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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혁 교수의 정치분석] ⑥민주주의 의회 토론의 산실, 영국 웨스트민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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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의회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회로 평가된다. 그 기원은 1215년 러니미드에서 체결된 마그나 카르타로 거슬러 올라간다. 통상 63개 조항으로 구성된 이 문서에는 왕의 과세와 구금 권한을 제한하는 내용과 함께 25명의 남작이 합의 이행을 감시하도록 하는 보증 장치가 포함되어 있었다. 권력은 무제한적 권위가 아니라 조건부 권위로 정의되었다. 대립하던 두 세력 간의 계약은 이후 의회 발전의 토대가 된다.

그러나 이 원칙이 곧바로 안정된 정치 질서를 낳은 것은 아니었다. 17세기 초 찰스 1세는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하고, 의회를 해산하며, 왕권 중심 통치를 시도했다. 1628년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을 수용하고도 이를 실질적으로 무력화하려 했던 행보는 의회와의 신뢰를 훼손했다. 갈등은 결국 내전으로 이어졌고, 1649년 찰스 1세는 재판을 거쳐 처형된다.

현직 국왕이 법정 판결에 의해 단두대에 오른 사건은 유럽 정치사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웠다.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가 이 사건을 목격하며 출판한 '리바이던(Leviathan, 1651)'에서 시민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강한 군주제를 옹호한 것이 우연이 아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권력 투쟁의 결과가 아니었다. 의회와의 협약을 반복적으로 무시한 결과, 왕권의 정당성이 붕괴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1660년 왕정복고 이후에도 긴장은 지속되었지만, 1688년 명예혁명은 국왕과 의회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립했다. 권리장전(Bill of Rights, 1689)은 국왕이 의회의 동의 없이 법을 정지하거나 세금을 부과할 수 없음을 명문화했다. 이 시기에 토리(Tory)와 휘그(Whig)라는 정치적 집단이 초기 정당 형태를 띠며 각자의 정치 세력을 형성했고, 반대는 반역이 아니라 제도적 역할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진=Wikimedia Commons / Library of Congress (Public Domain)]

영국식 의회 토론 제도의 성장

조지 1세가 1714년 즉위했을 때, 영국은 이미 1688년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을 거치며 왕권과 의회의 관계를 재정립한 상태였다. 그러나 하노버 왕조의 출범은 또 다른 변화를 촉발했다. 새 국왕은 독일 출신이었고 영어에 능숙하지 않았다. 그는 국내 정당 정치의 세부에 깊이 개입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국정 운영의 중심은 의회 다수파와 그 지도자들에게로 이동했다. 왕이 직접 정치를 통제하던 구조는 점차 내각 중심 체제로 바뀌었고, 의회 안에서 다수의 지지를 확보한 인물이 정부를 이끄는 관행이 강화되었다. 권력은 여전히 군사력과 왕권이라는 상징을 지녔지만, 실제 정책 결정의 무게는 토론과 표결의 장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이 시기 로버트 월폴(Robert Walpole)은 흔히 영국 정치사에서 '최초의 총리'로 불린다. 추밀원 위원(Privy Councillor)이기도 했던 그에게 The Right Honourable Sir Robert Walpole이라는 타이틀이 붙기 시작했다. 월폴은 1721년 이후 21년간 정부를 이끌며 사실상 최초의 총리로 평가받지만, 당시에는 "Prime Minister"라는 공식 직함이 제도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정치 방식은 의회 다수의 지지를 유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는 공개 토론을 피하지 않았고, 세금과 재정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설득과 타협을 통해 지지를 모았다. 웨스트민스터는 점점 더 단순한 입법 기관이 아니라, 정책을 설명하고 반대 의견을 조정하는 공간으로 기능했다. 권력의 정당성은 점차 무력 충돌이 아니라 토론을 통과한 표결에서 비롯된다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18세기 후반 미국 독립전쟁이라는 거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1776년 7월 4일, 북아메리카 13개 식민지는 독립을 선언하며 영국에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영국 의회 내부의 논쟁은 7년 전쟁(1756-1763) 이후 이미 시작되었다. 전쟁 이후 약화된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 제기된 영 식민지 세금 부과 권한, 식민지 대표권, 군사적 대응의 범위를 둘러싸고 하원은 분열되어 있었다. 일부 의원들은 식민지의 반발을 단호하게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이들은 과도한 세금과 강경 조치가 오히려 제국을 분열시킨다고 비판했다.

