삵쾡이의 눈이라도 좋다. 독사의 눈이라도. 똑바로 보자. 학습과, 지성과, 섣부른 초월이 다 싫다. 갈 때까지 간 한국 경제가 시원하다. 어제 큰소리 친 신임 부총리가 오늘 완전히 무시당하는, 냉정한 국제 자본시장이 통쾌하다. 사람 속에서 나오는 논리나 철학, 정책이 느끼하다. 한 방의 주먹이나 망치, 식도, 그 찰라의 긋는 소리만이, 이 처량한 빗소리마냥, 가슴에 닿는다.
현주, 사랑한다. 마음의 채널이 이리저리 돌려져도, 부정되지 않는 마음이다. 사소한 바람에도 크게 흔들리는 네 가슴을, 한 대 치고도 싶다. 후련하게 때리고, 그 다음에 푸근히 안아주는, 그 시원시원한 애정을, 왜 난 배우지 못했을까.
네가 떠나도, 난 자책만 할 뿐이다. 내 삶이 가증스런 붕대로 나를 압박하고 있다. 비행기 타고 해외로 떠나듯, 저승으로 훌쩍 떠나고 싶다. 주혜야, 경혜야. 나를 이승에 묶어두는 귀여운 딸들아. 세상에 쉽게 무디어지지 못하는 아빠 가슴은, 삶이 이리도 괴롭고, 생생하기도 하구나. 아빠를 계속 살아 버티게 해다오. 너희들 모습 그대로, 씩씩하게 자라거라. 세상에서 배울 것 없이 커져버린 아빠가, 너희들에게 모두 배운다. 부끄럽구나, 아빠가. 너희들에게 가끔 큰소리 치고도, 늘 후회하고 반성하는 못난 아빠란다.
엄마는 지금 어떤 감정에 빠져있는지, 혼란스러운지, 소식이 없다. 너희에게도 소식 없니? 무소식이 희소식이겠지. 불쌍한 그 사람에게도 길을 터주려는, 착한 번민이겠지. 아빠는 너희 엄마를 사랑한단다. 그 남자가 지니고 있는 사랑 정도에 비할 바 없는, 크고 고귀한 사랑을, 아빠는 너희 엄마와 너희에게 갖고 있단다. 오늘 외롭더라도 참아라. 엄마는 돌아올테고, 내일은 우리 여행 떠나자.
11시 10분.
창밖의 비는 속살 보이듯 보이는데, 너희 엄마는 보이지 않는다. 내게 장막을 치며 살고 있다. 그걸 거둬내면, 그 안에 또 몇 겹의 장막을 둘둘 두른채, 추워 떨고 있다.
작은 여자. 자그마한 어깨에 갸름한 얼굴. 작은 여자가 정말 큰일을 저질렀구나. 두려움마저 사라졌구나. 나도 감당하기 어려운, 극도의 충동과 분열을 껴안은채, 모질게 견디고 있구나
견디는 감정은 무엇이고, 견디다 못해 무너진 감정은 무엇인가. 소생 못 하도록 무너진 가슴을, 그 작은 체구 어디에 감추고 십년 살았는가. 어찌할지 모르게 치달린 그 남자에 대한 감정은, 또 어디에 감춰두고, 눌러두고, 정리해 나가는가. 뒤죽박죽인 감정들을, 뒤죽박죽이지 않게 정리하느라고, 힘들어 하니? 이 밤늦은 시간에.
아스팔트 검은 물 칠 위에 네온싸인 번쩍이니, 혼란한 빛깔이 춤을 춘다. 내 마음 같다
주혜에게 전화하니, 외롭게 잠들려 한다. 가장인 내가 죽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가정이 파괴되어서도 안 된다. 이 애틋한 애정이, 왜 타인에 의해 무참히도 흔들리는가. 내가 소홀했던 것에 대한, 엄청난 결과를 받는구나. 칼을 댈 수 없는 시대에 사는 것이 비겁한 것만 같고, 칼을 댈 수 없는 내 본능의 구조가 비겁한 것만 같고, 아내의 상처를 더 이상 덧나게 할 수 없도록 인내의 갈구함으로 기다리자니, 가끔씩은 몰아치듯 짜증이 나기도 한다.
글로 풀기도, 이젠 역겹다. 생활 속에서, 당당한 사회인으로서 풀어나가야 하는데, 명퇴의 직전에 서서, 너무 초라한 모습이 되었다. 내 삶을 멋지게 디자인할 수 없는, 더럽혀진 화폭에 누워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