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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D 폴리티션 스토리] (상) 박지원 "지금 82세지만 나는 여전히 꿈을 향해 간다"

기사입력 : 2024년12월03일 07:21

최종수정 : 2025년01월07일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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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웠던 김대중 선생 만나자마자 큰 절"
청년에게도 조언 "현실 어려워도 노력하면 잘 될 것"

[서울=뉴스핌] 채송무 기자 = 박지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정치인의 인생 여정을 돌아보는 뉴스핌TV '폴리티션 스토리'에 출연해 어머니와 김대중 전 대통령 등 잊지 못할 인연들과 자신의 정치 철학에 대해 입장을 밝혔다.

박 의원은 당시 사형 선고 후 미국으로 망명한 김대중 대통령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뉴욕한인회장이었던 박 의원은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 씨와 친분이 있을 정도로 집권 여당과도 인연이 있었지만, 김 전 대통령을 선택했다.

박 의원은 뉴스핌TV 폴리티션스토리에서 미국에서 김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했다. "내가 잘못 살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김대중 선생에게 큰 절을 올렸다"며 "선생님, 제가 잘못 산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민주화를 위해서 벽돌 한 장이라도 놓는 그런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고 했다고 소개했다.

이후 박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오랜 기간 측근으로서 곁을 지켰다. 김 전 대통령의 용인술은 위기 때 측근을 불러 해결하고, 위기가 지나가면 측근들을 멀리하는 것이었지만, 박 의원은 한 번도 곁을 떠난 적이 없다.

박 의원은 그 비결에 대해 '모든 일에 영혼을 바쳐서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모든 일에 자기의 영혼을 바쳐서 해야 상대방이 미동을 하지 내가 쇼를 하면 이미 상대방은 안다. 그래서 혼을 바쳐서 해야 한다"라며 "그런 것을 중시했다"고 설명했다.

박 의원은 이날 현재 어려운 청년들에게도 당부와 격려의 말을 전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긍정적으로 생각한 결과가 이뤄졌다"며 "사회적인 성공과 실패의 개념이 아니라 내가 성취하고 싶은 것들로 가고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82세이지만 저는 한번도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루에 2시간씩 걸으면서 그 꿈을 향해 가고 있다"며 "청년들이 궁색하게 생각하지 말고 현실이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잘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042년 6월 5일 전라남도 진도 출생으로 광주 교육대학과 단국대학교 상학을 졸업했다. 14대 민주당 국회의원으로 시작해 국민회의 대변인, 국민회의 총재특별보좌역, 김대중 대통령당선자 대변인, 대통령 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 제2대 문화관광부 장관, 대통령비서실 실장 등 김대중 정부에서 화려한 이력을 자랑했다.

이후에 18대·19대·20대 국회의원을 지낸 후 문재인 정부에서 국가정보원 원장을 역임하고 다시 전남 해남군완도군진도군에서 22대 국회의원으로 돌아왔다. 현재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서울=뉴스핌] 채송무 기자 = 박지원 더불어민주당 의원 2024.12.02 dedanhi@newspim.com

 다음은 박 의원과의 폴리티션 스토리 인터뷰 전문이다.

-(채송무 정치부 기자, 이하 채 기자)정치인의 미래와 과거, 현재를 전부 아우르는 폴리티션스토리 진행을 맡은 뉴스핌 정치부의 채송무 기자입니다. 옆에는 함께 진행을 맡아주실 스웨덴 린네대의 최연혁 교수님 모셨습니다. 오늘은 박지원 의원님 모시고 정치 역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의원님은 오랜 기간 민주당 내에서 전략적 사고와 성실함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야당 원내대표를 하실 때 여당에서는 굉장히 괴로워하면서도 타협할 수 있는 원내대표라고 높이 평가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같은 성실함이나 전략적 사고는 어린 시절부터 있어왔을 것인데 어떤 소년이셨습니까.

▲(박지원 의원, 이하 박 의원) 그렇게 칭찬을 받으니까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저희 아버님이 독립지사니까 그런 피가 있겠죠. 그런데 진도에서 저희 집안이 늘 국회의원을 나가고 도의을 나가니까 주위에서 그런 것을 보고 자라 '국회의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중고등학교 다닐 때 김영삼 원내총무가 펄펄 날라 다녔잖아요. 그래서 '나는 야당 총무를 꼭 한번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가 고등학교 때 별명이 야당 총무였습니다.