당시 야당 소속이었던 찰스 제임스 폭스(Charles James Fox)는 북미 식민지 정책을 비판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1770년대 후반 의회 토론 기록(Cobbett's Parliamentary History, vol. XIX 등)에 따르면 그는 정부의 조치가 "영국의 자유의 원칙에 배치된다"고 주장하며, 무력에 의존한 통치는 식민지를 더욱 멀어지게 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는 전쟁의 확대가 재정 부담을 심화시키고, 장기적으로 국가 신용을 훼손할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이었다.

이에 맞서 윌리엄 핏 주니어(William Pitt the Younger)는 국가 재정과 전략적 이해를 중심에 두고 논리를 전개했다. 그는 의회에서 영국의 공공신용(public credit) 유지와 해군력 강화가 국제적 위상을 유지하는 핵심 조건임을 강조하였다. 이 논쟁은 단순한 전쟁 수행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제국의 정체성과 재정 운영의 원칙을 둘러싼 정책 철학의 충돌로 전개되었다.

당시 기록은 오늘날의 완전 속기록과 달리 편집적 성격을 지니지만, 발언 중간에 'Hear him!' 혹은 'No!'와 같은 반응 표기가 등장하는 장면도 확인된다. 이는 논쟁이 단순한 독백이 아니라 즉각적인 반응 속에서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18세기 기록은 현대 Hansard와 달리 회의장 분위기를 체계적으로 서술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토론은 공개된 절차 속에서 이루어졌고, 정책의 방향은 결국 표결을 통해 결정되었다.

이 시기 논쟁은 영국 정치 문화에 장기적 영향을 남겼다. 미국 독립을 막지 못했지만, 의회는 전쟁의 경과와 재정 문제를 지속적으로 점검했다. 전쟁 수행의 실패는 정부 교체로 이어졌고, 정책 책임은 공개적으로 논의되었다. 이는 웨스트민스터 모델의 핵심 원리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권력은 여전히 군사적 수단을 동원했지만, 그 정당성은 의회의 토론과 표결을 통해 확인되어야 했다.

폭스와 핏의 대립은 이후 영국 정당 정치의 형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정부와 야당이 단순히 반대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국가 운영 철학을 경쟁적으로 제시하는 구조가 자리 잡았다. 재정, 외교, 제국 문제는 개인의 충성심이나 왕의 의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의회 안에서 논증과 반론을 거쳐 결정되는 사안이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훗날 그림자 내각 제도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정부–야당의 정책 경쟁을 제도화하는 기반이 되었다.

영국 한사드(Hansard) [사진=© UK Parliament (Open Parliament Licence)]

한사드, 영국 의회 토론의 기록

오늘날 우리는 Hansard라는 방대한 속기록을 통해 수 세기의 영국 의회 토론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초기 의회 토론은 공개 기록의 대상이 아니었다. 17세기와 18세기 초반까지 의회 토론은 사실상 국가 비밀이었다. 의원들이 발언한 내용은 공식적으로 출판이 금지되었고, 이를 보도하는 것은 특권 침해로 간주되었다. 의회는 외부의 간섭 없이 토론할 권리를 보호하려 했기 때문에 국가의 비밀로 보호했다.

18세기 초, 일부 인쇄업자와 언론인들이 의회 토론을 간접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종종 가명을 사용하거나 "가상의 토론" 형식으로 내용을 전달했다. 당시 인쇄업을 운영한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조차 의회 토론을 문학적 재구성 형태로 작성한 적이 있다. 이는 공식 기록이 아니라 비공식적 재현이었다.

당시의 의회는 기록을 남기기보다 자율성을 유지하는 데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 인쇄 기술과 신문의 발전은 상황을 바꾸었다. 대중은 의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어 했고, 언론은 이를 보도하려 했다. 초기에는 가명이나 우회적 표현을 사용해 의회 토론을 재구성하는 방식이 등장했다.

