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변호사, 청문회 스타로 현대 정치사에서 개혁의 상징이자 ‘이단아’였던 노 전 대통령은 변호사에서 국회의원, 그리고 대통령이 되기 까지 정치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 ‘바보 노무현’에서 ‘시민 노무현’으로
부산상고 출신의 노 전 대통령은 제17회 사법시험에 고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합격한 뒤 1981년 '부림사건' 변론을 맡으면서 인권변호사로 변신했다.
초선의원 시절인 1989년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 비리와 관련한 청문회에서 그는 '전두환 살인마'를 외치며 전 전 대통령을 향해 의원 명패를 집어 던졌고 일약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1990년 3당 합당 당시에는 '역사적 반역'이라며 당시 김영삼 총재를 따르지 않고 당에 잔류하는 등 자신만의 고집을 지켜왔다.
이후에도 권위주의 청산, 지역갈등 타파 등을 외치며 자신의 색깔을 지켜왔고 2003년 2월, 대한민국의 21세기 첫 대통령이 됐다.
임기 동안에도 우리 정치사 최초로 탄핵을 맞이하는 등 결코 적지 않은 시련과 절망 을 겪어야 했지만 2008년 2월, 임기를 마친 직후 봉하마을로 귀향함으로써 ‘시민 노무현’으로 국민의 관심을 받아왔다.
그러나 최근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과 연루된 부패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아 오던 노 전 대통령은 결국 이날 오전 “너무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원망하지 마라”는 유서를 남긴 채 봉하산 아래로 몸을 던졌다.
하야와 암살, 구속 등 전직 대통령의 비극적인 말로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왔지만 최초로 ‘자살’을 택한 전직 대통령으로 기록되고 만 것이다.
◆ 부패혐의 사건, 진실은 어디로
이번 사건으로 인한 사회적 파장은 물론 정치, 경제 등 전반적인 영향이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여권은 이번 사건이 향후 민심의 향배로 작용할 것임을 우려하면서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최근 두 달 동안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가 강화된 것이 직간접적인 원인이 됐다는 동정론이 강해지면서 그 화살이 검찰 및 현 정권으로 쏠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한편 검찰은 최근 기존의 600만 달러 외 40만 달러에 대한 추가 의혹을 제기하면서 수사를 진행해왔으나 김경한 법무장관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관련 수사 종결을 선언했다.
그러나 전임 대통령을 죽음으로까지 이르게 한 사건의 진위가 수사 중단으로 묻혀지는 데 대해 오히려 의혹과 궁금증이 증폭되는 결과를 나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