-(최연혁 교수, 이하 최 교수) 진도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박 의원) 진도는 유배지로 장흥군과 진도군이 대표적입니다. 그래서 저희도 유배된 이들의 후손으로 살았기 때문에 훌륭한 학자들이 많이 진도로 유배 와서 교육을 시켰기 때문에 한국화, 서예, 특히 국악에 대해 분위기가 아주 좋은, 가난하면서도 평화로운 그런 섬이죠.

-(최 교수) 그 당시 정치적인 현안은 무엇이었을까요.

▲(박 의원) 저희 어머님이 말씀하시기를 이승만 대통령이 처음으로 진도를 오셨대요. 어머님이 여성 대표로 이승만 대통령과 악수를 했다고. 어렸을 때 그것이 기억나요. "손을 명주로 싸가지고 있어야 되겠다"고. 대통령과 악수했다고. 대통령이 상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치적 이념은 없었어요. 단 우리 집안에서 정치를 하겠다고 하는 인척, 형님, 아저씨들이 다 민주당을 했어요. 자유당을 하지 않고. 그래서 늘 저항정신은 갖고 있었지만, 제가 어려서 민주당이 무엇인지, 자유당이 무엇인지 모르고 '무조건 국회의원을 한번 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갖고 나갔죠.

-(채 기자) 아버님이 독립투사셨던 집안 분위기도 있지만, 가장 어린 시절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어머니셨을 것 같은데, 어머니에 대한 가장 큰 기억은 무엇입니까.

▲(박 의원) 어머니는 저에게 모든 것이었죠. 누구나 그렇잖아요. 자기 어머니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우리 집이 가난하지도 않고 부자지도 않고. 그냥 밥술깨나 먹는 집안으로 정미소를 했는데 베푸는, 나누는 삶을 살도록 말씀을 하셨고 실제로 어머님이 그렇게 하셨어요. "남에게 충분하게 주는 사람이 돼라"고 했던 말씀이 기억으로 남아있고 그것이 좋은 교훈을 준 기억이 있어요. 정치를 하면 우리 국민들이 평화롭고 잘 사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고, 엊그제 대전 독립지사 묘역에서 아버지, 어머니께 인사 드리고 조카들, 손주들이 모인 자리에서 "모든 것을 함께 나누어 갖는 공동체 의식을 강조한 분이기 때문에 혼자 소유하려고 하지 말고 나누어 갖으려는 생각을 가져라"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최 의원) 의원님을 보면 인연이라는 것은 선택과 자신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지 우연히 찾아오는 것은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한국의 진도에 있다가 미국으로 가셨습니다. 과정을 말해주시죠

▲(박 의원) 제가 LG에 들어갔었어요. 그런데 저희 큰 형님이 회사에서 미국으로 가셨어요. 그래서 미국에 가서 형님 회사에 잠시 있다가 나와서 독립을 해가지고 저는 진짜 모든 일을 열심히 해요. 치열하게, 그래서 어느 정도 성공을 했죠. 그러니까 "너는 장사할 사람이 아니다. 정치를 해라"고 해요. 저는 긍정적·진보적·진취적으로 생각한 결과가 이뤄졌다고 생각해요. 이룬 것이 사회적으로 성공, 실패 이런 개념이 아니라 내가 성취하고 싶은 것들로 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82세이지만 한 번도 제가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을 하지 않고 하루에 2시간씩 걸으면서 그 꿈을 향해 가고 있어요. 청년들 좀 궁색하게 생각 하지 말고 현실이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잘 되는 것 아니에요?

-(채 기자) 의원님의 정치 역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이 김대중 대통령입니다. 미국에 가서 성공한 사업가가 돼 당시 민정당 쪽과도 친했는데, 김대중 대통령은 탄압받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김대중 대통령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박 의원) 제가 전두환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 씨와 아주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미주지역 총연합회장을 하고 있는데 전경환 씨가 왔더라고요. 그 분의 형님이 그렇게 높은 사람인지는 처음에는 몰랐죠. 전두환 대통령이 뉴욕을 방문하는데 뉴욕 한인회장 자격으로 환영위원장을 했어요. 이후 전경환 씨가 굉장히 잘해주려고 했어요. 한국에서 큰 이권을 주어서 제가 나왔어요. 나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제가 언젠가는 정치를 하고 싶은데 내가 이것을 하면 족쇄가 될 것 같아요. 독재자에게 이득을 보게 되면 족쇄가 되지 않냐, 그래서 큰 형님에게 전화를 했어요. "형님, 아무래도 내가 이것을 안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앞으로 족쇄가 될 것 같습니다" 했더니 큰 형님도 "하지 마라" 그래서 그 다음날 안했어요.