1771년 런던의 인쇄업자와 의회 사이에서 벌어진 충돌은 전환점이 되었다. 의회가 언론 보도를 강하게 제지하려 하자, 여론은 오히려 기록 공개를 요구했다. 결국 의회는 토론 보도를 사실상 묵인하는 방향으로 움직였고, 이는 공개 기록 문화의 출발점이 되었다.

Hansard라는 이름은 19세기 초 Thomas Curson Hansard라는 인쇄업자에서 유래한다. 그는 1803년부터 의회 토론을 체계적으로 수집해 출판하기 시작했다. 이 초기 Hansard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공식 속기록과는 달랐다. 발언은 완전한 속기라기보다 편집과 요약을 거친 형태였고, 정부 기관이 아니라 민간 출판사가 발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Hansard는 점차 의회 토론의 사실상 표준 기록으로 자리 잡았다. 의회는 이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지는 않았지만, 점차 이 기록에 의존하게 되었다.

Hansard는 여러 시리즈로 구분된다. 1803년부터 시작된 First Series(1803-1820)를 시작으로, Second Series(1820-1830), Third Series(1830-1891), Fourth Series(1892-1908)를 거쳐 1909년부터는 현재까지 기록된 Fifth Series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리즈 구분은 단순한 연대 구획이 아니라, 기록 체계와 제도적 위상의 변화를 반영한다. 특히 1909년부터는 'Official Report'로서 정부가 출판을 맡으며 현대적 의미의 공식 속기록으로 자리 잡았고, 이때부터 상·하원 기록이 분리되는 전환도 함께 진행된다.

19세기 영국 의회 논의 내용이 인쇄된 한사드(Hansard) 회의록 [사진=Wikimedia Commons / Hansard Parliamentary Debates Archive (Public Domain)]

19세기 Third Series는 연구 측면에서 특히 중요한 시기로 간주된다. 산업혁명, 선거개혁, 곡물법 폐지, 아일랜드 문제, 제국 팽창, 두 차례의 아편전쟁 등 근대 영국 정치의 핵심 논쟁이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이 시기의 Hansard는 아직 완전 속기록은 아니지만, 발언의 재현 수준은 상당히 높다. 로버트 필(Robert Peel)의 곡물법 폐지 연설, 팔머스턴의 외교정책 방어, 글래드스톤과 디즈레일리의 재정 논쟁 등은 모두 이 기록 속에 남아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정치인들이 어떤 논증 구조를 사용했는지, 반론이 어떻게 제시되었는지를 분석할 수 있다.

Fourth Series와 Fifth Series로 넘어가면서 기록의 정밀도는 더욱 높아진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 논쟁,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불신임 토론, 수에즈 위기, 유럽 통합 논쟁, 브렉시트에 이르기까지 주요 역사적 순간들이 Hansard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20세기 이후의 기록은 발언자의 이름, 직함, 발언 전문, 의장의 개입, 청중 반응, 표결 결과까지 체계적으로 남긴다. 이는 단순한 정치 기록을 넘어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을 분석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Hansard의 구조적 특징은 민주주의 연구에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발언의 길이와 논증 구조, 반론의 존재 여부, 상대를 지칭하는 언어, 의장의 질서 개입 빈도 등은 모두 토론의 질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가 된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속기록이 괄호 안 분위기 묘사를 통해 언어적 붕괴를 드러냈다면, Hansard는 발언의 구조 자체를 통해 설득의 지속성을 보여준다. 기록이 남는다는 사실은 정치인에게 설명의 의무를 부과하고, 반대 의견을 역사 속에 보존한다.

Hansard는 단순한 기록물이 아니다. 그것은 책임 정치의 기반이다. 정치인은 자신의 발언이 영구적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알고 발언한다. 반대파의 주장은 삭제되지 않고, 다수결에 의해 패배하더라도 기록 속에 보존된다. 이 기록은 후대의 평가와 비교를 가능하게 하며, 민주주의의 언어 규범을 축적한다. 또한 Hansard는 공개성의 상징이다. 의회 토론이 비밀에서 출발해 공개 기록으로 제도화되었다는 사실은 민주주의가 단지 선거 제도만으로 유지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말은 기록되고, 기록은 책임을 낳는다. 기록은 갈등을 투명하게 만들고, 투명성은 제도적 신뢰를 강화한다.

