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김사헌 기자] 그리스 채무 위기 사태가 악화되면서 또다시 유로존의 미래가 기로에 올랐다. 이번 사태가 해결되는 방식에 따라 유럽통화동맹(EMU)과 그에 기반해 탄생한 유럽중앙은행(ECB)의 성격이 바뀔 것이란 지적이 점차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사실 ECB는 이미 오래 전에 그리스를 포기할 수 있었다. 원칙 상 ECB는 어려움을 겪는 회원국 경제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원할 의무가 없다. 오히려 EMU의 원칙을 따른다면 그것과는 반대로 행동해야 맞다.
EMU 회원국들은 유로화라는 화폐를 공유하지만, 재정지출이나 세제 정책은 각각 독립적으로 결정하고 운용한다. 그래서 회원국들은 반드시 재정건전성에 대한 책임을 가지며, '구제금융'은 없다는 것이 조약의 원칙다. 그리스처럼 규칙을 어긴 나라는 이미 배제되었어야 한다.
파이낸션타임스(FT)는 24일자 분석 기사를 통해 이번 그리스 사태에서 ECB가 당면한 어려움과 항후 문제를 풀어가는 방향에 대해 점검했다.
◆ ECB, 시장 안정화 노력 불구 위기 지속
최근에는 새롭게 디폴트(채무 불이행)에 빠질 것이란 공포가 확산되면서 ECB는 또한번 기회를 잃고 있는 느낌이다. ECB는 맹렬하게 채무조정 논의의 불가함과 또 그것이 가져올 파국적인 영향에 대해 경고해왔다.
심지어 그리스 사태로 인해 새로운 신조어가 만들어 지고 있다. [채무] 구조조정이란 말은 '디폴트'를 대체하는 용어가 되고 있다. 물론 원래 뜻은 자발적인 채무탕감에의 합의 내지 동의를 지칭하는 말이다.
'연성' 구조조정이란 말도 만들어지는데, 이는 채권 만기를 연장해주는 것으로 주로 ECB 등이 선호하는 방식이다. 최근 나온 '리프로파일링(reprofiling)'이란 단어는 연성 구조조정이란 단어를 세련되게 일컫는 용어로 유로존 재무장관들이 썼다.
이 가운데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쟝-클로드 트리셰 ECB 총재와 베이트만 분데스방크 총재 등은 정치인들에게 채무조정 쪽으로 약간이라도 경사된다면 ECB가 그리스의 은행들에 대한 유동성공급줄을 끊을 것이며 그럴 경우 금융 붕괴와 함께 그리스 경제가 심연에 빠져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스 채무 위기로 인한 문제점에 대해 ECB가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매우 중차대한 문제다.
그리스 금융권은 이미 금융시장에서 따돌림을 받고 있고 그나마 ECB가 부실해지는 담보이지만 그것이라고 받고서 연결해 준 대출 생명선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ECB는 6월이 되면 유로존 전역에 대해 실시하던 '무제한적인 유동성공급' 정책을 지속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입장이다.
원래 이 정책은 7월 초에 끝낸다는 것이 ECB의 공식 입장이었다. ECB는 또 지난해 금융시장 긴장 완화 과정에서 매수한 그리스 국채를 450억 유로 정도 보유하고 있다.
◆ 그리스 개혁 실패하면 ECB '딜레마'
상황이 이렇다 보니 트리셰 ECB 총재는 그리스 정부에게 경쟁력 강화와 민영화 작업 가속화를 통한 과도한 규제 완화 등 개혁을 주문하고 있다.
그리스가 이 같은 개혁 요구를 실행하지 못한다면 ECB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리스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각국 정부가 구제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도록 버려 두든지, 아니면 규정을 바꾸든지 해서 장기적인 중앙은행의 신뢰를 손상하면서라도 돈을 투입해 직접 구제에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도이체방크의 토마스 마이어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어떤 것을 선택하게 되든지 유로존에 대한 치명적인 충격을 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북구 유럽의 일부 납세자들이 반발할 수도 있지만, 또한 유럽연합 조약에 따르면 통화당국이 정부 재정적자를 화폐화하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ECB는 지난해 5월 경기 침체 압력 속에 발생한 그리스 위기로 인해 전환점을 지났다. ECB는 결국 국제통화기금(IMF) 등과 함께 모두 750억 유로에 이르는 구제금융의 필요성을 정치권에 설득했다. 그 뒤로 그리스 은행들은 신용등급이 강등되든 말든 ECB의 자금지원 창구를 이용할 수 있었다.
그 이후 ECB는 유로존 채권 매입이라는 '양적 완화' 정책을 결의함으로써 정치인들의 격론을 이끌어 냈다. 비록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독일 등의 다수 전문가들은 재정적으로 무책임한 국가들에게 도덕적 해이를 유발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ECB의 유가증권 지원프로램은 채권시장을 안정시키면서 유로존에게 시간을 벌어줬다. 하지만, 1년이 지나면서 위기가 아일랜드, 포르투갈 등으로 확산되었으며 이제는 ECB가 보증하는 국제적 구제금융 이슈로 발전하는 등 당초 계속은 실패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스 국채금리 스프레드는 사상 최대 수준으로 치솟으면서, 불안감은 위기에서 절연되었다고 본 스페인으로 번지는 중이다.