김대중 대통령은 당시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계시다가 석방이 됐잖아요. 그래서 미국으로 오신 거에요. 저만 안 갔죠. 왜냐면 전두환 쪽과 관계가 있으니까. 그런데 도저히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해 친구의 소개로 김대중 대통령을 찾아갔어요. 제가 찾아간다고 했더니 사람들이 많이 오는데 일체 집을 비우고 혼자 계시더라고요. '내가 잘못 살았구나'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앉아계신 김대중 선생께 큰 절을 올렸어요.

울면서 "선생님, 제가 잘못 산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민주화를 위해서 벽돌 한 장이라도 놓는 그런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했더니 저보고 일어서라고 하더라고요. "박지원 회장이 전두환 대통령 환영식을 했다고 해서 부담을 갖지 마라. 당연히 전두환 대통령을 환영한 것이 아니라 미주지역 총연합회 회장으로 환영한 것이니까 괜찮다" 그리고 저에게 큰 감동을 준 것이 "박 회장은 이미 대한민국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박 회장이 수입해 오는 한국 물품 때문에 한국 노동자들이 고용돼서 소득을 올리고, 우리 경제에 도움을 주고 있지 않나"라면서 "나를 좀 도와줘라". 그래서 그때부터 저는 밀사 역할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김 대통령은 편지가 다 검열되거든요. 저한테 써주면 제가 가지고 가서 한국에서 나눠드리고 답장 받아오고. 당시에는 김대중 선생이 정치를 한다, 앞으로 재기해서 대통령 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할 때에요. 그런 인연으로 김대중 대통령을 모시게 됐습니다.

-(채 기자) 이후에도 대통령 대선 패배와 정계 은퇴, 그리고 복귀해서 대통령이 되기까지 오랜 기간을 함께 하셨고, 김대중 정부의 문화관광부 장관과 대통령 비서실장 등 실세 역할을 하셨습니다. 또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옥고를 치르기도 하셨는데, 김대중 정부를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박 의원) 먼저 13대 국회 때 김대중 총재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비례대표를 해라' 당시에는 당에 공식적으로 돈을 내던 세상입니다. '얼마를 갖다가 총무원장을 하시던 최영근 의원. 울산 국회의원을 했었던 그 분에게 드려라' 했는데 준비를 했어요. 그런데 제가 미국 동부고, 서부도 있으니까 이런 것으로 해서 밀려서 안됐어요. 저는 돌아가는데 김대중 총재님이 굉장히 아쉬워하셨어요. 이후 제가 김대중 총재님이 만들었던 미국 인권문제연구소를 이영작 박사, 유종근 박사하고 같이 해왔었어요. 그러다가 14대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됐어요.

선거 끝나고 미국 집에 가 있는데 (김 전 대통령이) 전화를 주셨더라고요. 전화를 주셔서 '수석부대변인을 맡아라'. 이때는 이기택 총재가 통합을 해서 이기택 총재의 꼬마 민주당 분들은 국민을 상대하는 원내대표, 대변인을 맡고, 소위 김대중계, 동교동계는 사무총장, 정책위의장을 맡았어요. 저는 깜짝 놀랐어요. 그때 권노갑·김옥두, 동교동 선배들이 제가 좀 인상이 좋았나봐요. 그래서 '인상이 좋은 박지원이 옆에서 모시고 다녔으면 좋겠다'고 해서 수석부대변인을 맡았는데, 이기택 총재 계열의 장석화 의원이 대변인, 제가 수석부대변인. 물론 장석화 의원은 재선 의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뉴스는 김대중 총재에게서 나오잖아요. 이기택 총재는 별로 말씀을 안하시니까. 그러다 보니 사실상 제가 대변인을 했어요. 매일 새벽 6시에 가서 대통령님과 이야기를 했어요.

