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법원행정처 근무 당시 사찰문건 작성 지시 거부
이탄희 판사 “사직 마음 먹은 지 오래…처음부터 시작하겠다”
[서울=뉴스핌] 고홍주 기자 = 양승태 사법부의 법관 사찰 지시를 거부하면서 ‘사법농단’ 사태가 외부에 알려지는 계기를 촉발한 이탄희 판사가 2월 정기인사를 앞두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 판사는 29일 법원 내부 전산망인 코트넷에 “1월 초에 이미 사직서를 제출하고도 말씀을 드릴 수 없어 마음 앓았다”며 “이번 정기인사 때 내려놓자고 마음먹은 지는 오래되었다. 2년간 유예되었던 사직서라 생각하겠다”고 사표 제출 사실을 알렸다.
그는 “처음부터 정의로운 판사를 꿈꿨던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지기 싫은 마음으로 판사가 된 것도 같다”면서도 “하지만 일단 된 이상은 가장 좋은 판사가 되고 싶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법원 로고 /이형석 기자 leehs@ |
이 판사는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농단 사태에 대해 ‘헌법에 반하는 행위’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 시절 행정처를 중심으로 벌어진 헌법에 반하는 행위들은 건전한 법관사회의 가치와 양식에 대한 배신이었다고 생각한다”며 “법관이 추종해야 할 것은 사적인 관계나 조직의 이익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공적인 가치다. 가치에 대한 배신은 거부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번 물러서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좋은 선택을 한 뒤에는 다시 그 선택을 지켜내는 길고 고단한 과정이 뒤따른다는 것을, 진실을 밝히는 과정이 끝없는 노력과 희생을 요한다는 것을, 그때는 다 알지 못했다”면서 문건 작성 지시 거부 이후 힘든 시간을 보냈음을 암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시작만 혼자였을 뿐 많은 판사님들 덕분에, 그리고 나중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분들 덕분에 외롭지 않았다”며 “드러난 결과는 씁쓸하지만, 과정을 만든 한분 한분은 모두 존경한다.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 판사는 “저는 우리의 미래가 어둡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번 금이 간 것은 반드시 깨어지게 되어 있고, 결국 인생은 버린 사람이 항상 이긴다는 것을 저는 배웠다”면서 “깨진 유리는 쥘수록 더 아프다. 하루라도 먼저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저도 무엇을 하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생활하겠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그동안 마음으로 응원하고 지지해주신 너무나 많은 분들, 그 한분 한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했다. 최소한 밖에 하지 못하고 일어나게 되어 죄송하다”고 글을 끝맺었다.
이 판사는 지난 2017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기획2심의관으로 발령난 직후,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학술대회 저지를 위해 사찰 문건을 작성하라는 윗선 지시를 거부한 뒤 사표를 제출했다. 당시 법원은 이 판사의 사직서를 수리하는 대신 원 소속인 수원지법으로 다시 발령냈다.
언론을 통해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파문이 커지자 대법원은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세 차례의 자체 조사에 나섰다. 하지만 자체 조사는 “법관 블랙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고 종결됐다.
이후 김명수 대법원장은 “검찰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입장을 밝혔고, 검찰은 지난해 6월부터 수사에 착수해 당시 사법부 수장이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구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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