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진아, 방학 때 기타 배워라”
“나 하나 칠 줄 알아”
“뭔데?”
“로망스”
“그런 거 말고 신나는 거 배워라”
“왜?”
“그럼 명랑해질 거야”
이유 없는 이별과, 이별 속의 아름다운 은유들. 내일이라도 다시 만나 또다른 은유나 시로 이어질 것 같은 절망의 언어들. 우리는 마지막까지 너무 아름다우려 했어. 너무 시적이었어. 그건 잔인한 거야. 끝나도 끝나지지가 않잖아. 우리의 말들이, 스스로 지속하는 이미지의 힘으로, 우리 가슴, 적어도 내 가슴속에 끝없이 맴돌고 있잖아. 시간이 흘러도 시간의 강물에 녹지 않는 뼈아픈 사랑의 노래. 풀리지 않는 가슴과 지독한 기다림의 시간들.
밤새 비가 왔다. 5월의 초여름 비가 달콤했다. 아파트 실내의 불을 끄고, 빗소리 들으며 누워있다. 반은 잠들고 반은 깬 몽상의 시간이 즐겁다.
감동에 젖는다. 사람들이 사랑스럽다.
시청역 지하철 플랫폼에서 헤어졌다. 가슴이 뛰었다. 아쉬움을 좀더 끌고 싶었지만, 망설이며 그녀를 보냈다. 십년 지나 또 우연히 만나자, 라고 그녀는 십몇 년 전과 똑같은 말을 했다. 나는 그 우연의 필연을 믿는다. 이상하게 그렇게 되고 있다. 예기치 않게, 지하철 안이나 종로서적 앞에서,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빛과 수척한 모습으로 다가오곤 했다.
남자에 대한 호기심도, 욕망도, 나이가 주는 정념도 없는 듯한, 그 억제로 인해 내 가슴을 폭우로 들끓게 만드는 여자. 이상한 여자다. 그녀는 항상 내 몽상의 곁에 서 있었다. 열아홉 소녀의 모습으로. 그 모습은 나를 그 또래의 소년으로, 청년으로 못 박았다. 사십이 되어가는 나이에, 그녀 앞에서 난 열아홉의 언어를 기쁘게 주절거리고 있었고, 그녀 역시 재미있게 듣고, 나누곤 하였다.
이 여자가 불문학 교수인지, 유부녀인지, 그런 세속의 티가 하나도 언어나 표정에 묻지 않았다. 초등학교 6학년 1반 여학생처럼 그저 열심히 공부하고 혼자 웃고, 괴로와도 참는 모범생.
난 왜 이 무미건조한 모범생을 사랑하였나. 단정한 치마와, 가는 안경테. 간결한 미소와 차분하고 고상한 얼굴. 어디론가 한없이 부풀고 싶은 바람이. 하얗게 흘러넘쳐 누군가를 진탕 취하게 하고 싶은 생맥주 같은 내가.
대학 일학년 여름방학 때 청주 교동집에 내려와 섣부른 소주를 마셔댔고, 정태춘의 <촛불>을 키타로 튕기며 보냈다. 그러다가 그녀의 생일에, 돌연 벽돌공장에 나가 벽돌을 날랐다. 뭔가 그녀를 위해 해야 할 일이 평범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정신보다는 육체의 혹독함 속을 걸어가야 할 것 같은. 그리고 시대의 불의 속에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그런 마음으로 하루 열 시간 이상 열흘간 벽돌을 날랐다.
댓가로 받은 십만 원으로 제일 먼저 하이네의 시집을 샀다. 나머지로 혁과 함께 남해의 섬들로 여행을 떠났다. 돌아와 부평까지 올라가 생일선물로 시집을 건넸다.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로. 너를 위해선, 어떤 고생도 할 수 있다는 암시 섞인 미소와 함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