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리맨의 신화' 조정남 SK텔레콤 부회장이 물러났다. 24일 퇴임식을 가진 조 부회장은 "조직이나 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꿈'"이라고 강조하면서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며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로 어려움을 딛고 일어설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42년간 샐러리맨 생활이 신화에 비유된다. 어쩌면 샐러리맨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평생 이루고 싶은 '꿈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싶다.
조 부회장의 42년간의 샐러리맨 생활은 SK그룹 계열사 임직원은 물론이고 재계와 업계에서도 사원에서 부회장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조 부회장은 지난 1941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고를 거쳐 1967년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 졸업한 뒤 SK에너지의 전신인 유공에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조 부회장이 입사한 유공이 지난 1980년 SK그룹으로 인수되면서 SK맨의 일원으로 앞만보고 달려왔다.
SK그룹의 일원이 된 조 부회장은 그룹성장 축인 에너지부문에서 입지를 강하게 굳히게 된다. 이후 조 부회장은 이동통신시장이 태동기인 95년 한국이동통신(현재 SK텔레콤) 전무이사로 선임되면서 또다시 새로운 인생에 도전하게 한다. 그동안 에너지부문에서 잔뼈가 굵은 그가 다시 이동통신이라는 낮설은 환경에 직면한 것이다.
90년 중후반 당시만해도 국내 이동통신시장은 이제 걸음마를 시작하는 초창기였다. 이동통신시장 자체가 초기다보니 전문경영인력도 턱 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시장예측도 불확실성으로 가득했다. 이런 가운데 SK그룹은 1998년 조 부회장을 SK텔레콤 대표이사 사장으로 선임하며 에너지와 동반성장축으로 통신사업을 택하고 힘을 모은다.
SK그룹의 이같은 결정 뒤에는 에너지 한 분야의 외길인생으로 걸어온 것 처럼 비춰졌던 조 부회장이 앞선 시험대인 CDMA 상용화에 적잖은 실력이 인정됐다는 후문이다.
세계최초라는 이름 뒤에 개발에 따른 막대한 리스크도 같이 짊어져야 했던 CDMA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끈 일등 공신이 바로 SK텔레콤 조 부회장이기 때문이다.
지난 1966년부터 줄곧 석유화학회사에서 일하던 조 부회장이 이동통신사업에 본격 참여한 것은 지난 1995년 SK㈜(현 SK에너지)에서 SK텔레콤 전무로 자리를 옮겨 서비스 생산부문장을 맡으면서 부터이다.
막바지 개발 작업이 한창이던 CDMA 시스템을 안정화시켜 상용 서비스가 가능한 수준으로 향상시켜야 하는 과제가 그의 앞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선진국 어디에서도 상용화되지 않은 원천기술을 도입해 디지털 셀룰러 이동전화 시스템을 구현해내는 전인미답의 영역이었다. 아날로그 이동통신 기술기반조차 제대로 갖지 못했던 우리나라에서 디지털 장비와 단말기를 세계최초로 개발하는 일은 누구도 자신하지 못하는 대모험이었다. 더욱이 조정남 부회장이 서비스생산본부장을 맡을 당시 CDMA 시스템 개발은 오랜 산고를 계속하고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1994년 11월 세계최초로 CDMA 방식 시스템 운용시험까지는 마쳤으나 상용화까지는 교환기와 단말기개발, 기지국 최적화, 교환시스템구축 등 남은 과제가 산적한 상태였다.
일례로 기지국 최적화 작업만 하더라도 기존 기지국 서비스를 중단한 상태에서 시스템을 점검하려면 매일 밤 10시부터 새벽6시까지만 작업을 수행하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특히 미국 통신회사 GTE의 엔지니어 30여명과 SK텔레콤 엔지니어 50여명이 함께 철야작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언어와 문화의 차이가 가져오는 장애마저 겹쳐 있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업체들간의 원만한 협력을 이끌어내고 개발자들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한 인물이 바로 조 부회장인 것이다.
SK텔레콤 한 관계자는 "조 부회장은 세계최초 상용화를 이뤄낸 CDMA 프로젝트 개발에 따른 막대한 리스크도 함께 짊어져야 했다"며 "당시 조 부회장의 역할은 다양한 악기가 모여 웅장한 교양곡을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연상할 만큼 결정적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조 부회장은 2002년 신세계통신과 합병을 주도하며 사실상 SK텔레콤을 국내 최고의 통신업체로 입지를 굳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