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린스펀의 유산과 ‘그린스펀 스탠더드’
(1) 그린스펀의 ‘블랙 박스’를 열어라
② 그린스펀 스탠더드의 쟁점과 취약점
이 외에 블라인더와 라이스 교수는 별도의 세 가지 쟁점에 대해 관심을 환기시킨다. 이는 (1) 생산성 추세 급변 (2) 글로벌 금융 안정에 대한 연준의 책임 (3) 금융시장 버블 등으로, 이들 문제에 대한 중앙은행의 대처 방식과 관련한 그린스펀의 지적, 실천적 기여를 다룬다.
첫 번째 생산성 문제와 관련해서는 무엇보다 공식 데이터의 한계, 혹은 데이터의 부조화에 주목했던 그린스펀의 태도가 초점이다.
사실 그린스펀의 탁월한 능력 중 하나로 많은 전문가들은 그의 뛰어난 데이터 장악력에 주목한다. 1990년대 중반 그 누구보다도 먼저 그린스펀이 미국의 생산성 혁명을 포착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것이 자연실업률 혹은 NAIRU(물가안정실업률)에 미치는 발본적인 함의를 그린스펀이 이해했다는 점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특히 실업률이 당시 NAIRU로 간주되던 수준 6%를 한참 하회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생산성 혁신에 힘입어 인플레 압력이 억제될 수 있었다는 점 말이다. 블라인더와 라이스는 이것이야 말로 중요한 교훈 중 하나라고 역설한다.
두 번째 글로벌 금융 안정에 대한 책임과 관련해서는, 먼저 연준이 “글로벌 금융 시스템에서 800파운드 고릴라”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따라서 연준이 통화정책을 결정할 때, 단순한 국제적 협력 차원 이상으로 아예 다른 국가들의 여건을 적극 반영해야 하는가?
사실 이런 고민은 이미 볼커 시대부터 1980~90년대 각종 신흥시장 위기를 거치며 쟁점화돼 왔다. 하지만 아시아 외환 위기까지만 해도 연준의 역할은 대부분 기술적이고 자문적인 수준에 그쳤고, 대신 ‘글로벌 금융 안정의 파수꾼’ 국제통화기금(IMF)과 미국 재무부가 위기 치유를 주도했다.
다만 1998년 러시아 디폴트 사태와 LTCM 부도 위기는 달랐는데, 연준이 직접 사태 수습에 나선 것이다. 특히 1998년 9월의 금리인하는 “세상을 구한 0.25%포인트 금리인하”라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물론 이런 글로벌 책임은 상당히 미묘한 문제다. 실제로 이는 연준의 법적 임무가 아니며, 그린스펀도 애초 처음 금리인하에 나설 때만 해도 미국 경제에 미칠 반향을 경계한 것이라고 지적하며 이를 부인하는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정작 미국 경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이내 그린스펀은 “지금처럼 긴장감이 감도는 세계 경제에서 미국이 번영의 오아시스로 남아 있을 수 없다”고 역설했다.
그렇다면 과연 연준이 이제 “세계의 중앙은행” 역할을 맡아야 하는 것인가? 다시 말해 이제 연준의 임무에 대해 “글로벌 경제 및 금융 안정을 부양해야 한다”는 문구를 넣어야 하는가? 그러나 “이 문제는 아직 그린스펀도 풀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버블에 대한 대응 문제와 관련해, 블라인더와 라이스는 최근 미국 내외에서 일고 있는 그린스펀의 (90년대 주식시장) ‘버블 방조론’ 내지는 (주식시장 버블 붕괴에 대응해 초저금리 기조로 채권 혹은 주택 버블을 부양했다는) ‘이중 버블론’이 자칫 그린스펀의 성과를 무위로 되돌릴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들은 그린스펀 비판론, 그리고 ‘버블 터트리기 혹은 역풍’ 전략의 논거부터 검토한다. 하지만 이들은 통화정책이 간접적으로는 버블에 대응해야 한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자산 가격을 직접 타겟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중앙은행이 시장에 앞서 버블을 사전에 식별할 수 있다고 보기 힘들고, 또 통화정책 상으로 버블 해소에 적절한 수단이 없다는 이유다. 사실 이런 시각은 버냉키를 포함해 연준 내 주류 시각과 부합한다. 그리고 이들은 버블 자체 보다는 버블 붕괴 이후 그 여파를 최소화하고 신속히 정리하는 데 초점을 맞춘 이른바 “사후 청소”(mop up after) 전략을 아예 그린스펀의 유산으로 정리한다.
블라인더와 라이스는 그린스펀이 ‘신경제의 치어리더’ 역할을 맡은 점은 인정하지만, 생산성 혁신을 감안할 때 그가 비합리적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평가한다.
게다가 그린스펀 시대 연준이 주가 하락 저지에 부심했다는 이른바 “그린스펀 풋”을 둘러싼 비판에 대해서도 “주식시장에 대한 풋옵션”과 “경제에 대한 풋옵션”을 구분해야 하며, 여기서 후자의 의미, 즉 ‘거시경제적 인지 리스크의 감소’는 사실 바람직한 것이라고 역설한다. 반면 주식시장에 대한 풋옵션, 즉 주가 상승과 하락에 대해 비대칭적인 태도를 연준이 취하지는 않았다고 반박한다.
그 외에 블라인더와 라이스는 그린스펀의 취약점 두 가지에도 주목한다.
먼저, ‘통화정책 외의 문제 혹은 정치에 대한 과도한 개입’이다.
사실 오랜 세월 연준의 ‘성공’을 주관하면서 그의 평판이 고조돼 왔고, 따라서 미국의 ‘구루’(guru)로서 그에 대한 줄서기나 혹은 스스로 이런 위상을 자임하려는 유혹이 이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또 궁극적으로 보자면, 이른바 ‘물가 수준의 재정 이론’에서 볼 수 있듯,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이 전적으로 분리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들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양방향적인 것이라고 지적하며, “중앙은행이 정부로부터 독립적일 뿐만 아니라 정부에 대해서도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자칫 정치권의 역공도 가능하다는 것. “정치게임의 마스터” 그린스펀은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린스펀의 또 다른 약점은 ‘통화정책의 극단적인 개인화’다. 실제로 그린스펀 시대에는 그린스펀과 연준이 아예 동일시될 정도의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는 결국 세 가지 우려를 노정하게 된다는 게 이들의 진단이다. 우선, 그의 공백에 따른 시장의 깊은 상흔이 바로 그것인데, 그러나 이는 과거 볼커 퇴임시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내 극복된 바 있고, 지금도 어느 정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둘째는 한 개인의 탁월한 자질에 집중된 성과를 제도화하는 측면에서의 난점이다. 그나마 이 글이 그 실마리를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FOMC ‘원맨쇼’ 자체의 문제점을 들 수 있다. 이는 결국 위원회와 같은 그룹 의사결정이 지니는 장점들을 포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얘기.
[뉴스핌 장보형 객원이코노미스트]
※본 특집의 저자인 장보형은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와 한신대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지난 10여년간 국내 정보컨설팅 업체인 와이즈 인포넷에서 '국제금융/경제 팀장'을 맡아 국제 금융시장과 세계 경제 동향 점검 및 이슈 분석을 전담한 후, 현재는 '글로벌 마켓 이코노미스트'로서 프리랜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올해부터 뉴스핌 객원 이코노미스트로 합류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