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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환의 예술가 이야기] 별이 빛나는 밤에, 빈센트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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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31)

미술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빈센트 반 고흐는 37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불꽃처럼 강렬한 삶을 살았다. 게다가 그의 주요 작품들은 대부분 생애 마지막 3년 기간 동안에 제작되었다. 그의 그림의 특징은 강렬한 색채, 거친 붓놀림, 뚜렷한 윤곽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며 이로 인해 그림의 모든 것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은 많은 현대회화, 특히 야수주의와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가 평생 동안 그린 800점 이상의 유화와 700점 이상의 데생 가운데,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팔린 작품은 데생 1점뿐이었다. 1890년 그가 자살했을 때, 반 고흐라는 이름은 세상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가 살아있을 때는 1888~90년 파리의 앵데팡당 미술전람회와 브뤼셀에 그림 몇 점을 출품했을 뿐이다.
그가 죽은 뒤에도 한참 동안은 파리와 브뤼셀에서 그를 기념해 몇 점의 작품들만이 전시됐을 뿐이며, 그에 대한 비평 또한 단 한 번밖에 나오지 않았다. 항상 가난했던 그는 형의 재능을 무조건 믿었던 거의 유일한 팬이자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의 도움으로 간신히 생활을 유지했다. 그러다 20세기를 지나면서 비로소 그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로 추앙을 받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1853년 네덜란드 브라반트 북쪽에 위치한 그루트 준데르트(Groot Zundert)라는 작은 마을에서 개신교 목사의 6남매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와 떨어져 기숙학교에 다녔으나 가난으로 15세 때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1869년 숙부가 운영하는 화랑의 헤이그 지점에서 판화를 복제해 판매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이후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 등으로 옮겨 다니며 화랑 일을 이어나갔으나, 종교적 관심사에 빠져 화랑 일을 소홀히 해 해고당하게 된다.
이후 성직자의 길을 열망했던 고흐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신학대학 입학시험에 낙방해서 목사의 길이 멀어지자 전도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후 그는 최하층민의 생활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오두막에서 지내는 등 열심히 전도활동을 펼쳤다. 그럼에도 그의 광신도적인 기질과 격정적인 성격을 우려한 교회는 그를 전도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실의에 빠진 고흐는 1880년부터 그동안 계속해온 습작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그림 그리기에 푹 빠지게 되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라고 믿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빈털터리에다 믿음마저 잃어버린 그는 절망 속에서 모든 사람들과 접촉을 끊고 진지하게 그림을 그렸다. 마침내 그는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전달해야 한다는 확신과 함께 예술을 통해 인류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과정에서 자신의 창조력을 깨닫게 되고 또 자신감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고흐는 헤이그로 가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받았다. 반면, 열정을 보여 왔던 종교에 반감을 가지고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된다. 당시 매춘부 출신의 한 여자와 동거를 하며 지냈는데 그녀는 알코올 중독자에다 매독 환자였다. 고흐의 가족들은 그녀와 헤어지기를 강요했다. 그는 괴로웠지만 생활비를 줄이고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그녀와 어린아이를 저버리게 되었다. 고흐는 이 때문에 양심의 가책으로 오랫동안 고통 받게 된다.
한편, 이 시기의 그림 주제는 언제나 노동자· 농민 등 하층민의 생활과 풍경이었다. 초기 걸작 《감자 먹는 사람들》도 이 무렵의 작품이다. 이 그림은 먹고살기 위해 고된 일을 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어둡고 칙칙한 색조를 띠고 있다.
이후 1886년 파리로 다시 이주하면서는 전위적인 예술기류에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된다. 특히 인상주의 화가 및 신인상주의 화가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고 일본 판화에도 매료되었다. 이에 그때까지의 렘브란트와 밀레의 어두운 화풍에서 벗어나 밝은 화풍으로 바뀌었으며, 작품활동 또한 정열적으로 하였다. 자화상이 급격히 많아진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그러나 고흐는 곧 파리라는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1888년 2월 보다 밝은 태양을 찾아서 프랑스 아를로 이주하였다. 아를로 이주한 뒤부터 죽을 때까지의 약 2년 반이야말로 고흐 예술의 참다운 개화기였다. 그는 그곳의 밝은 태양에 감격하여 《아를의 도개교(跳開橋)》, 《해바라기》와 같은 걸작품을 그렸다.
아를생활에 매료된 그는 성직자들의 수도원 같은 작가의 창작촌을 꾸미고 싶어 했다. 이는 종교의 구도자와 같은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런 성향은 동생이자 화상이었던 테오를 곁에 두고서도 생전 자신의 작품은 팔지 않은 점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고흐에게 그림 작업은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일종의 정진이자 수행이었기 때문이다.
고흐는 아를을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곳으로 생각하고 그의 작품에도 등장하는 방 4개가 딸린 '노란집'을 임차하게 된다. 그러고는 2년 전 동생 테오와 함께 파리에서 만나 호감을 가지고 있던 고갱에게 일종의 초청장을 보내게 된다.