사실 민주당은 김대중 후보가 낙선을 하더라도 실망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또 4년 있다가 김대중이 있다. 그러니까 뭉치자. 싸우자, 이기자. 이 생각을 갖고 했죠. 마지막 떨어졌을 때는 영국으로 가셨지만 소위 강창성, 문희상, 박지원을 이기택 총재에게 보냈어요. 저는 거기서도 대변인을 했는데,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 민주당은, 동교동은, 호남은 '우리에게는 대통령 후보 김대중이 있다. 그래서 뭉치고 싸워서 이기자'는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에 저도 그 세력 중 하나고, 가장 측근으로 옆 자리에서 모셨어요.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의 의사를 보면 위기가 오면 동교동계 측근, 소위 가신들을 불러서 위기 극복을 하고, 극복이 되면 다시 이분들을 멀리 떼요. 공전하게 하는 거죠. 그런데 저만 1992년부터 서거하시기 전까지 한 번도 옆에서 떨어져 본적이 없어요.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열심히 한 것 뿐이에요. 혹자는 '박지원이 대학에서 노인심리학을 전공해서 아부를 잘한다'. 저도 많은 모략을 받죠. 그럴 때마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해요. "천하의 김대중이 누구나 아부는 한 두 달 하면 다 나타난다. 모든 일에 자기의 영혼, 혼을 바쳐서 해야 상대방이 미동을 하지 내가 쇼를 하면 이미 상대방은 안다. 그래서 혼을 바쳐서 일해야 한다". 그런 것을 저는 중시했다고 봐요. 우리 민주당은 김대중과 함께 뭉쳤다. 싸웠고, 언젠가는 이긴다는 신념으로 치열하게 했기 때문에 국민들이 지지해서 대통령이 됐고 오늘날의 IT 강국, 생산적 복지, 노벨평화상,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정상회담을 이뤘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편에서 계속>

