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다음과 같은 불경스런 문장.
배가 고파서,
내 위장을 먹었다
이젠
배 안 고프겠지
시가 아니었다. 더 이상 시라 할 수 없는 것들, 정신의 검은 물감들이 내 깨진 가슴속에서 흘러나왔다. 그렇지만 이런 문장들이 나는 너무도 좋았다. 그것들이 솟구칠 때마다 이상한 전율이 피 속에 돌았다. 갈 데까지 가야 얻을 수 있는 그 무엇. 모든 것을 탕진해야 그 탕진의 바닥을 깨고 불끈 솟아오르는 뻘건 불길. 드디어 내가 깨져서 시를 얻었구나 하는 고감도의 흥분 속에, 이런 검은 물감의 문장들을 폐허의 하수 깊은 곳에서 정신없이 길어 올렸다.
그것은 죽음의 고름이었는지도 모른다. 환자가 자기의 고름을 보고 더러움을 못 느끼듯, 나 역시 죽음의 환자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처란, 소외란, 한이란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가.
“그래도 자기에겐 시가 있잖아!”
나도 외롭다고 하자, 아내는 즉각 쏘아붙였다. 아찔했다. 그 말은, 우리가 괜히 네트워크 마케팅에 뛰어들어 가진 것 다 날리고 아파트도 결국은 은행에 잡혀 들어갔을 때, 집마저 날린 동료사업자가 “그래도 당신은 팔 집이라도 있잖아”라고 할 때와 비슷한 불쾌감을 주었다.
그리고 그 말은, 고교 시절 눅눅한 집안 분위기에 화가 솟구칠 때마다 마루 기둥을 쳐 주먹에서 피가 흘렀다고 말했을 때, 자기 집은 불에 타 주먹으로 칠 기둥마저 없었다던 혁의 씁쓸한 웃음과도 통해 있었다.
나에겐 시가 있다고? 아내에겐 아무 것도 없는데, 나는 문학이 있다고? 문학이 뭔데. 이게 자아발견이야? 정체성, 자아실현, 구원이야? 뭐야? 아예 없는 것보다, 있어서 괴로운 게 문학인지도 몰라. 버릴 수도 없고, 버려지지도 않고.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고. 그러잖아도 바쁜 내 몸속에 덩그라니 들어앉아 주인 행세 하고. 돈도 안 되고, 돈 벌러 나가야 하는 사람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지고. 문학을 통해 즐거움보다는 더 큰 혼돈, 걷잡을 수 없는 허무의 인력으로 무작정 끌고 가는, 이 대책 없는 물건이 그렇게 커 보였어? 그렇지만 이 같은 탄식 아닌 탄식은 아내의 깊은 병에는 한낱 핑계요, 사치일 뿐이었다.
아내의 상처는 그토록 깊이 박혀 있었다. 내 시적 정신이 그토록 어지럽고 치열하게 달려와 닿아가는 곳. 청춘 시절 선연한 아픔의 감성들. 아픔에 물들기 전, 하얀 솜사탕 같은 감성들. 그 모든 것들이 이상한 용광로 안에서 뿌리 채 녹아 휘발되어 버린 후 그 잃어버린 길을 다시 가까스로 찾아가는 내 외로운 빛깔의 시들. 그 많은 굴곡과 덤불, 객장의 아수라 소음을 뚫고나와 겨우겨우 닿아가는 곳. 그곳에서 지하 깊숙히 박힌 나무들의 생뿌리를, 물을 처음 빨아들이는 그 보드란 결을 단지 내 손으로 보듬어 보려는 것뿐인데, 아내의 고독은 그 뿌리보다 더 깊은 곳, 그러한 뿌리로는 닿을 수 없는 까마득한 곳, 깜깜한 지하 동토에 버림받듯 처박혀 있었다.
아내를 끝없는 질주 속으로 매몰시킨 것은 그것인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