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스트 그린스펀 시대’의 ‘버냉키 스탠더드’
이상에서 그린스펀 시대의 유산을 살펴보았지만, 버냉키 스스로도 그린스펀의 계승을 자임하고 있다. 그 핵심이 바로 ‘리스크 관리 패러다임’이다. 실제로 취임을 전후한 각종 증언이나 강연 등을 통해 버냉키는 그린스펀의 유산으로 여기에 주목하며, 이런 정책 전략의 계승․발전을 역설해 왔다. 그리고 연준 이사 시절에도 이를 자신의 이른바 ‘전망 기반 패러다임’으로 흡수하려는 시도를 감행한 바 있다.
게다가 그의 취임과 더불어 최대 현안으로 부상하고 있는 인플레이션 타겟팅과 관련해서도, 사실 버냉키는 이를 그린스펀 시대의 성과를 “제도화”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미 지난 2000년 초 다른 논자들과 공동으로 기고한 한 칼럼을 통해 그린스펀의 퇴임 후 “통화정책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려면” “그의 성공적인 정책들이 지속될 수 있도록 보장할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며, 인플레 타겟팅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이를 통해 “그린스펀과 그의 전임자 볼커의 재임 기간에 걸쳐 미국 경제에 크게 기여한 물가 안정 의지를 의장의 개인적인 취향에서 벗어나 공식적인 정책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
이처럼 버냉키와 그린스펀간의 연속성이 일단 주목을 끈다. 하지만 역시 이런 “제도화” 혹은 “체계화” 과정에서는 언제나 일정한 왜곡이나 와전, 수정이 불가피한 법이다. 그리고 서로 간에는 무게 중심이나 포커스에서 일정한 차이가 있고, 나아가 성향이나 기질 차이도 간과할 수 없다.
특히 그린스펀은 감각적, 전략적인 성향이 강한 반면, 버냉키는 학구적, 정책적인 성향이 돋보인다. 또 그린스펀은 현실, 유연성, 리스크 관리를 중시하는 반면, 버냉키는 전망, 패턴, 커뮤니케이션과 기대 관리에 집중한다. 나아가 그린스펀의 독단적인 기질과, 컨센서스를 중시하는 버냉키의 태도도 큰 차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그린스펀 스탠더드’보다는 일종의 ‘버냉키 스탠더드’(Bernanke Standard)가 오히려 한층 명료한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제 ‘포스트 그린스펀 시대’의 ‘버냉키 스탠더드’ 혹은 ‘버냉키노믹스’를 구성할 몇 가지 쟁점을 살펴보자.
우선, 그린스펀의 유산 중 한 가지 핵심은 ‘리스크 관리 패러다임’으로, 버냉키도 이를 ‘전망 기반 패러다임’으로 수용한다. 하지만 양자 간의 관계는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다. 이 문제가 첫 번째 쟁점으로, 이를 통해 버냉키의 패러다임과 관련해 몇 가지 핵심 요소들을 검출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도전’으로, 버냉키의 새로운 통화정책 전략 모색도 당대의 경제 환경의 변화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이는 버냉키가 주도하는 ‘새로운 컨센서스’와 결부된 쟁점이다.
(1) 리스크 관리 패러다임 對 전망 기반 패러다임
월스트리트 저널의 그렉 이프는 그린스펀의 유산을 특정한 이론이나 모델에 집착하지 않는 유연성, 아니 모호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리스크 관리’라고 분명하게 못을 박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식별가능한 ‘그린스펀주의’(Greenspanism) 혹은 ‘그린스펀 준칙’(Greenspan rule) 같은 것은 없다”고 역설한다. 그린스펀의 핵심이 바로 “각종 ‘주의’(ism) 혹은 ‘준칙’(rule)에 대한 환멸이기 때문”이다.
그린스펀 스스로는 자신을 ‘베이지안’(Bayesian: 베이즈주의자)이라 부르고 있다. 베이지안 의사결정의 핵심은, “그 결과의 핵심 요인들이 알려져 있지 않을 때 가장 유력한 결과에 기반해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 있는 여러 다양한 결과들에 기반해 결정을 내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린스펀은 이런 베이지안 의사결정에 대한 자신의 선호를 바로 “리스크 관리”라고 부른다. 즉, “본질적으로 통화정책 결정에 대한 리스크 관리 접근은 베이지안 의사결정 원리를 적용한 것이다”는 얘기.
