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튼우즈 종료 후 최대 하락
지구촌 또 한 차례 화폐 변혁
[서울=뉴스핌] 황숙혜 기자 = 달러화가 상반기 10.8%에 달하는 하락을 연출했다. 지난 1973년 이후 52년만에 최악의 낙폭이다.
고율의 관세를 포함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경제 정책과 가파르게 늘어나는 재정적자 및 부채 규모를 둘러싼 우려가 배경으로 지목된다.
불안한 국채 수요와 달러화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미국이 꺼낸 카드는 스테이블코인이다. 지난 5월 미국 상원은 스테이블코인의 규제 및 제도화를 목표로 하는 이른바 지니어스 법안(GENIUS Act)를 통과시켰다.
시장 전문가들은 과거 50년마다 세계 화폐 질서가 커다란 변혁을 겪었고, 달러 기반의 스테이블코인 역시 또 하나의 변곡점이라는 데 공감대를 형성한다.
◆ 달러 브레튼우즈 체제 종료 이후 최악의 곤두박질 =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6개 바스켓 통화에 대한 달러화 가치는 10.8% 떨어졌다.
이는 상반기 기준 1973년 이후 최대 낙폭이다. 브레튼우즈 체제가 종료되고 주요국이 변동환율제를 채택하기 시작한 이후 달러화가 최악의 성적은 거둔 셈이다.
![]() |
2025년(검정)과 1986년(분홍), 1973년(노랑) 상반기 달러 인덱스 추이 [자료=블룸버그] |
(이른바 닉슨 쇼크로 금태환이 중단되면서 브레튼우즈 체제가 막을 내린 것은 1971년이지만 실제로 선진국들이 변동환율제를 이행하면서 체제가 완전히 종료된 시점은 1973년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시장 전문가들은 기록적인 약달러의 주범으로 트럼프 대통령을 지목한다. ING의 프란체스코 페솔 외환 전략가는 FT와 인터뷰에서 "달러가 트럼프 2.0의 종잡을 수 없는 정책으로 희생양이 된 셈"이라고 말했다.
중국부터 유럽 선진국까지 주요국 전반을 대상으로 한 관세 전쟁부터 감세 정책으로 인한 국채 발행 상승 가능성과 이에 따른 부채 증가까지 달러화의 안전자산 지위를 위협한다는 지적이다.
감세안을 담은 이른바 'BBB(big, beautiful bill, 크고 아름다운 법안)'이 상원 첫 관문을 통과했다는 소식에 달러화가 약세를 보인 것도 이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주요 외신들은 법안이 시행되면 10년간 미국의 부채가 3조2000억달러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 국채 발행 물량이 증가할 수밖에 없고, 이는 국채와 달러화의 입지를 뿌리부터 흔들 것이라는 경고다.
핌코의 앤드류 발스 최고투자책임자(CIO)는 FT에 "지난 4월 트럼프 대통령이 상호관세를 발표한 소위 '해방의 날' 미국의 정책 기조 측면에서 충격이 발생했다"며 "달러화가 기축통화 지위를 상실할 가능성이 크지는 않지만 하락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했다.
취리히 보험의 기 밀러 전략가는 "달러 하락 베팅이 가장 붐비는 트레이딩"이라며 "달러화 하락 사이클에 제동이 걸리기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 스테이블코인, 달러 대체하는 동시에 강화 = 19세기 후반의 금본위제와 2차 세계대전 종료와 함께 개시됐던 브레튼우즈 체제, 그리고 1971년 이른바 피아트 머니(법정 화폐) 및 변동환율제 시대의 도래까지 지구촌의 화폐 시스템은 꾸준히 변화했다.
암호화폐가 2008년 고안됐지만 이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화폐 시스템을 최근 들어서야 명확해졌다.
스테이블코인은 특정 화폐, 일반적으로 미국 달러로의 교환을 약속하는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암호화폐 자산으로, 코인 시장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2023년 8월 이후 2025년 초까지 스테이블코인 사용량은 84% 급증했고, 트럼프 행정부의 우호적인 입장이 성장을 더욱 가속화할 전망이다.
![]() |
미 달러화 [사진=로이터 뉴스핌] |
달러화의 입지가 위협 받는 가운데 블룸버그는 스테이블코인이 달러화를 대체하는 동시에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한다.
업계에 따르면 시가총액 기준으로 스테이블코인의 약 99%가 달러화 표시로 집계됐다. 이는 표준적인 국제 무역과 금융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훨씬 높은 비중이다.
규제 시스템이 미흡한 국가의 거래자들은 달러 기반의 경제에 참여하고 싶어 하지만 미국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달러 기반의 은행업에 접근하기는 쉽지 않은 실정이다. 이들의 자국 은행 시스템이 신뢰할 수 없거나 달러 지배력을 억제하기 위해 규제되고 있기 때문.
외국인들이 앱을 통해 빠르고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스테이블코인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는 것도 이 같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아직은 규제가 많지 않고, 거래자들이 원하는 수준의 규제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도 스테이블코인의 매력우로 꼽힌다.
이른바 '달러화(Dollarization)' 현상은 다수의 국가에서 확산되고 있다. 파나마와 에콰도르, 엘살바도르가 달러화를 채택했고, 아르헨티나의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 역시 달러화 채택을 공약으로 내세워 표심을 얻었다.
블룸버그는 스테이블코인이 이 같은 달러화를 가속화할 것으로 예상하고 몇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선진국 이외 지역에서 스테이블코인 사용이 증가하거나 일부에서는 부분적으로 '달러화' 또는 '스테이블코인화'가 나타날 수 있다는 관측이다.
자국 화폐와 달러 기반의 스테이블코인을 함께 사용하는 이중 화폐 경제가 늘어날 가능성도 열려 있고, 스테이블코인의 위험을 우려해 완전한 달러화를 선택하는 국가들도 나타날 수 있다는 의견이다.
인구 감소 역시 달러화 기반의 스테이블코인의 확산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꼽힌다. 출산율 하락이 국가의 재정을 위험에 빠뜨릴 여지가 높고, 반면 미국은 출산율과 무관하게 유능한 이민자들을 받아들일 수 있어 달러의 강한 지위가 유지될 것이라는 계산이다.
유럽 역시 러시아로부터의 안보 위협과 독일 및 프랑스에서 우익 포퓰리스트 정부가 등장할 가능성을 둘러싼 정치적 위험이 높아지고 있어 달러화 기반의 스테이블코인 사용이 확대될 수 있는 여건이라고 블룸버그는 진단한다.
지구촌에 또 한 차례 화폐 시스템 변혁이 전개되는 가운데 달러화가 더욱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블룸버그는 주장한다.
shhwang@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