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내 손엔 아내가 아끼던 탁상시계가 들려 있었고, 나는 그것을 방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깨져나간 유리 파편, 오밀조밀한 부품, 시간의 유해들......아내는 입을 다물었고, 장롱 깊숙이 숨겨놓은 통장과 도장을 건네주고, 텔레비전을 끈 다음 나가버렸다.
“엄마, 나가지마”
아이들은 울며 대문가로 달려나갔다.
“아빠, 엄마 데려와” 하며 내게 이내 달려와 애절하게 말했다. 나는 나가지 않았다. 책상에 놓인 통장과 도장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아까 떠오른 시상이 더 발전되어 있는 형상을 백지에 미친 놈처럼 끼적대고 있었다.
사실 나는 끝없이 끼적댔고, 끝없이 책을 읽어댔다. 안암동 지하 교회에서 너무도 뜨거운 불에 마음을 데인 후로는, 아니 어디에서 기원하는지 알 수 없는 갈증 속에 수도 없는 이질적인 책들을 가로질렀다. 그래도 그 깊은 갈증, 그랜드 캐년보다 깊게 파인 균열이 채워지지 않았다.
읽을수록 더 깊게 패어졌다. 더 읽어야 했다. 책들 사이의 긴장, 차이, 단절을 뛰어넘으며, 책 속에 숨은 비밀, 숨결, 침묵들을 냄새 맡으면서. 아무리 읽어도, 아무리 심오한 책이라도, 읽을 때는 시원한데 읽고 나면 한 장의 파스일뿐, 내 마음의 불을 식혀주지 못했다. 그렇게 책들은 쌓여갔고 실내 공간이 적어 책장 속에 빽빽이 박혀 있다가 정기적으로 수없이 내다버려져야 했다.
나는 소파에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의 탐독, 갈증, 몰입, 방황에 대해 아내는 늘 관대했고 다 포용해주었다. 그러는 사이 점점 텔레비전에 의지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내가 어질러놓은 방들, 그것들을 무릎에 멍이 들도록 닦았다. 내가 술 취해 밤늦게 돌아와도 어디에서 누구와 먹었는지 캐묻지도 않았으며 자기도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IMF 직전의 불안 속에 가정 경제에 일조하겠다고 뛰어든 Q회사의 네트워크 마케팅 사업. 그것마저 모진 시행착오 후에 결국 꼬꾸라지면서 그 모든 파장과 직격탄을 온몸으로 맞아야 했던 아내.
그런 속에 눈에 들어온 한 장의 편지. 대학 시절 아내가 최영호에게 보낸. 빛 바랜, 파란색 볼펜으로 또박또박 눌러쓴.
까맣게 잊고 있던 그것을 최영호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가 보여준 가벼움에도 그만, 따스함이 그리워, 감격해 버리고만 현주.
"현주가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후부터 줄곧, 울면서 저에게 전화했어요....”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매캐한 유황 냄새 가득한 폐광이 아내의 섬세한 가슴 속에 생겨난 것이. 아내와 나 사이에 금이 그어지기 시작한 것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