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환금 경기북부취재본부장
2020년대 들어 일의 개념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디지털 전환이 촉발한 변화는 AI(인공지능 시스템)가 강조되면서 단순한 기술 진보를 넘어, 노동의 구조와 생활 자체가 변화되고 있다. 주5일 근무와 재택근무가 일반화된 근무 형태로 자리잡아가고, 생계와 자기실현을 위해 두 가지 이상의 일을 병행하는 'N잡러'가 사회의 새로운 업무형태로 떠올랐다.
'N잡러(N-jobber)'에는 시대의 감각이 담겨 있다. 복수를 뜻하는 'N'과 직업(job), 그리고 사람을 의미하는 접미사 '-러(er)'가 결합된 신조어로서, 더 이상 하나의 직업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는 현실을 상징한다. 본업 하나로는 여유있는 생활이 어렵기에 부업이 곧 능력이자 자아 확장인 시대. 과거에는 '투잡'이라 부르며 특별한 사례로 여겼던 일이 이제는 사회의 중심 현상으로 변화됐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2024년 1분기 부업 경험이 있는 취업자는 55만2000 명으로 1년 새 22.4%가 늘었다. 숫자를 통해 N잡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생존의 방정식'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평생직장의 개념은 희미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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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업무는 새벽부터 분주히 움직인다. [사진=최환금 기자] 2025.10.19 atbodo@newspim.com |
100세 시대, 평균 정년 53.8세. 짧은 직장 수명에 비해 긴 인생이다. 퇴직 이후의 30~40년을 감당하기 위해 사람들은 다시 자신을 매일 '업데이트' 한다. 이제 직장은 소속이 아니라 플랫폼이고 직업은 정체성이 아니라 조합 가능한 스킬의 집합체가 됐다.
한 중견 언론인의 사례는 이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평생 신문기자로 살아왔지만, 정년을 넘긴 지금은 종합 통신사 지역본부에서 근무하며 한켠에서는 택배 물류센터에서 상하차 일을 한다. 기자와 택배 노동자, 듣기엔 어색한 조합일 수 있지만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운동도 된다면 괜찮다"는 그의 말에는 더 나은 내일과 내 일에 대한 낙관이 묻어 있다.
새벽에 나가 무거운 박스를 옮기는 일은 녹록지 않지만, 그는 "힘들기보다 운동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수입은 많지 않았지만 몸이 달라졌다. 매일 수백 개의 상자를 들다 보니 팔 근육이 붙고 체력이 좋아졌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악수를 하자 "현장일이라도 하냐"고 놀랄 정도였다. 돈보다 값진 것은 '움직이는 몸'에서 느껴지는 활력이다.
이 사례는 N잡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단순히 돈을 더 버는 문제가 아니라, 일과 삶을 재정의하는 과정이다. 일은 생계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존재의 가치이며 증명이다. 누군가는 생존을 위해, 또 누군가는 자아실현을 위해, 또 다른 이는 건강을 위해 '두 번째 일'을 선택한다. 중요한 것은 일의 수가 아니라 '일하는 방식'의 전환이다.
디지털 플랫폼의 발달은 이런 흐름을 가속화시켰다. 온라인 강의, 콘텐츠 제작, 번역, 디자인, 배달, 물류 등 새로운 형태의 노동이 끝없이 생겨나고 있다. 덕분에 사람들은 시간과 장소의 제약 없이 자신이 원하는 만큼 일하고, 원하는 방식으로 돈을 번다. '한 직장에 인생을 걸던 시대'에서 '스스로를 브랜드로 세우는 시대'로 옮겨간 것이다.
물론 이 변화의 이면에는 불안도 있다. 한 노동경제학자는 "양질의 일자리 부족이 청년층과 중장년층 모두를 비자발적 부업으로 내몰고 있다"고 진단했다. 자율이 아니라 생존의 강요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N잡은 시대의 구조적 불안 속에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동성이다. 불안정한 고용시장 속에서도 자신의 시간을 관리하고 자신만의 경제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몸부림인 것이다.
이제 N잡은 특정 세대의 일시적 트렌드가 아니다. MZ세대는 자신이 가진 재능과 취미를 수익화하고, 50·60대는 정년 이후의 삶을 설계한다. 청년은 미래를 대비하고, 중·장년은 생계를 이어간다. 모두가 각자의 이유로 '두 번째 일'을 갖는다. 일은 더 이상 하나의 직장 안에 갇히지 않는다.
결국 N잡의 시대는 불안정 속에서도 새로운 자유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조직의 울타리를 벗어나 개인이 자신의 시간과 능력을 스스로 설계하는 삶. 그것이 오늘의 노동이고 내일의 생존 방식이다.
일의 의미가 변한 만큼 삶의 가치도 새로 정의돼야 한다. '한 사람, 한 직장'의 시대가 저물고 '한 사람, 여러 일'의 시대가 진행되고 있다. 지금이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 우리 모두가 서 있는 현실이다.
atbodo@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