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핵심 요약
beta- 교통부가 1950년 6월 25일 전시수송본부를 설치했다.
- 경의·경원·경춘선 운휴 후 중앙선은 군수송에 썼다.
- 철도·통신·전력은 전쟁 속 국가 혈맥이 됐다.
!AI가 자동 생성한 요약으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1950년 6월 25일.
전쟁은 전선에서만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38도선에서 포성이 터지는 순간, 철도와 통신, 전력과 수송도 함께 전쟁 속으로 들어갔다. 병력을 움직이고 탄약을 나르며, 후방과 전선을 연결해야 하는 국가의 혈맥이었다. 그 하나가 끊어지면 다른 하나도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총성이 울리기 전에는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선로와 전선(電線)과 전선(電話線)이, 그날부터 조국의 목숨줄이 되었다.
북한이 불의의 기습을 자행하자 교통부는 이날 08:20을 기하여 개성에 이르는 경의선을 비롯하여 경원선과 경춘선의 정기열차를 운휴하기로 결정하였다. 전보 한 장이 각 역으로 타전되는 사이, 플랫폼에 서 있던 역무원들의 손끝은 무겁게 떨렸다.
그러나 중앙선은 달랐다. 원주를 종착역으로 하여 운행을 계속하도록 하였다. 철길 하나를 멈추고, 다른 철길 하나를 살려 두는 결정에도 전황이 매달려 있었다. 이제 열차의 운행은 단순히 승객을 나르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느 선로를 열어 두고 어느 선로를 닫느냐에 따라 병력과 물자의 흐름이 달라질 수 있었다.

교통부는 곧 국장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실에 모인 얼굴들에는 평시의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평시의 운수행정으로는 닥쳐오는 사태를 감당할 수 없었다. 비상체제로서 전시수송본부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급편된 전시수송본부는 총무부·운전부·운수부·조달부·시설부·공작부로 구성되었다. 산하 지방철도국에는 긴급히 지시하여 지방수송본부로 개편하도록 하였다. 명령서가 오가는 동안에도 기적 소리는 끊이지 않고 역사를 울렸다.
일반 화물열차와 혼합열차의 운행체계도 전시체제로 바뀌었다. 군량미 이외의 화물 수탁은 즉각 정지하였다. 전 철도원을 비상 동원하여 선로와 구내 경비를 강화하였다. 각 수송본부는 별도지시에 따라 기관차·화차 그리고 객차를 확보하고 군 수송을 위한 열차를 편성하였다.
철도는 이제 사람을 실어 나르는 평시의 교통수단이 아니었다. 병력과 군수물자를 움직이는 전선의 일부였다.
전시수송본부의 통제 아래 병력과 군수물자의 수송을 위하여 25일 하루 동안 동원된 차량은 기관차 30량, 객차 300량, 화차 850량이었다. 60개의 임시열차가 운행되었다. 기관실 안에서는 화부들이 쉴 새 없이 석탄을 퍼 날랐고, 밤을 새운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그러나 날이 지나면서 수송량은 급격히 늘어났다. 북상열차와 회송열차를 합한 운행량은 육군과정을 비롯한 전 기관이 전투지역에 나서기도 하였다. 25일의 운행량도 임시열차의 운행이 강화됨에 따라 기관차가 40량, 화차가 1,000량에 이르렀다.
철길은 쉬지 않았다. 북쪽으로는 병력과 탄약을 올려보내고, 남쪽으로는 다시 차량을 돌려보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승객과 화물을 실어 나르던 열차들이 이제는 군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26일 오후부터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서울역과 용산역으로 피난민이 밀려들었다. 남쪽으로 가는 열차를 타려는 사람들이 역사 안팎을 가득 메웠다. 승강장에는 짐보따리가 쌓였고, 아이 손을 붙든 부모와 노인을 부축한 가족들이 열차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사람들의 숨소리와 아이의 울음소리가 뒤엉켜 역사의 지붕 아래를 가득 채웠다.
전시수송본부는 피난민을 남쪽으로 소개하기 위한 열차를 개방하였다. 27일까지 그 수는 30개 열차에 달하였다.
그러나 전황은 피난열차보다 빨랐다. 정부의 수원 이동이 발표된 뒤인 27일 09:00에는 부산으로 떠나는 급행열차를 마지막으로 일반열차의 운행이 중지되었다. 서울역을 떠난 그 열차 뒤로 철길은 적막해졌다. 평시의 시간표도, 정기 운행도 끝났다. 남은 것은 군 수송과 철수뿐이었다.
전시수송본부에서는 현직 장·차관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의 가족 피난을 위한 특별열차도 마련하였다. 이 문제를 두고 당시 농림부장관 윤영선은 비상국무회의에서 의견을 냈다.
"식구를 피난시킬 생각이거든 바삐 그 일을 때려치고 중요관료들이 그런 말 가족들만이라도 먼저 내려 내면 어떠냐."
그러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김 장관이 말했다. "몇 시까지 열차를 서울역에 대기시킬 터이니 부녀자들을 먼저 철수시키고 싶은 분은 나오라." 몇몇 장관들은 가족을 먼저 그 열차로 내려보냈다. 그러나 수도 서울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특별열차가 떠나는 철길과 피난민들이 몰려드는 승강장은 같은 서울에 놓여 있었다.
