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공산당 극비 회의록 ..."KAL기는 첩보기" 낙인찍고 조직적 은폐
고르바초프, "유감표명 하자" 제안에도 강경대응 분위기에 '어정쩡'
소련 정치국 파렴치한 KAL기 처리 '역풍'..."소련 몰락 이끌었다"
[김흥식 뉴스핌 객원논설위원]
한국인 입장에서 보면 고르바초프는 한·소 수교 성사라는 획기적 조치를 취한 고마운 정치인이다. 아마도 그의 결단이 없었더라면 수교는 상당히 늦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83년 8월31일 발생한 사할린 상공 KAL기 격추 사건에 대한 그의 애매한 태도에는 일말의 아쉬움과 함께 석연치 않은 느낌을 준다.
◆소련 공산당 극비 회의록 공개...“KAL기는 첩보기” 낙인찍고 조직적 은폐
옐친 대통령의 군사보좌관이자 국가문서관리위원장인 볼코고노프 장군은 필자와의 대담에서 냉전 시기 최대의 비극으로 기록된 KAL기 사건 처리에 관한 소련공산당 정치국 회의록을 보여주며 당시의 정치국 회의상황을 설명했다. 장군은 자신의 권한으로 관련 문건을 검토한 결과 소련 공산당의 파렴치한 행태에 충격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93년 9월 1일 사할린 KAL기 사건 10주기 맞아 사할린에서 추모비 제막식이 열렸다. 러시아 정부 대표의 추모사에는 두리뭉실한 표현으로 책임을 회피, 유가족의 분노를 샀다. [사진=뉴스핌DB] |
극비로 분류된 정치국 회의록은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조직적 은폐가 얼마나 교묘하고 비인도적으로 진행되었는 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당 서기장이던 안드로포프는 당시 병세가 위중해 개회만 선언하고 자리를 떴고 2인자였던 체르넨코가 3시간에 걸쳐 관련 회의를 주재했다.
정치국이 내린 결론은 “KAL기는 첩보행위를 하다 격추된 것이다. 당시 너무 어두워 식별이 불가능했고 소련 전투기의 경고신호에도 응답이 없어 할 수 없이 격추하게 됐다”는 식으로 우기기로 최종 정리했다. 멀쩡한 민간 여객기를 월경했다는 이유를 들어 첩보기로 낙인찍음으로써 자신들의 잘못을 희석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고르바초프, 강경대응 분위기에 ‘유감표명’ 제안에도 ‘어정쩡’
더욱 놀라운 것은, 격추의 정당성을 담보하기 위해 희생자들에 대한 유감표명 정도는 하는 게 좋겠다는 일부 정치국원들의 의견도 있었으나 군부와 KGB 등 강경파는 어정쩡한한 모습을 보이면 안된다고 반대해 그마저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점이다.
나중에 회의 결과를 보고 받은 안드로포프 서기장조차 유감표명 정도는 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했지만 보수강경파의 우두머리격인 우스티노프 국방장관이 한사코 반대해 무산됐다. 최연소 정치국원으로, 안드로포프의 각별한 신임을 받던 고르바초프는 다수의견인 강경대응에 특별한 의견을 제시하지 않은 것으로 문건은 밝히고 있다.
[서울=뉴스핌]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 |
소련의 지도급 인사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 개방적이고 합리적 성향을 보여 온 그가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였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의 정치적 후원자이자 자신을 후계자로 염두에 두었던 안드로포프의 유감표명 제안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점은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끼게 했다.
어쩌면 정치국회의록에 고르바초프의 발언이 어떤 이유로 실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최고지도자의 꿈을 키우며 때를 기다리던 고르바초프로서는 서기장의 와병과 보수파가 압도적 다수인 정치국 현실을 감안해 침묵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 소련의 파렴치한 KAL기 처리 역픙...“소련을 몰락으로 이끌었다”
결과적으로 정치국의 무모한 처리는 부메랑이 되어 소련에 일대 위기를 가져오게 된다. 전 세계적으로 ‘악의 제국’ 소련을 성토하는 소리가 봇물처럼 터졌다. 유엔본부에서 소련국기가 불타고 안드로포프를 사살하는 전자오락게임이 세계 곳곳에서 유행했을 정도였다.
특히 KAL기 사건으로 미국은 소련을 압박하기 위한 절호의 명분을 얻게 된다. 레이건 대통령이 ‘전략방위구상’(SDI)을 수립, 소련봉쇄전략을 일층 강화해 결국에는 소련을 몰락의 길로 이끌었다는 평가도 나올 정도로 KAL기 사건의 역풍은 소련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서울=뉴스핌] 모스크바 크레믈린궁내의 우스펜스키사원과 아반뇌제 종루 (2008.09.29) |
▲김흥식 뉴스핌 객원논설위원
한국외대 러시아어과를 졸업하고 1977년 동양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뎠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해직되는 아픔을 겪고 쌍용그룹에 몸담고 있다가 1988년 연합뉴스 기자로 복귀했다. 1991년 한국의 첫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파견돼 맹활약했다. 이후 연합뉴스 북한부장, 남북관계 부장, 문화부장, 논설위원실 간사, 경영기획실장을 거쳐 편집담당 상무이사를 지냈다. 퇴임후 연합뉴스 부설 동북아센터 상임이사, 중소기업진흥공단 비상임이사, 도로교통공단 비상임이사, 방송통신심의위원회 특별위원 등을 지낸뒤 현재 뉴스핌 객원논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khs@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