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전에 우리 집과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발길이 끊기고, 아버지가 거의 말을 잃다시피한 함묵의 세월을 살아야 했는지도.....그러나 증조부의 삶과 죽음이 내겐 너무도 감동적이어서, 어머니의 의도대로 정신을 차리는 게 아니라 더욱 증조부와 밀착된 삶을 희구하게 되었다. 이단 종교의 전도사가 되어 개척교회를 세우는데 전력하던 시기에도 내내 증조부를 생각했다. 내가 드디어 그의 삶과 하나가 되고, 그가 못 다하고 죽은 한을 풀 것이라고. 진실된 마음으로 이런 기도를 속으로 수없이 했다.
“증조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그 시대에 청주에 초대 교회 운동에 몸을 불살랐듯, 이제 제가 청주에, 이 시대에 떨어진 불 같은 진리로, 새로운 첫 교회를 세웁니다. 청주는 제가 구원하겠습니다. 저에게 이런 사명을 내려주신 것도 할아버지의 음덕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이제 끝났습니다. 할아버지가 믿고 실천하셨던 모든 것들, 당대의 가장 진보적이며 혁신적인 사상들, 그 사상들의 그 어떤 통합된 덩어리들, 그 전체가 완전히 끝나버렸습니다. 이 시대에 떨어진 진리의 불, 전혀 새로운, 듣도 보도 못한 기이한 진리 체계로 모든 것이 뒤바뀝니다. 인류 역사상 중요한 때마다 그래왔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할아버지, 걱정하지 마시고, 지켜봐 주세요”
이천 년 전, 유대교만을 절대적인 진리로 떠받드는 수만의 군중들 한복판에서
“유대교는 끝장 났습니다. 새로운 진리가 선포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무지로 인해, 여러분의 고정관념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 여러분이 살해한 예수, 그가 바로 여러분이 그토록 갈망하며 기다리던 메시야입니다. 여러분이 살해한 청년이 바로 여러분의 구원주, 세상의 구세주입니다. 당신이 죽인 것만이 당신의 희망입니다.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나도 여러분처럼 예수를 핍박했으나 그것이 무지였음을 깨닫고 난 후의 지금, 너무도 애절하고 간곡하며 절실한 심정으로 외칩니다. 당신들이 죽인 것이 당신들이 희망이며 구원입니다. 세상은 그토록 아프며 부조리하지만 그것만이 진실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입니다” 라고 목숨을 내걸고 외치다 짱돌에 맞으며 끌려간 사도 바울과 똑같은 심정으로.
피로 쓴 증조부의 친필 유서. 교동집의 장롱 속, 오십 년 동안이나 깊은 침묵 속에 잠들어있던 그것.
나의 증조부. 사상가로서, 만민사해주의를 향한 고결한 대의의 빛을 칼처럼 품고 시대의 어둠 속을 온몸으로 앞질러갔던 그. 망국으로 향하는 조선조 말에 태어나, 암울한 일제 식민지를 겪고, 해방과 더불어 분단, 그리고 전쟁. 그 더러운 전쟁의 한복판에 서있던 그.
원래 하나이던 땅이 남들의 손에 의해 둘로 갈라져 북한군이 쳐들어오고, 남한군이 부산까지 밀리고, 유엔군이 인천으로 기습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유엔 남한 합동군의 기세가 강해져 북으로 진격하던 그 시기. 나의 증조부는 충북 진천에 있었다. 진천 이남 지역들 곳곳에선 느닷없이 위아래가 막혀 갈 곳이 없어지는 바람에 빨치산들이 준동하던 시기였다.
남한군이 진천을 진격해 오기 직전, 증조부는 자기가 추구해온 이상세계의 몰락을 감지한다. 자기의 삶으로 인해 사상 문제로 받을 가족의 박해가 염려되는 것을 포함해 복잡하고 절박한 심경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자기 한 몸을 없애는 것이 그나마 피해를 줄일 것으로 생각도 했음직 하다. 다음과 같은 뜨거운 글 한 장을 남기고 고향 뒷산 나무에 목을 메려고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