이런 틀 혹은 접근방식은 “정책 결정가들이 직면하는 리스크와 불확실성의 많은 원천들을 가능한 한 많이 이해하고, 가능하면 이런 리스크들을 정량화하고, 나아가 이런 리스크들의 각각과 결부된 비용들을 평가할 것”을 강조한다. 또 “이런 리스크들의 견지에서 물가 안정과 최대한의 경제성장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에서 정책 전략을 강구해야” 하는데, 결국 이런 접근법은 한층 큰 오류를 모면하기 위해 조그만 오류들을 의도적으로 감수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단적인 예가 지난 2003년 초 디플레이션 악몽에 대한 연준의 공세적인 대응이었다. 당시 버냉키가 그 선봉에 서기도 했지만, 그린스펀은 실제로 디플레이션이 발생할 가능성이 미약하다는 평가를 내리면서도, 그러나 만약 디플레이션이 현실화된다면 실로 재앙과도 같은 충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물론 이로 인해 자칫 인플레이션 압력이 강화될 수 있다는 점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린스펀은 의회에서 “인플레이션에 대처하는 법은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인플레이션 억제에는 비교적 자신감이 있다는 얘기. 사실 이처럼 확률분포 상에서 이른바 ‘꼬리(tail) 리스크’를 단지 인식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무게(가중치), 즉 “비용․편익” 혹은 리스크의 “본질과 수준” 및 “비대칭성”을 감안해야 한다는 게 리스크 관리 패러다임의 요체다. 당시에는 인플레이션 리스크와 디플레이션 리스크 간에 “비용․편익의 비대칭성”이 쟁점이었다.
그렉 이프는 리스크 관리 패러다임을 인식론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그가 드는 비유는 ‘고슴도치 對 여우’다. 이사야 베를린이라는 한 철학자에게서 비롯된 것인데,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의 심리학 교수 필립 테트락이 이른바 전문가들의 인식 태도를 설명하기 위해 끌어들였다. “고슴도치는 자신에 대한 회의를 등한시하고 자신의 시각과 모순되는 증거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며, 또 실수를 잘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반면 “여우는 각종 절충적인 전통에서 결론을 이끌어내며 모호성과 모순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린스펀이 바로 이런 여우다. 그의 모호한 발언, 정확한 성명에 대한 거부는 무엇보다 “경제의 부단히 변화하는 구조”, 그리고 그에 따른 “불가피하게 불완전한 지식”을 반영하는 것인데, 그린스펀은 지난 2004년 1월 강연에서 “불확실성은 통화정책 환경의 한 가지 주요한 특질일 뿐만 아니라 그 환경의 규정적인 특성이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이프는 통화정책을 ‘인식론’에 비유한다. ‘기지의 것’(what is known)과 ‘미지의 것’(what is unknown), 그리고 ‘알 수 없는 것’(what is unknowable)을 식별하는 학문 말이다. 인식론이란 본래 완전히 분석할 수 없는 인간 지식의 한계점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테트락에 따르면, 여우는 위대한 전망가가 아니라고 한다. 다만 고슴도치에 비해 큰 잘못을 덜 범하기 때문에 성공적이며, 그린스펀의 성공 역시 이런 것이다. 물론 그린스펀은 “통화정책의 성공은 전망의 질에 달려 있다”고 인정한다. 다시 말해 “리스크를 가늠할 능력은 현재의 불균형이 궁극적으로 진화하는 방식에 대한 일정한 판단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무게 중심은 전망 그 자체보다는 확률과 리스크다. 즉 “[세계 경제의 구조변화에 대한] 전망은 오로지 확률론적인 개념들로만 유용하게 묘사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점 예측(point forecasts)은 이를 둘러싼 리스크의 성격과 수준에 대한 분명한 이해로 보완돼야 한다.”
[뉴스핌 장보형 객원이코노미스트]
※본 특집의 저자인 장보형은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와 한신대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지난 10여년간 국내 정보컨설팅 업체인 와이즈 인포넷에서 '국제금융/경제 팀장'을 맡아 국제 금융시장과 세계 경제 동향 점검 및 이슈 분석을 전담한 후, 현재는 '글로벌 마켓 이코노미스트'로서 프리랜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올해부터 뉴스핌 객원 이코노미스트로 합류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