오늘날 디지털 Hansard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 특정 날짜의 토론, 특정 의원의 발언, 특정 정책 논쟁을 손쉽게 검색할 수 있다. 이는 의회가 더 이상 폐쇄적 공간이 아니라 공적 토론의 장임을 의미한다. 동시에 일정 기준으로 추출해낸 코퍼스(corpus) 자료는 설득 구조와 민주주의 건강성을 정량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Hansard의 역사는 곧 민주주의 언어의 제도화 과정으로 간주된다. 처음에는 기록이 금기였으나, 이후 비공식 기록이 등장했으며, 마침내 공식 속기록으로 자리 잡았다. 이 발전 과정은 의회가 자신이 하는 말을 역사 앞에 남기겠다는 선택을 했음을 의미한다. 그 선택이야말로 웨스트민스터 모델의 지속성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다.

Hansard 1차 시리즈(1803–1820)는 나폴레옹 전쟁기와 전후 재정 및 국가 운영의 문제들이 겹친 시기다. 2차 시리즈(1820–1830)는 선거권과 종교·시민권 문제를 둘러싼 긴장이 커진 시기다. 가령 1829년 가톨릭 해방법(Catholic Emancipation) 같은 쟁점은 국가 정체성과 권리 확대가 충돌하는 토론을 촉발했고, 토론은 더 대중적 관심을 받게 된다. 3차 시리즈(1830–1891)는 웨스트민스터 토론의 성숙을 논할 때 핵심 창고에 해당한다.

산업혁명, 선거개혁, 자유무역 전환, 제국 확장, 아일랜드 문제 등 근대 영국의 가장 격렬한 정책 충돌이 이 시기에 집중돼 있고, 그만큼 설득의 기술과 인식적 편향, 논리적 오류가 함께 드러난다. 4차 시리즈(1892–1908)는 제국주의 경쟁과 사회개혁 논쟁, 노동 정치의 부상이 겹치는 시기다. 설득의 기술은 더 세련되어지지만, 그만큼 대중 동원형 언어와 계급적 도식도 함께 유입된다. 토론의 논점이 복잡해지는 만큼, 상대를 단순한 유형으로 환원하는 인식적 편향이 작동하는 장면도 늘어난다. 동시에 의장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기록은 오늘날의 완전 속기와는 거리가 있고 편집적 성격이 강하지만, 이미 정책 선택의 근거를 설명하고 반론에 답하는 의회적 화법이 핵심 장르로 자리 잡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디지털 아카이브는 1차 시리즈가 1803년 11월 개시되어 1820년 2월까지 이어진다고 명시하고, 각 권마다 개시·종료 날짜를 붙여 토론이 '연속된 공적 기록'으로 정리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 설득의 질은 종종 계급적 전제와 제국적 편향을 내포했지만, 결정의 정당성을 명백한 근거로 제시해야 한다는 규범이 정치의 언어로 자리 잡는 단계였다고 말할 수 있다. 5차 시리즈(1909–하원 기준 1981)는 Hansard가 'Official Report'로 제도화된 뒤의 시대다. 즉, 기록의 정밀도와 공적 책임성이 이전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높아진다.

앞으로 네 번에 걸쳐 영국 의회 토론의 특징, 그리고 세계 의회 민주주의의 모델을 구축한 캐비닛(Cabinet)-그림자 캐비닛(Shadow Cabinet)의 발전 과정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최연혁 스웨덴 린네대학교 교수 [사진=뉴스핌 DB]