훗날 비서관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26일 야반부터 27일 새벽까지에 걸쳐 장·차관 및 사회 각계의 주요 인사 가족들에게 긴급히 연락하여 27일 07:00에 용산역에 대기 중인 열차 편으로 부산까지 피난시켰는데 서울역을 피하고 용산역에서 출발시킨 것은 시민들의 이목을 의식하였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정부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떠나는지, 어느 열차가 남쪽으로 가는지, 정부가 서울을 지킬 것인지. 말보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더 많은 것을 말해 주던 때였다.
전시수송본부는 서울 철수에 따라 수원을 거쳐 대전으로 내려갔다. 대전철도국에 임시청사를 두었다. 이어 대구와 부산으로 계속 내려가 전시수송에 임하였다.
9·28 수복 시기까지 동원된 인원은 155명에 이르렀다. 운행한 선로는 312km, 교량은 152개소에 8.6km, 그리고 수도는 29개소에 5km의 손실을 보았다. 전쟁은 사람만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철길도 끊었고, 교량도 무너뜨렸으며, 국가가 수십 년에 걸쳐 쌓아 올린 시설을 한순간에 폐허로 만들었다. 철도원들은 그 폐허를 따라 이동하면서 열차를 살려야 했다.
한편 전쟁이 발발하자, 38도선 접경지역의 각 우체국도 군 통신을 보조하기 시작하였다. 전투부대가 움직이면 통신이 따라가야 했다.
25일 10:00에는 개성에서 장단우체국으로 이어지는 통신이 두절되었다. 이어 26일에는 파주·동두천·의정부·퇴계원우체국과의 통신마저 단절되기에 이르렀다. 전화선이 하나씩 끊어졌다. 통신이 끊어진 곳은 전황을 알 수 없는 곳이 되었고, 전황을 알 수 없는 곳은 곧 고립된 곳이 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의 우체국원들은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전장을 고수하며 군 통신을 유지하였다. 총을 들지는 않았으나 그들에게도 물러설 수 없는 자리가 있었다. 전화와 전보가 이어지는 한 후방과 전선은 아직 연결되어 있었다.
중앙전신국과 중앙전화국에서도 폭주하는 행정통신과 군사통신의 소통에 전력을 다하였다. 특히 중앙전화국에서는 한전인 교환과장이 100명의 교환원을 독려하며 한강교가 폭파되기 직전인 28일 02:00까지 교환업무를 수행하였다.
밤은 깊었고, 전황은 서울 코앞까지 밀려와 있었다. 그러나 전화 교환대의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수많은 선이 연결되고 끊어졌다. 군부대와 정부기관, 행정기관과 각종 지휘소의 목소리가 교환원을 거쳐 오갔다. 손끝으로 코드를 꽂고 뽑는 그 단조로운 동작 하나하나가, 그 순간만큼은 전선과 후방을 잇는 유일한 끈이었다.
그러다 한강교 폭파 명령이 내려졌다. 전화국 내부에서도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예비 역무반은 통신기재를 트럭에 실어 철수하면서 동력실을 폭파하려 하였다. 그 순간에도 한전인 교환과장은 남아 있었다. 마지막 통화가 끝난 뒤에야 사람들은 자리를 떴다. 한강의 밤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정부가 이동하면서 체신부도 움직였다. 수원을 거쳐 대전으로 이동한 체신부는 대전체신청에 임시본부를 두었다. 남하한 몇몇 간부를 중심으로 감정적으로 기구를 재편하여 전신전화시설을 복구하는 한편, 군 통신망으로서의 활용에 주력하였다.
국가는 계속 남쪽으로 밀리고 있었다. 그러나 통신은 끊겨서는 안 되었다. 전선을 지휘하고 병력을 움직이며 정부의 명령을 전달하려면 전화선과 전신선이 살아 있어야 했다.
한편 상공부는 발전과 배전의 원활을 기하고 행정력을 집중하였다. 전기가 끊어지면 공장도, 철도도, 통신도 멈췄다.
우선 오열의 난동과 태업으로부터 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조선전업과 경성전기에 긴급히 지시하였다. 현지 경찰의 협조를 받아 경비를 강화하도록 하였다. 발전소의 굴뚝 아래에서, 경비를 서는 이들의 눈은 어둠 속을 밤새 응시하고 있었다. 전력시설을 지키는 사람들도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그리고 연락관을 파견하여 현지 독려를 계속하였다. 서울이 전쟁의 압력에 짓눌려 가던 27일까지도 배전에는 큰 지장이 생기지 않았다.
철도는 병력과 군수물자를 실어 날랐다. 우체국과 전화국은 전선의 목소리를 이어 주었다. 전력기관은 그 모든 시설에 불을 공급하였다.
서울의 거리에서는 피난민들이 남쪽으로 밀려가고 있었고, 정부기관도 차례차례 수도를 떠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남아 기관차를 움직였고, 누군가는 전화 교환대 앞에 앉아 있었으며, 누군가는 발전시설을 지켰다.
전쟁이 나라의 몸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철길이 버티고, 전화선이 버티고, 전력선이 버텼다. 그것들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국가의 혈맥은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다.
/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