고흐의 삶과 작품 활동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 둘 있는데, 한사람은 동생 테오이고 다른 한사람은 화가 고갱이다. 고흐는 방대한 양의 미술작품과 함께 수많은 편지들도 남겼는데, 편지의 대부분은 동생 테오에게 쓴 것이다. 미술품 중개상이었던 테오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주로 다루었다. 두 사람 간의 형제애는 매우 두터웠다. 형이 비록 짐인 존재였지만, 테오의 감성적인 삶에 있어 고흐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테오는 그런 존재인 형을 재정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끝까지 지원해주었다.
편지에 따르면 두 형제는 격렬히 싸운 적도 있었지만, 테오의 결혼 전까지는 함께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오랜 시간 형에게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면서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던 테오의 삶은 고흐의 죽음 이후 급격히 무너졌다. 테오는 우울증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석 달 뒤에는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된다. 결국 형 고흐가 죽은 지 6개월 뒤인 1891년 1월 그도 세상을 떠나게 된다. 1914년 테오의 시신은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있는 형 고흐의 묘지 옆으로 이장되었다.

고흐의 삶과 작품에 영향을 준 또 다른 한 사람이 화가 고갱이다. 고갱은 서른다섯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는데 그 전에는 수습도선사, 증권거래인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었다. 온전히 화가로서의 삶을 살기로 한 고갱은 당시 화상을 하고 있던 고흐의 동생 테오의 도움을 많이 받게 된다. 그리고 테오를 통해 고흐도 만나게 된다.
1888년 9월 21일, 고갱은 고흐의 초청을 받고 아를에 도착하게 된다. 고갱이 고흐의 부탁을 받아들인 이유는 당시 건강상태 악화와 경제적 궁핍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그동안 고흐의 동생 테오가 자신의 작품을 팔아주면서 재정적으로 지원을 해준 데 대한 감사의 뜻도 곁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어렵게 모신 고갱을 고흐는 진심으로 대해주었다. 당시 고흐에게 있어 고갱은 창작욕구를 자극하는 일종의 영감적인 존재였었다.
고흐와 고갱은 창작촌 공동생활을 시작한 이후 처음 얼마동안은 잘 지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그들 사이는 삐걱대기 시작했다. 우선 고흐가 생각하는 창작촌 운영방식이 문제였다. 고갱은 처자식마저 버렸던 로맨티스트이자 팔기 위한 작품을 제작했던 현실주의자였지만, 고흐는 자신이 만든 운영원칙을 고수하였던 원칙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였다. 두 달여 동안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살았어도 사실 그들은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이별이 숙명이었던 관계였다.
화풍 또한 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고갱은 이렇게 말했다. “고흐는 낭만적이나, 나는 원초적인 것을 추구하는 편이다. 색채만 해도 그렇다. 그는 두껍게 바른 물감으로부터 우연한 효과를 기대하지만, 나는 덧칠한 화면을 좋아하지 않는다.”