dedanhi@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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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문의 화랑담배] 제2회 광복군 변상문의 '화랑담배'는 6·25전쟁 이야기이다. 6·25전쟁 때 희생된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고, 그 위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제목을 '화랑담배'로 정했다.  1940년 9월 17일 중국 중경 가릉호텔에서 성대한 행사가 열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창설식이었다. 미국 한인 동포들이 보내온 돈 4만원으로 조직한 군대였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20억 원 정도 된다.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 참모장 이범석 장군, 제1지대장 이준식, 제2지대장 고운기, 제3지대장 김학규, 제5지대장에 나월환을 임명했다. 지대장은 지금의 사단장에 해당한다. 모두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를 비롯하여 남북 만주에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에 직접 참여하여 활동한 독립군 출신이었다. 한국광복군 훈련반 제1기 졸업사진. [사진= 독립기념관]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포고문을 통해 "국내외 동포들에게 알립니다. 1940년 9월 17일부로 대한민국 광복군을 창설하였습니다. 광복군은 1907년 8월 1일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한 날이 바로 광복군 창설일임을 선언합니다. 광복군은 구 한국군의 후신으로 33년간에 걸친 의병과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을 계승한 전통 무장 조직입니다"라고 했다. 대한제국 국군-의병-독립군의 군맥(軍脈)과 군혼(軍魂)을 분명하게 잇고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부대 편성은 소대, 중대, 대대, 연대, 여단, 사단 6단으로 편성하였다. 총 3개 사단을 조직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인원이 적은 상황에서 우선 지대를 만들고, 각 지대를 구대와 분대로 연계한 전투부대를 구성했다. 임시정부에서 1940년 9월 19일 중국 국민당 정부에 통보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직원 명단'에 의하면, 부대 규모가 총사령부와 4개 단위부대, 여기에다 조선혁명군 부대까지 포함하여 5000여 명이었다. 임시정부에서는 1941년 12월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1942년에는 미국 측에 "미국이 제주도를 해방 시켜 주면,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를 제주도로 옮긴 후, 광복군이 미군과 함께 한반도 상륙작전을 전개하겠다."라고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실제로 미국 OSS 부대(지금의 CIA)와 1945년 4월부터 8월까지 강도 높은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다. 주요 훈련은 3개월 기간에 고공낙하, 암살법(권총에 특수장치를 하여 소리 없이 암살하는 방법), 통신(암호의 작성 및 해독법, 무전기 조작 및 수리), 교란 행동, 정보수집, 폭파 등 이었다. 일과는 07:00∼12:00 오전 훈련, 13:00∼18:00 오후 훈련, 19:00∼22:00 야간 훈련이었다. 주요 임무는 대한민국으로 낙하산과 잠수함으로 침투하여 미 공군 공습에 필요한 지형 등의 정보를 제공하고 일본군 군사시설 탐지 및 파괴 지하 유격대를 조직하여 연합군 상륙작전 시 제2선에서 연결하는 작전이었다. 마침내 1945년 8월 7일 모든 훈련을 마치고 국내진공작전 출정식을 개최했다. 개시일은 8월 10일이었다. 출정식 때 장준하 경기도 공작 반장은 "나는 조국광복을 위해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내가 나의 죽음을 지불하면, 내 능력껏 그 대가가 조국을 위해서 결제될 것입니다. 나의 각오는 한 장의 정수표입니다. 발생인은 장준하, 결제인은 조국입니다"라는 유서까지 작성했다. /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2025-09-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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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이시바' 누구?...고이즈미·다카이치 선두 [서울=뉴스핌] 오영상 기자 =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자민당 총재직 사임을 공식화하면서, 일본 정국의 관심은 차기 자민당 총재 선거로 쏠리고 있다. 집권당 총재가 곧 총리직을 맡는 일본 정치 구조상 이번 총재 선거는 사실상 다음 총리를 뽑는 절차다. 자민당은 조만간 새로운 총재 선거 일정을 확정할 예정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지난 2024년 9월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 총리와 경합했던 주요 인사들이 다시 출마할 가능성이 높다.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수산상,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보담당상,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 모테기 도시미쓰 전 간사장,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보담당상 등이 후보군으로 거론된다. 정국 운영이 소수 여당이라는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차기 총재가 야당과 어떻게 연대할지, 어떤 연립 구도를 짤지가 최대 쟁점으로 꼽힌다. '포스트 이시바' 후보로 꼽히고 있는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농림수산상 [사진=로이터 뉴스핌] ◆ 고이즈미·다카이치 선두권 현재 여론조사에서는 고이즈미 농림수산상과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상이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지난달 29~31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차기 총리에 적합한 인물로 다카이치가 23%, 고이즈미가 22%를 기록했다. 나란히 1, 2위다. 자민당 지지층으로 한정하면 고이즈미가 32%로, 다카이치(17%)를 크게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카이치는 2024년 총재 선거에서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으나 결선에서 이시바에게 역전패했다. 고이즈미 역시 의원 표에서 선두에 올랐지만 당원 표에서 밀리며 결선에 오르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당내 기반과 대중적 인지도를 겸비해 차기 선거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주자들이다.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은 1981년생(44세)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차남이다. 2009년 중의원 첫 당선 이후 줄곧 '포스트 아베',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았다. 환경상, 농림수산상을 거쳤으며 개혁 성향과 젊은 이미지로 지지층을 넓혔다. 2024년 총선에서 당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으나 참패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후 농림수산상으로 복귀해 쌀 유통 개혁 등 농정 개혁에 매진했다. 대중적 인지도와 '고이즈미 브랜드'라는 정치 자산이 최대 강점으로 꼽힌다.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상은 1961년생(64세)으로 보수 강경파로 분류되는 여성 정치인이다. 2021년 총재 선거에 첫 도전해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며 3위를 기록했다. 2024년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최다 득표(의원 72표, 당원 109표)를 얻었으나 결선에서 이시바 총리에게 역전 당했다. 유일한 여성 후보로서 '보수의 아이콘'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아베 전 총리와 가까웠던 의원 그룹이 주된 지지 기반이다. 이시바 정권에서 당직 제안을 거절하며 독자 노선을 유지해 왔다. '포스트 이시바' 후보로 꼽히는 다카이치 사나에 전 일본 경제안보담당상 [사진=로이터 뉴스핌] ◆ 하야시·모테기 등 잠룡도 주목 고이즈미와 다카이치 두 선두 주자 외에 잠룡들의 행보도 주목된다.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옛 기시다파 일부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이시바 정권의 2인자로서 존재감을 키워왔다. 모테기 도시미쓰 전 간사장은 당내 경험과 풍부한 인맥을 강점으로 삼고, 아소 다로 전 부총리와 교류를 통해 지지 기반을 다지고 있다.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보담당상은 5선 의원으로, 동기 의원들과 옛 니카이파의 지원을 받으며 출마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 총재 선거 이후에도 정국 '안갯속' 자민당 총재 선거는 국회의원 표와 당원·당우 표를 합산하는 방식이 원칙이지만, 긴급 시에는 국회의원과 지방 지부 대표만 투표하는 '양원 의원 총회' 방식으로 대체될 수 있다. 이 경우 의원 표의 비중이 커져 파벌 역학이 중요해진다. 차기 총재가 선출되더라도 곧바로 정권 안정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일본 헌법상 총리는 국회에서 지명되는데, 자민·공명 양당은 현재 중의원과 참의원 모두에서 과반을 잃은 상태다. 따라서 야당이 단일 후보를 세워 결집할 경우, 자민당 총재가 총리로 지명되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자민당 총재가 총리에 오르더라도, 예산안·세제 개혁 법안 등 국정 운영은 야당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차기 총재는 곧바로 '연립 확대'나 '정책 연대'를 추진할 수밖에 없고, 총재 선거 과정에서도 어떤 야당과 손을 잡을지가 핵심 화두가 된다. 결국 이번 자민당 총재 선거는 단순히 차기 지도자를 뽑는 절차를 넘어, 일본 정치가 다당제 속에서 어떤 연립 구도를 구축할지 시험대가 되는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goldendog@newspim.com 2025-09-08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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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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