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을 가진 은둔의 지도자 김정은의 파격 행보
미국에 대한 '북중러의 전략적 이해 일치' 결과
北, 美와 대화 앞서 북중관계 개선 포석 가능성
한국, '패싱' 피하려면 美와 소통, 日과 공조해야
[서울=뉴스핌]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1년 집권 이후 처음으로 오는 3일 각국 정상과 대표들이 모이는 다자외교 무대에 선다.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전승절) 80주년 행사에 김 위원장이 참석한다는 중국의 발표가 나온 이후 전세계의 이목이 천안문 광장에 집중되고 있다. 핵무기를 손에 쥔 은둔의 나라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공개 석상에 다른 나라 정상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국제정세에 커다란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중국은 이번 전승절 행사를 통해 미국이 국제질서를 주도하던 시대가 저물고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새로운 다자주의 세력이 전면에 나서고 있음을 보여주려 한다. 중국이 김 위원장을 이 자리에 초청한 것은 그들이 구상하는 새로운 다자주의에 북한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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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5월 9일 러시아 전승절을 맞아 평양 러시아 대사관을 축하 방문해 연설하고 있다. [사진=조선중앙통신] |
이번 전승절 행사에서 눈여겨 봐야 할 요소가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북·중 관계의 회복 여부다. 최근 몇년 동안 이상 징후를 보였던 북·중이 다시 협력 관계로 돌아설 가능성이 충분해 보인다. 북·중·러의 연대를 공개적으로 과시할 것인지 여부도 관심거리다.
전승절 참석 이후 김 위원장이 보여줄 대외적 행보도 주목받고 있다. 특히 중국·러시아와 관계를 돈독히 한 북한이 이를 배경으로 미국과 대화에 나설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북·미 대화에서 '페이스 메이커'가 되기를 자처한 이재명 대통령은 한반도를 배경으로 급변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도전적 과제를 안게 될 것으로 보인다.
◆북·중 관계 개선의 신호탄
중국이 전승절 80주년 행사에 김 위원장을 초청하고 김 위원장이 이를 수락한 것은 '전략적 북·중 관계 복원'에 양측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한 것은 2019년이 마지막이다. 북한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을 계기로 러시아와 군사동맹 관계를 부활하고 전방위적 협력 관계가 됐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북·중 관계는 눈에 띄게 소원해졌다. 2023년 북한이 '조국해방전쟁승리'로 기념하는 정전협정(7.27) 70주년 행사 때 러시아와 중국을 대하는 북한의 태도는 한 눈에 봐도 크게 기울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고 중국에 대한 미국의 압박이 안보·경제·기술 등 모든 분야에서 총력적으로 가해지자 중국은 북한을 활용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 미·중 협력시대에 북한은 중국에게 외교적 부담이자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미·중이 충돌하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특히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에도 한·미, 한·일, 한·미·일 협력이 강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이 느끼는 북한의 전략적 가치는 이전과 완전히 다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와 협력하면서 생존의 활로를 찾는데 성공했던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종전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새로운 파트너를 필요로 하고 있다. 종전 이후에도 미국의 압박을 견뎌내고 전략적 입지를 유지하려면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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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0일 북한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본부청사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노동신문]2019.06.21 |
조현 외교부 장관은 31일 KBS 일요진단에 출연해 "(김 위원장이) 소원해진 중국과의 관계를 복원시킬 기회를 보고 있었지 않았나 생각한다"면서 "그동안 북한이 러시아와 굉장히 가까워졌는데, 아마 러시아의 한계를 알았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북·중·러 결속 과시
러시아 타스 통신은 전승절 열병식 때 시 주석을 중심으로 왼쪽에 김 위원장, 오른쪽에 푸틴 대통령이 자리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북·중·러 지도자가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은 탈냉전 이후 처음이다. 천안문 망루에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김 위원장이 나란히 앉는 모습은 2023년 8월 한·미·일 정상이 캠프 데비이드에 모여 '사실상의 군사동맹 관계'를 구축한 것에 대한 반격이다.
캠프 데이비드 3인은 모두 현직에서 물러났지만, 한·미·일 협력 구도를 유지하려는 3국의 의지는 여전하다. 특히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등장한 이재명 대통령이 한·미·일 협력 강화 기조를 보이고 있는 것에 중국은 상당한 실망감을 나타낸 바 있다.