결국 고갱이 먼저 결별을 통보한다. 그러자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잘라버린다. 그러고는 사창가의 매춘부에게 자신의 왼쪽 귀 조각을 건넸다. 고흐는 매춘부의 신고를 받고 도착한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아를의 주민들은 고흐를 ‘미친 네덜란드 사내’라고 하며 그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강요했다. 이런 일이 생기자 고갱은 말없이 창작촌을 떠났다. 이후 고흐는 1889년 5월 8일, 프로방스 지방의 생레미에 있는 한 정신병원에 들어갔다.
그 후 고흐의 생활은 발작과 열정적 작품활동의 연속이었다. 그는 정신병원에서 1년간 치료를 받는 동안 되풀이되는 발작에 시달리다가도 정신이 돌아오면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마구 그림을 그려댔다. 이 시기에 그의 작품을 지배한 주된 특징은 현실과 격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일종의 슬픔이었다. 그 결과 《별이 빛나는 밤 (The Starry Night)》, 《삼나무 (Cypresses)》, 《올리브 나무 (Olive Trees)》등이 만들어졌다.

‘별이 빛나는 밤’, 캔버스에 유채, 73.7×92.1cm. 미국 뉴욕 현대 미술관 <사진=이철환>

특히 《별이 빛나는 밤》은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그가 그린 밤하늘에서는 구름과 대기, 별빛과 달빛이 폭발하고 있다. 하늘은 굽이치는 두꺼운 붓놀림으로 불꽃같은 사이프러스와 연결되고, 그 아래의 마을은 대조적으로 평온하고 고요하다. 이 작품이 사람들에게 주는 이미지가 너무 강렬했기에 결국 노래로도 만들어지게 된다.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Perhaps they'll listen now
Stary, Stary night

이젠 깨달았어요
당신이 나에게 뭘 말하려고 했었는지
얼마나 영혼이 아팠는지
얼마나 그들로부터 자유를 갈망했는지
그들은 어떻게 듣는지도 모른 채, 들으려 하지 않았죠
지금은 아마 귀를 기울일 거예요
별들이 빛나는 밤에

