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무도 한심했다. 그동안 바친 시간과 정열. 일요일에 같이 놀러 나가고 싶어하는 가족의 초롱초롱한 눈을 외면한 채, 텅 빈 사무실에 나가 딱딱한 키보드를 두드리던 열병. 그 외롭고 가학적인 전쟁의 전리품인 내 시가, 내 삶이, 망치에 맞은 화병처럼 산산조각 나 버렸다.
급격히 맞은 망치질은 짜릿함을, 이상한 쾌감을 준다. 고름이 단번에 죽 빠져나가는 것 같은 상쾌함도 느꼈다. 하지만 너무도 허탈했다. 기둥 세 개가 뽑힌 초가집이 한 개의 기둥에 의지해 겨우 버티고 있다가, 그 기둥마저 발길에 확 걷어채이는 순간의 기분. 덥석, 나는 무너졌다. 무너지는 순간, 바람결에 이는 풀 향기가 물씬 맡아지기도 했지만, 허무하고 황량했다.
내 초토화된 풀밭 위로 구름 같은 시간들이 흘러갔다. 내 황량한 벌판에, 부도나 명퇴에 몰린 친구, 파경당한 친구, 회사에서 쫒겨나거나 이혼 위기에 처한 불쌍한 얼굴들이 놀러 왔다. 같이 술 퍼마시며, 질탕하게 놀았다.
테헤란로의 술집들, 여의도의 소주방, 노래방, 단란주점, 룸싸롱, 종로 뒷골목, 홍대 앞, 인사동과 대학로의 술집들, 불경기일수록 떠들썩한 심야 포장마차들이 우리들의 질퍽한 축제에 바쳐졌다.
술과 관능에 절은 밤공기. 일탈의 경계를 넘나드는 위험한 허무주의. 단숨에 들이마시는 소주, 폭탄주. 지글지글 타는 연탄불 위의 삼겹살. 실패한 놈들의 가슴팍 속을 흐르는 붉은 액체성의 대화. 추운 밤, 하얀 입김 토해 내며 소주잔 부딪치는 후끈한 정경들. 자기 안의 찰진 진흙을 파 먼 시간의 하류로 싣고 흘러가는 서러운 강물의 몸짓들. 흔들리는 풍경....
혁과 함께 자주 어울리던 친구가 있는데 그는 해외를 많이 떠돌고 있었다. 혁과 만날 때도 그 녀석 얘기를 하곤 했다. 하루는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혁을 동참시키려고 전화를 했지만 지방에 일이 있다고 가 있었다.
종로의 술집에서 그를 만났는데 만나자마자 분위기가 심각했다. 부도 직전이라면서 그는 올 때부터 이미 취해 있었다.
동남아를 돌아다니며 보석 원석을 수입해 팔고 있는 녀석이었다. 미얀마, 태국, 라오스, 네팔, 부탄, 인도, 티벳........그가 수시로 드나드는 오지에서의 무용담은 객장이나 네트워크 마케팅에서 허덕이는 나를 일시적으로나마 해방시켜 주곤 했다. 뭔가 시원한 바람이 광야의 저쪽에서 불어오는 상쾌함을 느꼈었다.
그런데 그날은 몹시 피곤했던지 소주 몇 잔 마시더니, 취해 비틀거리다가 그만 길바닥에 누워버렸다. 쌀쌀한 초겨울, 이런저런 얘기를 주절거리다가 구두를 벗어 머리맡에 놓고는, 씩 웃더니 누워버린 것이다.
그 순간 그에게서, 왜 아련한 향수가 맡아졌을까. 녀석이 씩 웃으며 눕는 모습은, 중학교 시절 석유 냄새나는 교동집 내 방에 놀러 와 이런저런 미래의 꿈을 이야기하다가 스르르 잠들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그 시절 녀석의 꿈은 정치가였었다. 훌륭한 정치가가 되어 사회를 바로잡겠다며 큰 소리를 치곤 했다. 그후 사업가로 변신하면서 그 꿈은 버려진지 오래되었지만 순수한 꿈을 꾸며 잠에 빠지던 이십 년 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나는 쓰러져 잠든 녀석의 몸을 잠바를 벗어 덮어주었다.
곁에 가만 앉아 바라보다가, 주위를 서성거렸다. 1998년 11월의 새벽 3시.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도시도 텅 비었다. 술에 취해 잠에 떨어진 그와, 지그시 바라보는 나. 둘뿐이었다. 일어서서 멀찌감치 떨어져 녀석을 바라보았다. 영락없는 거지였다. 거지구나, 아, 내 친구가 거지구나. 나도 그 곁에서 거지가 되고 있었다. 하얀 눈이 조금씩 날리고 있었다.
아프다면 아프고 값지다면 값진 그런 감정의 진액들이 내 무너진 가슴속으로 주저 없이 흘러 들어왔다. 끈적끈적하고 푸근한 삶의 농축된 진액들. 인류의 대다수가 생존의 떨림을 적시는, 안쓰러운 안위감의 액체. 민다나오. 부패와 가난, 전운과 모색이 뒤섞인 식민지 풍의 아름다운 그 섬에서, 네팔의 아리따운 처녀가 네팔 여성들의 슬픈 현실을 토로하며 울먹일 때, 그녀의 목젖을 적시며 흘러나온 물기도 이곳에 닿아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