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숙을 포함한 몇명의 남녀그룹으로 어울리다가 점차 둘만의 관계로 발전했다 한다. 최영호. 가난한 집에 아버지마저 여읜 외아들이라 어렵게 공부하면서도, 현주를 위해서만큼은 모든 것을 다 해주었다고.
한때는 하루도 안보면 서로 허전해 일 년 정도를 매일 붙어다녔다고. 착하고 희생정신이 강한데 집착이 지나치게 강하다고. 사랑하지만 매이는 것이 부담스러운 이십 대 초의 발랄한 여자와 그럴수록 강하게 사로잡으려는 집요한 남자. 불안을 참지 못한 그는 한번은 현주 집 담을 넘어 들어와 자기 복부에 칼을 그으며까지 사랑을 호소했다 한다.
그런 그에 대해 현주는 미어지게 아프면서도 감당이 되지 않아 결국 도망치듯 떠가게 되었고, 떠나간 여자를 잊지 못해 그는 술로도 달래보고 숙에게 결혼 후의 거처까지도 수소문해 보았다. 그렇게 흘러간 세월.....바로 그 여자가 십 몇 년의 장막을 찢고 건조한 안과병원의 일상 속으로 훌쩍, 애틋한 향기를 발하며 뛰어들었을 때의 당혹과 놀라움. 하루하루 마모되어 가고 뭔가를 잃어가는 듯한 정체 모를 상실감이 뜻밖의 밀회로 터질듯이 충전되어 갔을 시간들.....
한 여자의 생명을 두고 양쪽에서 두 남자가, 생명 같은 사랑을 달라고 자기 생명을 버리려 하고 있다. 완전한 외통수에 걸려버린 여자, 인 내 아내.
화사한 봄바람이 여름의 정열적인 폭풍으로 돌변하기까지 두 사람 사이의 몇 개월의 내막을 나는 잘 모른다. 그 은폐된 막, 무겁게 내려진 천막 밑자락을 들어올려 안을 살짝 들여다보기만 해도 나는 어질어질하다.
그 가려진 막은, 아내와 나 사이의 영원한 베일이며 수수께끼이다. 늪이며 안개이며 갯벌이다. 자칫 그곳에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고 만신창이가 되도록 뒹굴며 온몸에 흙탕칠을 해야 할 것이다. 인생이나 운명이 예리한 칼로 싹둑 그어 나누면 그만인 단지 유리나 종이 같은 것인가.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할 때가 다분하겠지만 이번 일은 다르다. 아내와 나, 그 남자 모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치유될 수 없는 중병 상태인 것이다.
최영호. 그와 만난 것은 얼마 전 아파트라는 허구의 공간에서 새벽 한 시에서 네 시까지가 전부이다. 그가 볼 때는, 자기가 현주와 나 사이에 끼어든 것이 아니라, 내가 현주와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다. 십 년간의 결혼 생활이나 그동안 결집되고 축적된 의미들을 그는 인정하지 않았다. 내 아내 역시 그러한 중요하고 실제적인 덩어리들을 ‘기득권’이라는 한 마디로 정의하는 위험한 심리 상태에 놓여 있었다.
나로서는, 존재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 내동댕이쳐지는 경악스런 사건이지만 그들의 공범의식에, 묘하게도, 쉽게 지울 수 없는 공감이 간 것도 사실이었다. 진실이란 시간의 길이나 현실적인 관계망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진실이 없는 롱텀한 시간 속의 굴욕보다는 진실된 짧은 순간 속에 생사를 결단하는 것이야말로 용기라는 생각은 사실 내 마음을 지배해 온 것이기도 했다. 그들의 생각이 또다른 중요한 맥락을 놓치고 있고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있는 면을 빼놓는다면 내 가치관과도 맥이 닿아있는 그들의 진실스러움을, 단지 내 목을 겨냥하고 있다는 적의로 인해 배격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인간사에 있어 이해의 폭은 어디까지여야 하나. 적어도 이런 삼각관계에 있어서. 그리고 이런 류보다 단순하거나 복잡할뿐인 대다수의 인간관계에 있어서. 나는 아내를 이해할 수 있었고,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 몸을 허공에 허무한 공기로 풀어버려 소멸되고 싶을 지경에 이르도록 나는 그들의 사랑을 이해해야 하나. 그렇게 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그렇다고 이해가 아니라면 다른 어떤 걸로 이 재앙을 극복한단 말인가....인간과 세상과 우주를 알기 위해 철학의 화살을 높게 쏘아올린 내게 이 화살이 내 정수리를 향해 떨어져 내려오며 복수를 해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