이번에 북·중·러는 베이징에서 각각 양자 회담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 주석과 푸틴 대통령, 김 위원장이 별도의 3자 회담을 가질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중국이 그동안 러시아, 북한과 공동으로 서방에 대항하는 3자 연대를 구축하는 나라로 분류되고 세계질서가 신냉전 구도로 재편됐다는 평가를 받는 것을 적극 피해왔기 때문이다. 정부도 북·중·러가 공개적으로 정상회담을 개최할 가능성에 회의적이다.
중국 문제에 정통한 외교소식통은 "중국은 유럽 등 서방국과의 관계 유지가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에 그동안 북·러가 주장해온 신냉전, 진영주의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보여왔다"면서 "이번에도 중국이 북한·러시아와 하나로 묶이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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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2024년 6월 19일 평양 정상회담에서 북러 관계의 기존 조약과 선언을 대체하는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에 서명 후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조선중앙통신] |
하지만 미국에 대한 입장 만큼은 중국도 러시아, 북한과 일치하는 것이 사실이다. 중국은 북·중·러 연대를 공식화하지 않지만 각각 양자 관계를 통해 협력을 유지하고 있다. 북·중·러가 따로 모이지 않더라도 이번 전승절 행사는 현재의 국제질서에서 3국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같다는 것을 전 세계에 충분히 과시할 수 있다.
◆북한의 다음 행보는
김 위원장은 2011년 집권 이후 중국과 마찰을 빚었다. 양국이 서로를 비난하는 일도 있었다. 혈맹이던 북·중 관계가 여타 사회주의 국가와 다름 없는 관계로 변해갔다. 주한 중국대사의 입에서 "북·중 관계를 정상적 국가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중국 정부의 목표"라는 말까지 나왔다.
냉랭하게 식어가던 북·중 관계가 다시 뜨거워진 것은 트럼프 1기 북·미 회담 때문이었다. 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결정한 뒤 곧바로 중국을 방문했다. 미국과의 협상을 앞두고 북·중 관계를 회복하려는 전략적 판단 때문이었다. 김 위원장은 북·미 대화의 고비마다 중국을 찾았다. 트럼프 대통령과 3차례 만나는 동안 시 주석을 5번이나 만났다.
지금도 상황이 비슷하다. 북·미 2차 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6년 동안 김 위원장은 중국을 방문하지 않았으나,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대화에 의지를 보이고 한국이 이를 공개 지지하는 상황에서 김 위원장은 또 다시 중국 방문을 결정했다. 김 위원장의 중국 전승절 참석이 북·미 대화 재개를 위한 포석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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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로이터=뉴스핌]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2025.08.26 photo@newspim.com |
만약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과 만날 결심을 한 상태에서 중국을 우군으로 확보하려는 의도로 이번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라면 전승절 이후 한반도 정세는 급격히 요동치게 된다. 남북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이같은 변화가 일어난다면 한국에게 기회일지 위기일지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페이스 메이커'에게 주어진 고민과 과제
이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북한 문제에 대한 언급은 매우 직설적이고 솔직했다. 이 대통령은 한국의 관여로 남북 관계가 개선되기는 쉽지 않은 상태라고 인정했다. 이어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트럼프 대통령"이라며 "대통령께서 피스 메이커를 하시면 저는 페이스 메이커로 열심히 지원하겠다"고 했다.
한국의 힘으로는 북한과 대화를 모색하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고 북·미 대화만이 한반도 평화의 길을 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과 대화를 시작하면 한국이 뒤에서 적극 돕겠다는 뜻이다.
만약 북·미 대화가 열리지 않고 현재의 상태가 이어진다면 모두가 우려하는 '한·미·일 대 북·중·러'의 구도가 굳어질 수 있다. 따라서 정부는 북·미 대화를 시작으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수 있도록 미국에 적극 협력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한국을 '적대적인 관계의 다른 나라'로 규정하고 있는 북한과 트럼프 대통령이 대화를 시작한다고 해도 한국에게는 꽃길이 아니다. 한국이 관여할 수 없는 상태에서 북·미 협상이 벌어지고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안보만을 위해 북한의 핵을 제한적을 용인하는 부분적 비핵화에 합의하거나 한국을 배제한 상태에서 평화협정을 논의한다면 한국에게는 악몽이다.
북핵 문제와 한·미 관계에 정통한 전직 관료 출신의 전문가는 "만약 북·미 대화가 열린다면 직접 협상에 나설 수 없는 '페이스 메이커' 한국이 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라며 "북·미 협상에서 한국의 입장이 반영될 수 있도록 미국과 긴밀한 협력이 이뤄져야 하고 북핵 문제에서 한국와 유사한 입장을 가진 일본과 공조하는 폭을 넓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opento@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