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극 ‘징비록’이 해석한 선조
지난달 14일 방송을 시작한 KBS ‘징비록’은 1일 6회를 맞았다. 이날 방송에서 정철, 윤두수를 필두로 한 서인들은 이산해, 류성룡 등 동인들과 첨예하게 맞서며 국본을 세워야 한다고 진언했다.
선조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머리를 조아리고 국본을 세우라 간하는 정철의 뒤통수에 대고 “내가 이리 강령한데 뭐가 걱정이오?”라고 호통쳤다. 정철과 윤두수 등 동인들이 국본을 세워 왕권을 견제코자 함을 간파한 선조는 “솔직히 세자들 중 맘에 드는 인물이 없다”고까지 이야기했다.
‘징비록’ 초반까지 김태우가 해석한 선조는 무척 신경질적이고 정략적이다. 특히 카리스마가 넘친다. ‘징비록’의 선조는 자신을 견제하려는 정철의 속셈을 알면서 끈기 있게 기세를 누를 기회를 엿본다. 여기에 동인과 서인의 대립을 이용해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 한다.
‘징비록’ 6회에서 선조는 청렴함이 거듭 밝혀진 류성룡을 좌상으로, 본의 아니게 그의 청렴함을 돋보이게 한 윤두수를 병판으로 승급시켰다. 서인의 영수 정철은 “주색을 지나치게 밝힌다”는 이유를 대며 한직으로 물러나게 했다. 정철이 뜸을 들이자 선조는 “잠시 물러나는 건데 그마저도 못하겠냐”고 반 윽박지른다.
물론 임진왜란이 벌어지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 역사에서 선조는 조선조 최초로 수도를 버리고 피난길에 오른 무능한 군주로 서술된다. ‘징비록’이 임진왜란을 다루기 시작하면 선조의 날선 이미지도 바뀔 가능성이 있다. 이 같은 변화는 왜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돌아온 조선통신사의 의견대립이 예고된 ‘징비록’ 7회에서 읽을 수 있을 전망이다. 상반된 조선통신사의 진언에 표정이 멍해진 선조를 보면, 김태우의 캐릭터 변화도 점쳐지는 상황이다.
■역사가 기억하는 선조
안타깝게도 선조는 고종과 더불어 역대 조선의 왕 중 가장 무능한 인물로 평가된다. 두 왕은 각각 임진왜란과 외세가 득세한 구한말 등 격동의 시기를 거친 공통적인 아픔을 안고 있다. 당시 선조와 고종은 왕권의 약화와 상실을 온몸으로 겪었다.
선조는 조선의 왕 27명 중 직계가 아닌 방계 출신으로 처음 왕위를 계승했다. 방계 임금의 시초인 셈이다. 때문에 대신들은 정통성이 약했던 선조를 쥐고 흔들기 위해 정쟁과 당쟁을 대놓고 일삼았다.
역사는 임진왜란 전후의 선조 통치를 저평가한다. 선조는 통치 초기 선정을 베푼 영민한 왕으로 기억됐지만 이후 기축옥사와 당쟁을 기점으로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특히 왜의 침략에 대비하지 못한 점이 오점으로 남았다. 조선통신사를 보내며 일본을 견제하고자 했지만 “방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만 믿고 뚜렷한 방책을 세우지 않았다. ‘죽기는 쉬워도 길을 얻기는 어렵다’는 자세로 싸운 동래부사 송상현과 왜병의 총탄에 쓰러지면서도 죽음을 숨기라 명한 이순신 등 명장이 없었다면 조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완전히 정벌 당했을지도 모른다.
■선조는 지나치게 저평가됐다?
선조는 왕위를 계승하기 전 무척 영민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중종의 서자 덕흥군의 셋째 아들인 선조는 하성군 시절 명종이 다음 왕으로 점찍을 만큼 기지가 넘쳤다고 한다. 어린 하성군이 머리 크기를 알아본다며 짐짓 익선관을 내준 명종의 의중을 간파하고 이를 쓰지 않은 일화는 유명하다.
명종은 적통 순회세자가 어린 나이에 죽자 크게 상심했다. 본인도 건강이 좋지 않아 후사가 염려되던 명종은 성품과 기개가 남다른 하성군을 다음 왕으로 사실상 낙점했다. 결국 명종은 하성군을 언급하지 못하고 승하했지만, 인순왕후가 명종의 유지를 받들면서 하성군은 선조로 즉위한다.
임금이 된 하성군이 언제부터 무능한 왕의 아이콘에 됐는지는 역사가마다 주장이 다르다. 단, 임진왜란 당시 한양을 버리고 달아날 때 선조를 따른 대신이 몇 없었다는 점이 그의 무능함과 인덕을 말해준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다른 작품 속 선조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징비록’의 선조는 무척 강경하고 당쟁을 역이용하는 등 기지가 넘친다. 김태우의 연기가 돋보이는 선조는 다른 작품에서 어떻게 해석됐을까.
최근 종영한 KBS 2TV ‘왕의 얼굴’에서는 이성재가 선조를 열연했다. ‘왕의 얼굴’에서 선조는 용상을 지키기 위해 아들 광해군(서인국)을 견제하는 다소 속 좁은 인물로 그려졌다. 물론 ‘왕의 얼굴’이 팩트에 기반한 허구, 즉 팩션이긴 하지만 선조의 무능함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1986년 10월부터 6개월간 방송한 MBC ‘조선왕조 500년’ 임진왜란에서는 중견배우 현석이 선조를 연기했다. 당시의 선조는 왜의 침략에 방비하지 않고 대신들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이미지가 강했다. 이병훈 PD가 선조에 현석을 기용한 것은 선한 이미지가 아무래도 우유부단한 선조와 잘 맞았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MBC 인기사극 ‘허준’에선 박찬환이 선조를 연기했다. ‘허준’이 당쟁과 전란에 휘말린 왕실에 초점을 둔 사극이 아니기에 당시 박찬환은 평범한 왕으로 비쳐졌다. 여담이지만 ‘허준’에서는 박찬환보다 공빈 김씨를 연기한 박주미가 크게 인기를 얻었다.
MBC의 또 다른 퓨전사극 ‘불의 여신 정이’에서 선조(정보석)는 어렵게 오른 왕위를 지키기 위해 갖은 수를 마다하지 않는 정치가로서 면모를 부각했다. 2013년 MBC ‘구암허준’에서 전노민이 연기한 선조는 공빈 김씨를 아끼는 이미지가 강했을 뿐 존재감은 미미했다.
[뉴스핌 Newspim] 김세혁 기자 (starzooboo@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