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상대로 '비핵화 없는 대화 재개' 타진하는 북한
핵무력 완성, 북·러 군사동맹 등 유리한 입지 확보
美, 비핵화 추구하지만 "전제 조건 없는 대화 가능"
페이스메이커 자처한 한국, '패싱' 가능성 우려
[서울=뉴스핌]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대화의 문을 굳게 닫아 걸었던 북한이 대화 재개를 위한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도 '전제 조건 없는 대화'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북·미 대화가 열릴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정부도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지난달 21일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비핵화 포기'를 조건으로 북·미 대화에 응할 수 있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또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좋은 추억'도 언급했다. 비핵화는 없다고 전제를 달긴 했으나 북·미 대화를 재개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 것이어서 이 발언은 즉각적인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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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총회 연설하는 김선경 북한 외무성 부상. [사진=유엔 TV 캡처] |
지난달 제80차 유엔총회 고위급 회기에서 보인 북한의 움직임도 눈길을 끌었다. 북한은 이번 유엔총회에 김선경 북한 외무성 부상을 파견했다. 북한이 외무성 고위급 인사를 유엔총회에 보낸 것은 북·미 대화 결렬 이후 처음이다. 김 부상은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을 만나기도 했다.
김 부상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비핵화 요구는 생존권 포기이며 헌법 위반"이라며 "우리는 절대로 주권 포기, 생존권 포기, 위헌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핵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연설이었지만, 이는 곧 비핵화를 논의하는 자리가 아니라면 미국과 대화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정부 관계자는 이같은 북한의 움직임에 대해 "2019년 '하노이 노딜' 이후 대화를 단절하고 핵무력 강화에 매진했던 북한이 6년 만에 미국을 상대로 대화 재개를 타진하고 있다고 본다"면서 "핵무력 완성과 북·러 군사동맹 복원, 북·중 관계 개선 등으로 미국과 동등한 입장에서 마주 앉을 수 있는 자신이 생겼다는 의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의 반응도 긍정적이다. 백악관 관계자는 김 위원장의 발언에 대한 입장을 묻는 국내 언론들의 질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과 어떤 전제 조건 없이 대화하는 것에 여전히 열려 있다"고 답했다. 이 관계자는 또 "미국의 대북정책은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비핵화'를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비핵화가 최종 목표라는 점은 변화가 없다는 뜻이다. 이같은 반응은 일단 대화를 시작하는데 동의한다는 의미로 보인다. 비핵화를 논의하는 대화가 아니면 못나가겠다는게 아니라, 일단 만나서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겠다는 취지인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입장도 이와 유사하다. 대통령실은 "핵 없는 한반도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말로 비핵화 목표가 여전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북·미 대화를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북 차원에서 대화의 접점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북·미 대화를 시작으로 대화 국면을 다시 여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한국이 대화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북·미 대화를 통해 국면 전환이 이뤄진다면 정부의 목표와 부합한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페이스메이커' 역할론을 재확인 한 것이다.
하지만 대화 재개를 위한 북·미의 탐색전이 본격화하고 있는 현재 상황에 대한 정부의 생각은 조금 복잡하다. 대화가 재개되는 것은 환영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과연 북한과 어떻게 대화를 끌고 나갈 것인지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북핵 문제에 대해 한·미 간 이견이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미국의 생각이 한국과 모든 면에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트럼프 1기 북·미 대화에서 이미 체험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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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로이터 뉴스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첫번째 북미 정상회담을 갖고 공동성명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2018.6.12 |
2018년 북한이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를 발표하고 북·미 대화를 희망했을때 트럼프 대통령은 즉흥적으로 북한의 정상회담 제안을 받아들였다. 파격적인 결정이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 정착에 대한 의지도, 전략도 없이 정치적 효과만을 노렸다. 그 결과 2018년 6월 사상 첫 번째 북·미 정상회담의 결과물인 싱가포르 합의는 완전한 실패작이었다. 비핵화가 최종목표라는 것을 확인하지도 않았고,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북한의 핵활동을 중단한다는 합의도 없었다. 한·미 군사훈련도 스스로 중단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과 충분한 조율은 없었다.
만약 북·미가 대화를 재개한다고 해도 트럼프 대통령이 얼마나 진지하게 협상에 임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특히 한국이 대화 국면에 참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한국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한 협상을 할 것인지는 더더욱 알 수 없다. 더욱이 북한은 7년 전보다 확실하게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미국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는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는 안보 문제에서도 예외가 아니다"라며 "트럼프는 한국과 충분한 조율 없이 미국의 안보 위협만을 해소하는 수준의 북·미 합의를 추진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능력을 제한하는 수준의 합의를 해놓고 '비핵화는 최종 목표'라는 입장을 유지하는 쉬운 길을 택한다면 한국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을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정부는 중단-축소-핵폐기로 이어지는 '3단계 비핵화'를 목표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 목표를 미국과 완전히 공유하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특히 중단과 축소 단계에서 장기간 협상이 고착되면 북한은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결과로 굳어지게 된다. 미국이 한국과 전략을 공유하고 조율하면서 최종단계인 핵폐기까지 중단없이 외교적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이미 무역 협상에서 보여준 트럼프 행정부의 동맹국 대우를 보면 더욱 회의적이다.
북핵 문제를 다뤘던 전직 고위관료 출신의 전문가는 "북·미 대화 재개 움직임은 교착 상태가 장기화되고 있는 한반도 정세에 변화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그 변화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위기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미가 전략을 공유하고 조율하는 긴밀한 공조인데, 현재 한·미 관계에서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opento@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