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단순한 세 개의 단어가 만드는 암호의 세계는, 그 안에서 무수한 의혹과 질문이 생겨날 수 있는 생성의 우주요, 동시에 그 질문들에 대해 답은 커녕 점점 더 혼돈 속으로 질문뿐 아니라 나 자신마저 먹어치울 소멸의 블랙홀이었다.......그 공허한 생성과, 소멸의 심연 속으로, 나는 이따금 대책 없이 빨려들어가 고통스럽게 허우적거리긴 했지만, 그 안에 삼켜지진 않았다. 그리고 나 자신이 이런 난처한 문제를 가지고 아내에게 따지고 들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손짓, 눈짓, 몸짓이란 말이 나올 때 이미 끝난 것이었다. 내가 설 땅이 한 티끌도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그 앞에 토를 달거나 숨소리를 내는 것조차 무의미한 일이었다.
손짓, 눈짓, 몸짓의 그 말에서 손짓은 이미 아내가 최영호와 더 이상이 없는 깊이에 닿은 말이었다. 손짓이란 말은 최영호가 더 없는 매료를 느꼈듯 그 둘만의 나라이며 둘만의 우주였다. 서로 몸을 섞어 잤든 아니든 그런 말이나 생각조차 연기로 흩날려버릴 용광로가 그 말이었다. 그런 우주적인 손을 서로 잡고 시간 속에 잠겨 있는데 그 이상 아름답고 절실한 것이 또 무엇이 있으랴. 그런 절대적인 언어. 간결하면서도 그 모든 것을 포함한 말을 듣고도 내가 사라지지 않은 것이 문득 부끄럽고 치졸스럽게 여겨졌다. 내가 나를 속이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안에 타오르는 불꽃이 질투인지 사랑인지 헷갈렸다. 질투는 분명 들어 있다. 질투가 녹아 있지 않은 순수 사랑만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일 것이다. 질투가 섞여 있긴 하지만 그에 동반된 원액의 투명성이 나는 궁금했다. 그러나 내가 내 마음을 깊게 들여다 볼 생각도 나지 않도록 사랑이라는 말이 깊은 우물에서 물이 솟듯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뒤늦었지만 사랑이고 빼앗겼지만 사랑이다. 돌연한 부재나 순간적인 이탈로 인해 생긴 반발적인 마음은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내 마음 속에서 비탄의 눈물이나 독화살 같은 기운이 섞여 나오지 이처럼 다사롭고 애틋한 밀물은 흘러나오지 않는다.
사랑은 굳이 그림으로 따진다면 유화일까, 수채화일까.
하나의 물감이 다른 물감을 덮어 눌러버리는 유화. 과거의 물감은 현재의 두툼한 질료 아래 묻혀버리고, 새로 칠한 물감만이 두드러지는 그림. 과거의 시간은 소통이 아니라 단절이며, 오직 현재의 시간만이 명료하고 강렬하게 부각되는 그림. 그리고 물감을 포개 그리는 수채화. 색칠한 물감 아래 과거의 물감이 드러나는 그림. 과거의 시간은 배제나 매장의 대상이 아니고 현재의 배경이 되어 현재를 비추며, 현재의 시간 속에 녹아 자신도 현재화되는 그림.
나는 유화의 명징함으로서의 사랑을 좋아하지만, 사랑이 수채화일 수 있음 역시 믿는다. 나의 첫사랑은 유화였을 것이다. 내 가슴 깊은 곳에 영원히 묻어두고 싶은. 강렬하고 배타적이며 다른 이야기와 섞이기 싫은. 지독하게 아팠으며 까무러치게 아름다왔던. 그러나 그 유화 같은 첫사랑은 시간이 흐른 지금, 수채화로도 보인다. 담백하고 산뜻하게. 물 흐르듯 잔잔하게. 깊게 묻어두었던 감성의 비밀들이 선연하고 묽게 드러나 보이는...그것은 시간의 신비일까.
아무튼, 첫사랑의 기억을 통해 닦인 내 내면 풍경이 맑아진 것 같아 기분 좋다. 아픔은 아픔 자체로 내가 모르는 사이 스스로 숙성하여, 나를 길들이고, 내 엉킨 머리를 빗질해 준 느낌이다. 그 맑아진 내면의 수채화 속을 지그시 바라보면, 또 다른 시간들이 보인다. 아픔이나 그리움이 내 마음에 물들기 이전의 은은함들. 아내, 혜진을 알기 이전의 나. 집이 몇번씩 망하기 이전의 단란함들. 어릴적 정에 넘친 어머니의 따뜻한 품 속. 화단에 핀 포도송이를 바라보며 마음 속에 새콤한 향기가 번지던 유년의 시간. 장독 위에 내리는 하얀 눈을 낯설게 바라보던 시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