그리스와 포르투갈 그리고 아일랜드는 모두 합쳐도 유로존 국내총생산(GDP)의 5% 정도이지만, ECB의 유로존 유동성 지원 창구에서는 2420억 유로를 사용, 전체의 55%를 차지하고 있다. 건전성에 문제가 없고 담보가 적정한 경우에만 대출한다는 규정도 한계에 도달했다.
◆ ECB, 이해관계 충돌 문제 심각
이런 식으로 ECB가 직면하는 이해관계 상충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 됐다.
증권시장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ECB는 국채를 750억 유로나 보유하게 됐는데, 그 중에서 2/3 정도가 그리스 국채다. 그 외에도 그리스 은행권이 내놓은 금융자산 담보를 1500억 유로나 보유하게 됐다. 그리스 은행권의 담보는 대부분 정부 지급보증이다.
그리스가 디폴트를 선언하게 된다면 ECB의 이 같은 국채나 금융자산 담보 가치는 폭락하게 된다.
물론 이미 일부 손실을 각오한 만큼 그리스 국채의 '헤어컷' 수준이 50% 미만이라면 견딜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하지만 사태가 포르투갈과 아일랜드 등으로 확대된다면 810억 유로 규모의 ECB 자본 및 보유액 수준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정부의 지원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ECB가 지난해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진 것 아니냐는 시각도 나온다. 자신들이 손실 위험에 물렸으니 채무조정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채권단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사실 ECB는 그 특성상 미국의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나 영국의 영란은행(BOE)처럼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리스와 같은 규정을 지키지 않는 회원국이 있으면 다른 회원국 정부나 통화당국들이 신중하고 성실한 정책적 태도를 견지하기 힘들고 나아가 금융시장의 공세를 방어하기도 어렵게 된다.
ECB가 유로존의 건설과 함께 실용적으로 대응하라는 태생적인 문제점에 노출되어 있다는 좀 더 관대한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바클레이즈 캐피탈의 분석가는 "지난 반 세기 동안 ECB가 기반으로 한 선진국 경제시스템은 은행의 레버리지와 상호 연관의 고리 때문에 국가 디폴트사태는 없을 것이란 판단이 지배적이었다"면서 "만약 부분적이라고 해도 채무탕감이 이루어진다면 이 같은 판단이 완전히 허물어지게 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향후 전망에서 밝은 대목은 여타 유로존의 선진국 경기가 빠르게 회복하거나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럴 경우 그리스도 경제 회복을 통해 위기를 해결할 기회가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독일 및 프랑스와 같은 주요 회원국의 빠른 성장은 ECB의 정책적 곤란을 더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이들 비중이 큰 경제에 어떤 충격이 발생할 경우 사실상 ECB의 금리 결정 등 통화정책 기능은 더욱 유지하기 힘들게 된다.
◆ 그리스 개혁 밀면서 책임 분산시켜야. 라틴 경험 연구할 필요
결국 당장은 그리스 정부의 개혁 작업이 제 궤도를 찾도록 만드는 것이 급선무다. ECB는 유럽위원회 및 IMF와 함께 '트로이카' 체제를 형성해서 그리스와 협상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ECB는 그리스 은행들의 자금조달 계획에 관여하여 유동성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도록 만들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포르투갈과 아일랜드 역시 유사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렇게 여건이 개선되면 무조건 유동성을 투입하는 방식이 아니라 공개시장조작의 경쟁적 입찰을 통해 이루어지는 정상적인 시스템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ECB가 그리스 등 주변국 채무 위기로 인해 직면한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유로존 정부가 당장의 위기와 통화동맹이 지닌 장기적인 구조적 문제점을 해결하는 책임을 지라고 요구할 수밖에 없다. 이제까지는 기대한 것보다는 정부의 정치적 의지가 빈약했다.
트리셰 총재는 EU가 정부의 채권시장 개입 권한을 이용해 구제기금을 설치하고 ECB 대신 최종 책임을 맡으라고 로비를 벌였지만 퇴짜를 맞았다.
그리스는 현재 외부 수혈이 요구되고 있는데, ECB는 이를 계기로 1100억 유로에 달하는 지원 프로그램을 개선하자는 입장이지만 독일 등의 회의적인 태도로 인해 다른 방식을 도입하자는 압력이 형성되고 있다.
또한 ECB는 질서정연한 채무 구고조정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매우 어렵고 고통스러우며, 좀 더 크고 심각한 그리스의 디폴트 사태를 불러올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이에 대해 도이체방크의 마이어는 "라틴아메리카의 경험을 충분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라틴경제는 필요할 경우 어떻게 채무 구조조정을 실행해야 하는가에 대해 어려운 교훈을 얻었다.
이런 점에서 ECB는 그리스도 올바른 구조조정을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면 안 된다는 지적이다. 그리스가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면 ECB는 금융시장의 신뢰가 무너지지 않기를 기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지만, 어느 정도 비용을 치르더라도 걸려있는 것이 워낙 많고 중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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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핌 Newspim]김사헌 기자 (herra79@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