 제1편 '작금'에서는 성악가 오윤석이 참석해 한국 가곡 '선구자'를 가창했다. 변사로 나선 변상문 이사장은 '가곡'에 대해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가곡'을 우리나라 전통 성악곡의 하나로, 피리나 거문고, 해금 따위의 관현악 반주에 맞춰 부르는 노래라고 정의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광복 80주년을 맞이해 뒤죽박죽 돼 있고 뒤섞인 개념을 정리해보고자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가곡은 국악"이라는 답을 힘주어 말했다. 이어 제2편 '김구, 판소리 배우다'에서는 김구 선생이 왜인을 살해한 후 옥중 생활을 하며 만난 조덕근으로부터 시조와 여창 가곡, 남창 가곡, '경기 12잡가', '선유가', 판소리 '적벽가'와 '춘향가'를 배운 내용이 담겼다. 변상문 이사장은 "백범 김구는 판소리 '춘향가'를 배웠고, 판소리 '농부가'와 '갈까부다'를 즐겨 불렀다"고 말했다. 이에 최한이 소리꾼은 "판소리는 원조 K팝"이라고 정의했다. '이승만과 아리랑'이라는 제목의 제3편에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93년 2월 24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연맹 본회의에 참석한 후 식사 자리에서 초대 대통령의 영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난 내용이 담겼다. 이 전 대통령은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아리랑'을 불러줬다. 이에 최한이 소리꾼은 "아리랑은 201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우리의 소리이다. '아리랑'은 한민족 DNA이다. 슬플 때는 발라드로, 기쁠 때는 찬가로, 힘들 때는 떼창으로, 인생사 희로애락의 뮤지컬로 시류를 편승하는 살아있는 맥"이라고 강조했다.   alice09@newspim.com 2025-09-26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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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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