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의 회사 분위기가 이토록 어지러운 판에, 최영호는 우리 집에 수시로 전화를 해댔다. 거실까지 이미 들이닥친 적이 있기에 아무것도 거리끼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라는 존재는 완전히 무시되거나, 아예 문제시 되지도 않았다.
“현주 바꿔주세요”
다짜고짜 그게 다였다.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절간이나 전화박스, 공중변소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내 가정과, 나라는 존재가. 하루 아침에.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바꿔주곤 했다.
“그 사람 눈이 멀 것 같애”
이런 상황 속에 아내가 말을 던졌다. 며칠만에 집에 들어온 것에 대해 아무런 변명도 없는 데다가 뜬금이 없어 가슴이 먹먹해왔다. 그게 나에게 할 소리인가. 지금의 내 상태는, 그와 너로 인해 심리적 파탄이나 공황, 원한, 보복으로도 갈 수 있는 상태 아닌가. 그런 궁지에 몰린 내게 도리어 그에 대한 동정을 구하는듯한 이율배반적인 의연함에 심장 한쪽이 꼬여 들어갔다.
더구나 아무런 맥락도, 반성의 기미도 없이. 아내는 물론 단순했을 것이다. 불행에 빠질 수 있는 누구나에 대한 섬세한 연민. 최소한. 하지만 아내의 그 선한 심성이 평소답지 않게 사리판단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는 불안한 직감 속에 아내의 상태가 뭔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일순간 스쳤다.
안과전문의인 그로서 눈이 먼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다. 그것은 피아니스트가 손을 잘리는 것, 정치가가 혀를 잃는다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차라리 자기 눈이 멀길 바란다고 현주에게 말했다 한다. 그러면 불쌍해서라도 현주가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겠냐는 심정으로.....
나보다 삼년 아래인 비슷한 세대의 그. 평이한 중년으로 굳어가는 나이에 황홀한 반란과도 같은, 첫사랑 여인과의 생각지도 못한 재회. 불행해 보이는 그녀. 여전한 아름다움. 마음 깊은 곳에 흉터처럼 도사리고 있는 비밀스런 추억들과 애달픔. 우연히 다시 만나 설마, 설마 하며 그래도 서로를 추스려주던 사이 어느 순간,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을 정도로 달아올랐을 뜨거움, 번민. 그 깊은 갈증을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절정에선, 위반을 통해서라도 불지를 수밖에 없었을 애련의 장작불. 아픈 사랑.
그런 중층의 사연들로 인해 몇 달 내내 밤잠 못이루고 같이 듣던 팝송에 마음 녹이며 술 퍼마시고, 낮엔 낮대로 신경 곤두세우는 안과일에 집중해야 하다보니 시신경에 이상이 생기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자신의 파멸을 원하는 그. 눈이 멀어, 어렵게 획득한, 유일한 직업인 안과직으로부터도 버림받아 그대로 사랑받는 폐인이 되고자 하는 이카로스. 자기의 가장 아까운 것을 버리면, 떠나간 옛사랑이 불쌍해서라도 되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순정. 순수하고도 불길한 도박. 그는 생명을 건 위험한 도박을 감행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당돌하고도 무모한 돌진이 공포스럽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했다. 사랑이 뭐길래 이 늦은 나이에 멀쩡한 중산층 의사를 돈키호테로 만드는 것일까. 하지만 그의 무모한 순진성에는 진한 연민 같은 것도 함께 느껴졌다. 단호하게 물리쳐야 하지만,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게 하는 묘한 흡인력. 그런 것들이 그에 대한 착잡한 연민 속에 배어나오는,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첫사랑. 무던히도 그리웠을 것이다. 아내에게 물었을 때, 아내는 이런 정도로만 얘기해 주었다. 대학 1학년 때 진주 경상대학 캠퍼스에서의 만남. 나도 그곳에 가본 적이 있다. 대학 4학년 여름방학 때.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고 고풍스런 일제식 건물들과 화사한 꽃들이 연하게 젖어 있었다. 그때 우산을 쓰고 내 곁을 지나간 후레시한 커플 중엔 그와 현주도 있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