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와 우, GAL-TAN의 정치스펙트럼
정당 대표들의 연설을 본격적으로 분석하기에 앞서, 이들이 어떤 정치적 스펙트럼 위에서 자신들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에 적합한 분석틀로는 리즈벳 후헤(Liesbet Hooghe), 게리 막스(Gary Marks), 루스 다쏘네빌(Ruth Dassonneville) 등이 제시한 'GAL–TAN' 차원이 있다. GAL(Green, Alternative, Libertarian)은 자유주의적 세계관과 다문화주의, 환경주의, 시민권을 중시하는 반면, TAN(Traditional, Authoritarian, Nationalist)은 전통, 권위, 국가주의, 법과 질서를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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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24일 골목 카페에서 진행된 에너지절약 토론회. [사진=뉴스핌] |
이 개념은 최근 안나 조피 쿠렐라(Anna-Sophie Kurella)와 밀레나 라프(Milena Rapp)가 1990년부터 2017년까지 조사한 자료에 근거해 발표한 논문 "Unfolding GAL-TAN: the multi-dimensional nature of public opinion in Western Europe (West European Politics 2025)"에서도 구체적으로 정립된다. 두 학자는 유럽 시민의 정치적 가치가 단순한 좌우 축이 아니라 GAL–TAN이라는 다차원 공간 속에서 위치하며, 정당들이 이러한 가치 지형 위에서 전략을 세운다는 점을 실증 자료를 바탕으로 제시한다. 이 논문은 유권자들의 정치의식에 기반한 정당제도, 정당일체감과 정체성에 기반한 정당 간의 상호작용을 보다 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2025년 알메달렌의 연설을 기준으로 보면, 좌파진영을 대표하는 녹색당과 좌파당, 사회민주당은 명백히 GAL 축에 폭넓게 위치해 있다. 그들은 기후위기 대응, 사회적 약자의 보호, 이민자 수용, 국제협력 강화 등을 강조하며, 유럽 내부의 불평등과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적 성격을 진단했다. 가장 눈에 띄는 연설은 사민당의 막다레나 안데르손 당대표의 연설이다. 그의 연설은 전직 총리답게 현 우파의 재정정책을 과감하게 비판하면서도 감성적이었으며, 때로는 시적인 호소, 은유를 동원한 수사기법, 데이터 기반 정책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반면 우파진영을 대표하는 보수당, 기독민주당, 스웨덴민주당은 TAN 성향이 강했다. 국경 통제, 범죄 대응, 국가 정체성 보호, 국방 예산 확대 등을 중점적으로 다루었으며, 특히 스웨덴민주당의 연설은 문화적 국수주의적 언어가 두드러졌다. 하지만 보수당은 경제성장과 시장원칙의 회복을 중심에 두며, TAN 축의 전통적 성향과 자유주의적 색채를 절충하는 모습도 보였다.
중도당과 자유당은 그 중간 지점에서 균형점을 찾으려 했다. 자유당은 교육과 자유를 중심에 놓았고, 중도당은 지방분권과 농촌경제의 회복, 지속가능한 사회 모델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들 정당은 자신들의 정책이 갈등을 넘어선 통합의 가능성임을 강조하며, 분열된 유권자층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자임했다.
올해로 57회째를 맞는 알메달렌 정치축제는 많은 나라에 수출된 문화행사다. 미아 스튀레(Mia Sture) 알메달렌 조직위원장은 인터뷰에서 "현재까지 9개 국가에서 벤치마킹되고 있다"고 전했다. 독일,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뿐 아니라 중부 유럽, 발트3국, 아프리카 일부 민주주의 신생국에서도 이 모델을 참고하고 있다. 이들은 알메달렌을 단순한 행사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말로 가르치지 않고, 몸으로 체험하게 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알메달렌은 가능할까?
정치는 갈등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갈등은 대립이 아니라 해석의 차이로 받아들여질 때, 우리는 다시 토론을 시작할 수 있다. 정치가 나아가야 할 길은 정당을 넘어서, 정치적 언어의 정직함과 정책의 철학을 복원하는 일이다. 말이 진심을 담고, 정책이 가치를 품을 때, 비로소 정치와 시민은 다시 만날 수 있다.
비스뷔의 골목과 성곽, 해변의 천막과 광장을 오가며 마주친 수많은 장면들—한 노인이 나무 아래 앉아 연설을 듣는 모습, 아이들이 정치 퀴즈에 손을 들며 외치는 소리, 정치인을 향해 박수치며 질문을 던지는 시민들의 표정—이 모든 것은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살아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참여와 관심은 알메달렌이 단순한 지역 행사가 아니라, 스웨덴 전체의 정치 담론을 형성하고 사회적 의제를 설정하는 거대한 플랫폼임을 보여준다. 나아가, 이와 같은 정치 축제가 사회적 신뢰와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데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이 모든 경험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 것은, 알메달렌이 단지 연설과 토론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적 문화이며 민주주의의 살아 있는 교과서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열린 정치문화의 경험은, 변화하는 세계질서 속에서 한국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다시 묻는 계기가 된다. 진영을 넘는 협력,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기술과 기후에 대한 전략적 시야, 8개 정당 중 6명이 여성당대표로 선택된 정치적 메시지, 무엇보다도 시민과의 끊임없는 대화가 바로 그 좌표일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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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최지환 기자 = 최연혁 스웨덴 린네대학교 교수 |
*필자 최연혁 교수는 = 스웨덴 예테보리대의 정부의 질 연구소에서 부패 해소를 위한 정부의 역할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스톡홀름 싱크탱크인 스칸디나비아 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매년 알메랄렌 정치박람회에서 스톡홀름 포럼을 개최해 선진정치의 조건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그 결과를 널리 설파해 왔다. 한국외대 스웨덴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스웨덴으로 건너가 예테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런던정경대에서 박사후과정을 거쳤다. 이후 스웨덴 쇠데르턴대에서 18년간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버클리대 사회조사연구소 객원연구원, 하와이 동서연구소 초빙연구원, 남아공 스텔렌보쉬대와 에스토니아 타르투대, 폴란드 아담미키에비취대에서 객원교수로 일했다. 현재 스웨덴 린네대학 정치학 교수로 강의와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민주주의의가 왜 좋을까' '알메달렌, 축제의 정치를 만나다' '스웨덴 패러독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