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 출신 김남철 남북청년협회 대표
정착금 사기당하고 사업 실패 어려움
온라인 쇼핑몰 차려 금전적 여유 생겨
현충원 묘비 닦기 등 우리 사회에 봉사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 수는 3만4000여명을 헤아린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한국사회에 내가 제대로 기여한 게 없는데...'라며 정착지원금을 비롯한 지원에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한다.
그런데 탈북민 사회에서 점차 '대한민국에 우리도 어떤 도움이라도 주고 싶다'는 울림이 커지고 있다. 개인 차원은 물론 모임이나 단체를 만들어 사회공헌이나 봉사활동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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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함북 무산 출신인 김남철 남북청년협회 대표. 꽃제비 출신인 그는 남북청년 100명이 모여 '플래시 몹'을 하고 싶은 꿈을 갖고 있다. [사진=남북하나재단] 2025.11.25 yjlee@newspim.com |
김남철(34) 남북청년협회 대표는 함북 무산시가 고향이다. 1990년대 중후반 대규모 아사사태로 북한이 '고난의 행군'이라 불렀던 어려움을 유년시절 겪었다.
농촌 마을에서 평범한 농장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에게 가난과 굶주림은 일상이었다. 가족의 숨통을 죄어들자 김 대표의 부모님은 여섯 살밖에 안 된 아들을 업고 두만강을 건넜다.
하지만 자유는 그리 쉽게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홉 살 되던 해, 그는 부모님과 함께 첫 북송의 시련을 겪었다.
오직 배고픔을 덜기 위해 탈북한 죄 아닌 죄로 끌려갔고 다행히 어린 나이인 점을 참작해 풀려났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험난했다. 정전으로 기차가 멈춰버려 온성에서 무산까지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홀로 걸어서 7일 만에 도착했던 아픈 추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김 대표는 말한다.
또다시 탈북에 성공했지만 열세 살 되던 해 북송당했다. 또래보다 키가 크고 성숙했던 탓에 '미성년'이라는 말을 믿어주지 않은 보위부 요원 손에 죽도록 매를 맞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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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남북청년협회 회원들이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묘비를 닦고 묘역을 정리하는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남북청년협회] 2025.11.25 yjlee@newspim.com |
이후부터 그의 삶은 늘 '살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집도 없이 떠돌며 하루하루를 버텨야 하는 '꽃제비' 신세였다.
그 시절, 그는 내일을 믿지 않았다. '오늘 만은 살아남자'는 게 그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마음 한구석에 희미한 불씨가 있었다. "내가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언젠가 나처럼 힘든 사람을 꼭 도와줄 테다"라는 다짐이었다
재차 탈북한 그는 중국 도문시의 한 교회에서 부모님과 극적으로 만났다. 교회는 그를 품어주었고 초등학교에도 보내주었다.
북송과 재 탈북을 반복하던 7년의 세월 속에 그는 어느새 '살아남은 아이'가 아니라 '버티는 소년'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가족과 함께 대한민국의 땅을 밟았고 북에 홀로 남겨진 형도 그리운 가족의 품에 안겼다.
하지만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탈북민에게 주어지는 한국 정부의 정착금은 지인에게 사기당했다. 형과 함께 열었던 PC방은 문을 닫았다.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갈 그의 어깨에 짊어진 건 빚더미뿐이었다. 빚을 갚기 위해 그는 뼈가 부서지도록 미친 듯이 일했다. 20대의 젊은 날은 그에게 아름답고 행복한 추억 대신 힘들고 시련 많은 상처만 흔적으로 남겨주고 그렇게 흘러갔다.
하지만 고난 속에서도 그는 어릴 적 자신과의 약속을 잊은 적이 없었다.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며 금전적인 여유가 생기자 곧바로 그 약속을 실행에 옮겼다.
2021년 남북한 청년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작은 친목 모임을 만들었다. 속마음을 나누는 대화로 시작된 이 모임은 '남북청년협회' 라는 봉사단체로 발전했다.
김 대표는 "처음엔 단순한 만남이었지만, 함께 봉사하며 우리는 진짜 하나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들 단체의 첫 봉사활동은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묘비를 닦는 일로 시작되었다. 단단한 돌에 새겨진 이름 하나하나를 어루만지며 그는 '삶을 잃은 이들'과 '삶을 되찾은 자신'을 동시에 떠올렸다.
이후 봉사의 발걸음은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원당리에 위치한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주거복지 시설인 '나눔의 집'으로 이어졌다. '나눔의 집'은 면적이 넓고 인력이 부족해 늘 일손이 부족한 곳이다.
잔디 깎기, 전시품 교체, 청소 등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협회 회원들을 관계자들은 늘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놀라운 점은 봉사 현장에서 일본인 대학생 자원봉사자들도 함께했다는 사실이다. 김 대표는 "그 모습을 보고 국경을 넘어선 인간애를 느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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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함북 무산 출신인 김남철 남북청년협회 대표. [사진=남북하나재단] 2025.11.25 yjlee@newspim.com |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봉사는 중학교 시절 처음으로 참여했던 태안 기름유출 사고 복구 활동이었다.
"현장은 마치 전쟁터 같았어요. 기름 냄새에 10분 이상 버틸 수 없었는데 사람들은 줄을 서서 닦고 또 닦았어요. 그때 저는 '대한민국의 시민의식'을 깊이 느꼈습니다."
그리고 소록도 봉사 시절의 추억도 생생하다. 일제강점기 치료약도 없는 한센병 환자들을 섬에 가두고 대를 잇지 못하도록 거세까지 시켰다는 사실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소록도의 할머니들께 안마를 해드리고 밭일을 도우며 마음의 벽을 허물었다. 그리고 그는 '상처는 나눌 때 치유됨'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이제 봉사를 '삶의 일부'로 여기며 살아간다. "대한민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이곳이 유토피아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살아보니 이곳에도 고통이 있고, 외로움이 있더군요.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과정에 누구나 누군가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김 대표는 오늘도 남북청년협회 회원들과 봉사를 이어가며 사회통합의 길을 걷고 있다.
그는 언젠가 남북 청년들이 백 명 넘게 함께 모여 '하나 되는 마음'을 표현하는 플래시몹을 진행하고 싶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
김 대표의 꿈은 거창하지 않다. 그저 '함께 사는 세상, 서로를 이해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요즘 청년들이 힘들다고 하지만 세상에는 우리보다 더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들을 돕다 보면 오히려 내가 위로 받습니다."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 세대였던 그가 이제는 '희망의 행군'을 이어가는 청년이 되었다. 이웃을 위해 더 많은 걸 나눠주고, 남북이 함께 통일을 준비해가는 시험을 하고 있는 김 대표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뉴스핌-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yjlee@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