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필요한 경우 신속·단호히 대응" 다짐
마크롱 "유럽 디지털 주권 훼손 협박·강압"
[워싱턴=뉴스핌] 박정우 특파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유럽연합(EU)의 디지털 규제 입법을 주도해온 전직 EU 고위 관료와 가짜뉴스·혐오표현 감시 활동을 펴온 시민단체 인사들을 상대로 입국 금지에 해당하는 비자 제한 조치를 전격 발동했다. 동맹국의 전직 장관급 인사를 '검열 주도' 혐의로 제재 명단에 올린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로, 대서양 양안의 외교·통상 갈등이 '표현의 자유'와 '디지털 주권'을 둘러싼 전면전 양상으로 비화하는 모양새다.
23일(현지시간) 현지 언론에 따르면 마르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전날 성명을 통해 티에리 브르통 전 EU 내부시장 담당 집행위원과 비영리단체 관계자 등 5명을 대상으로 신규 비자 발급과 입국을 제한하는 조치를 부과했다고 발표했다. 이번 조치는 지난 5월 트럼프 행정부가 도입한 '해외 인사의 표현의 자유 침해 관여 시 입국을 제한할 수 있게 한 정책'에 따라 이뤄졌다.
루비오 장관은 이들을 "급진 활동가이자 글로벌 검열 산업 복합체(global censorship‑industrial complex)의 요원들"이라고 규정하며, "외국 정부의 검열 정책을 앞장서 주도하며 미국적 관점과 미국 기업을 겨냥해 플랫폼 검열·수익 차단을 압박해 왔다"고 비판했다. 미국은 특히 브르통 전 위원이 EU의 디지털서비스법(DSA) 등 규제 입법과 집행을 주도하며 미국 빅테크를 겨냥해 왔다고 보고 있다.
2022년 통과된 이 법은 대형 디지털 플랫폼 기업이 불법 콘텐츠 확산 및 선거 결과 조작을 위한 허위 정보 이용 등 특정 위험을 해결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있음을 입증하도록 규정하하고 이를 어길 경우 전 세계 매출의 6%까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다. EU는 이달 초 엑스의 계정 인증 표시와 광고 정책 등을 문제 삼아 1억2000만유로(2097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브르통 전 위원 외에 디지털 혐오표현과 허위정보 대응에 나서 온 임란 아메드 영국 디지털 혐오 대책 센터(CCDH) 최고경영자(CEO), 글로벌 허위정보 평가 단체 GDI(글로벌 디스인포메이션 인덱스) 설립자인 클레어 멜퍼드, 독일 온라인 혐오 피해자 지원단체 헤이트에이드(HateAid)의 안나레나 폰 호덴베르크와 조세핀 발롱 등 시민단체 관계자 4명도 비자 발급 제한 대상에 올랐다.
사라 로저스 국무부 공공외교 차관은 자신의 SNS를 통해 이들이 유럽의 규제 체계를 뒷받침하며 미국 기업에 부당한 검열 기준을 강요해 미국인의 보호받는 표현에 실질적인 피해를 입혔다고 지적했다.
EU와 주요 회원국은 즉각 반발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X에 올린 글에서 "프랑스는 티에리 브르통과 다른 유럽 인사들에 대한 미국의 비자 제한 조치를 규탄한다"며 "유럽의 디지털 주권을 훼손하려는 명백한 협박이자 강압"이라고 비판했다. 독일 등 다른 회원국도 "온라인 혐오와 허위정보에 대응해 온 인사들을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미국 측에 조치 철회를 촉구했다.

안토니우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역시 "동맹과 파트너 사이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며 "EU의 규제 주권과 디지털 주권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경우 신속하고 단호하게 대응하겠다"고 경고했다. EU 집행위는 미국 측에 공식적인 해명을 요구하는 한편, "EU의 규제 자율성을 방어할 수 있는 모든 옵션을 검토하겠다"고 밝히는 맞대응을 다짐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의 이번 조치가 유럽 정치인들의 즉각적인 비난을 불러일으켰으며 대서양 양안의 긴장을 고조시킬 위험이 있다고 내다봤다.
dczoomin@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