*필자 최연혁 교수는 = 스웨덴 예테보리대의 정부의 질 연구소에서 부패 해소를 위한 정부의 역할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스톡홀름 싱크탱크인 스칸디나비아 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매년 알메랄렌 정치박람회에서 스톡홀름 포럼을 개최해 선진정치의 조건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그 결과를 널리 설파해 왔다. 한국외대 스웨덴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스웨덴으로 건너가 예테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런던정경대에서 박사후과정을 거쳤다. 이후 스웨덴 쇠데르턴대에서 18년간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버클리대 사회조사연구소 객원연구원, 하와이 동서연구소 초빙연구원, 남아공 스텔렌보쉬대와 에스토니아 타르투대, 폴란드 아담미키에비취대에서 객원교수로 일했다. 현재 스웨덴 린네대학 정치학 교수로 강의와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민주주의의가 왜 좋을까' '알메달렌, 축제의 정치를 만나다' '스웨덴 패러독스' 등이 있다.

kimsh@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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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F-21, '전투용 적합' 최종판정 받다 [서울=뉴스핌] 오동룡 군사방산전문기자 = 한국형전투기(KF-21) 보라매가 7일 방위사업청으로부터 '전투용 적합' 판정을 획득하며 체계개발의 최종 관문을 통과했다. 2015년 12월 체계개발 착수 후 10년 5개월, 2023년 5월 '잠정 전투용 적합' 판정 이후 약 3년간의 후속 시험평가 끝에 이뤄진 결과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미국·러시아·중국·영국·프랑스·스웨덴·일본에 이어 독자 전투기 개발 능력을 완전히 확보한 8번째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지난 1월 12일 경남 사천 남해 상공에서 KF-21 시제 4호기가 비행성능 검증 임무를 수행하며 비행시험을 전면 완료했다. KF-21 개발은 총 1600여 회, 1만3000개 항목에 이르는 비행시험을 단 한 번의 사고 없이 완료하며 안전성을 입증했다. [사진=한국항공우주산업 제공] 2026.05.07 gomsi@newspim.com 방사청에 따르면, KF-21은 2021년 5월 최초 시험평가를 시작해 올 2월까지 약 5년간 지상시험을 통해 내구성과 구조 건전성을 검증했다. 특히 2022년 7월부터 2026년 1월까지 42개월간 진행된 비행시험에서는 총 1600여 회 비행에 단 한 건의 사고도 발생하지 않았다. 극저온·강우 등 악천후 조건 하 비행, 전자파 간섭 하 비행, 공중급유, 무장발사시험 등 1만3000여 개의 다양한 시험조건을 통해 비행 성능과 안정성을 완벽하게 검증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번 전투용 적합 판정은 KF-21 블록-I(기본성능·공대공 능력)의 모든 성능에 대한 검증이 완료됐음을 의미한다. 방사청은 KF-21이 공군의 작전운용성능(ROC)을 충족하고, 실제 전장 환경에서 임무 수행이 가능한 기술 수준과 안정성을 확보했다고 평가했다. 노지만 방사청 한국형전투기사업단장은 "국방부·합참·공군·한국항공우주산업(KAI)·국방과학연구소 등 민·관·군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이룬 결실"이라며 "향후 양산 및 전력화도 차질 없이 추진해 공군의 작전수행 능력을 한층 강화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방사청은 비행시험 효율화를 위해 시험 비행장을 사천에서 충남 서산까지 확대하고 국내 최초로 공중급유를 시험비행에 도입했다. 그 결과 개발 비행시험 기간을 당초 계획보다 2개월 앞당길 수 있었다. KF-21 체계개발 사업은 올해 6월 종료되며, 양산 1호기는 올해 하반기 공군에 인도될 예정이다. 양산 1호기는 지난 3월 25일 경남 사천 KAI 공장에서 출고됐으며, 4월 15일 출고 22일 만에 첫 비행에 성공했다. 이후 물량은 순차적으로 실전 배치될 계획이며, 추가무장시험을 통해 공대지 무장 능력도 확보할 예정이다. 공군은 2032년까지 총 120대를 전력화할 계획으로, KF-21은 노후화된 F-4E·F-5E 전투기를 대체하는 한편, 대한민국 영공방위의 핵심 전력으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방사청은 "검증된 성능을 바탕으로 글로벌 방산 4대 강국 도약의 서막을 여는 K-방산 수출의 핵심 무기체계가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gomsi@newspim.com 2026-05-07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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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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