연속된 발작과 그림 제작에 지친 고흐는 1890년 5월,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정착하게 된다. 그곳에는 오랜 친구이자 의사인 가셰가 있는 곳이었다. 친구의 정성어린 치료 덕분에 한때 건강이 회복되어 발작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듯했으나 다시 심신이 쇠약해지게 된다. 그러나 고흐는 여기서 머문 70여일의 짧은 기간 동안 무려 77점에 달하는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기게 된다.
그즈음 또 하나의 명작인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 완성된다. 1890년 7월 27일, 고흐는 병원 옆의 들판으로 걸어 나간 뒤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았다. 바로 죽지는 않았지만 총상은 치명적이었다.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간 이틀 뒤,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3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리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동생 테오 또한 죽음을 맞게 된다. 처음에는 다른 곳에 있던 테오의 시신은 나중에 형 고흐가 묻혀 있는 오베르의 묘지로 이장된다. 이로서 두 형제는 죽어서도 나란히 함께하게 된 것이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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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인가 '조선'인가 호칭 논쟁 [서울=뉴스핌] 김현구 기자 = 최슬아 숭실대 교수는 29일 "북한이라는 호명이 상대방을 한반도의 일부처럼 위치시킨다면 조선이라는 호명은 하나의 독립된 행위자로 인정하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최 교수는 "북한을 인정해야 된다는 주장은 어떤 온정적인 제안이 아니라 상대를 인정함으로써 불안을 낮추고 관계를 보다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굉장히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정치학회(회장 윤종빈)는 이날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평화 공존을 위한 이름 부르기:북한인가 조선인가' 주제로 특별학술회의를 열었다. 통일부는 관련 논의를 공론화한다는 취지에서 이번 학술회의를 후원했다. 사회를 맡은 권만학 경희대 명예교수는 "호칭은 기본적으로 식별 기능을 갖지만 정치적 호칭이 되는 순간 이데올로기를 담게 된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북한은 '대한민국'을 공식 명칭으로 부르며 남쪽을 외국으로 재정의했다"면서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북한' '북측'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며 토론 필요성을 강조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 들어서며 도어스태핑을 갖고 최근 북한 '핵시설' 발언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진=뉴스핌DB] ◆ 김성경 "호칭은 분단 산물…'조선' 관계 전환 출발점" 김성경 서강대 교수는 "북한이라는 호명은 비공식적·약칭적 표현이지만 분단 80년 동안 누적된 정치적 의미를 가진 것"이라면서 "북한을 계속 북한이라고 부르는 한 우리 안에 북한이 계속 갇힐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학계에서는 (북한을) 조선, 북조선으로 부르는 경향이 좀 있었다"며 "남과 북의 국가 정체성이 이미 상당히 공고화돼 있는 현 상황에서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 맺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북한을 계속 유지한다는 것이 평화공존이나 통일에 더 도움이 된다는 논리적 근거를 찾기 어렵다"면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통일은 남북이 서로를 인정 존중하고 그 맥락 안에서 관계를 맺고 남북 주민이 통일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제시했다. ◆ 권은민 "국호 사용, 국가 승인 아냐…정치가 먼저, 법은 따라간다" 권은민 김앤장법률사무소 변호사는 "북한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또는 'DPRK'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꼭 국가 승인이나 정부 승인을 구성하지는 않는다"면서 "국가 승인은 정치적 행위이고 국가 의사 표시다. 그렇게 부르더라도 국가 승인과는 무관하다라고 선언을 하면 정리가 되는 문제"라고 진단했다. 권 변호사는 "남북관계는 법률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정치의 영역에 가까운 것 같다"면서 "과거에도 정치가 큰 틀을 규정하고 법과 제도가 따라가는 변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권 변호사는 "남북 기본합의서 제1조는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돼 있다"면서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것이 그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권 변호사는 "국호 사용은 상호 주권을 존중하는 취지의 기존 합의를 계승하는 것"이라면서 "당사자 표기는 상대방이 원하는 공식 국호를 불러주고 그것이 국가 승인은 아니다라는 것을 전제로 하면 된다"고 제언했다.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 북한 국무위원장 김정은이 군수공업을 담당하는 제2경제위 산하 중요 군수공장을 방문했다고 관영 조선중앙통신이 12일 보도했다. 사진은 김정은이 이 공장에서 생산된 권총으로 사격하는 모습. [사진=북한매체 종합] 2026.03.12 yjlee@newspim.com ◆ 이동기 "독일도 경멸적 호칭 쓰다 공식 국호 전환…출발은 이름" 이동기 강원대 교수는 "서독은 동독을 경멸적 표현으로 불렀지만 긴장이 격화되면서 더 큰 평화 정치에 대한 구상이 폭발했다"면서 "국제 환경이 좋지 않을수록 평화 화해 논의가 공존에 대한 요구나 필요를 폭발할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이 교수는 "독일 정치권에서는 헤르베르트 베너 전독문제부(통일부) 장관이 가장 먼저 동독 공식 국호를 사용했다"며 "당시에는 언론의 융단 폭격을 받았지만 시간이 해결해줬다. 국제법적으로는 여전히 인정하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국가로 승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원칙을 고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인내만으로도 부족하다"면서 "결국 원칙 고수와 실용주의가 결합하는 모든 출발은 국호의 제대로 된 호명이고, 동시에 장기적으로는 근본 전환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 "호칭 변경, 굴복 아닌 공존 가능성 넓히는 정치적 전략" 패널 토론에서 전문가들은 조선 호명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제시했다. 김태경 성공회대 교수는 "젊은 세대에는 '둘의 우리'가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시점"이라며 "우리가 조선을 일종의 주권 국가로서 인정하는 과정은 결국 우리에 대한 자기 인정과 그들에 대한 인정이 같이 결합되는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김주희 국립부경대 교수는 "핵심은 인정과 통일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라면서 "실질적으로 가는 데 있어서는 담론과 제도, 정치 차원에서의 접근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 교수는 "호칭을 바꾸는 것은 굴복이 아니라 적대를 줄이고 공존의 가능성을 넓히는 하나의 정치적 전략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hyun9@newspim.com 2026-04-2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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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알發 쇼크에 리츠업계 초긴장 [서울=뉴스핌] 정영희 기자 = 국내 1호 해외 부동산 공모 리츠인 제이알글로벌리츠가 자산 가치 하락과 유동성 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상장 리츠 가운데 사실상 첫 디폴트 사례가 발생하면서 시장에 적잖은 충격을 주고 있다. 다만 업계에서는 이번 사안을 개별 리츠의 리스크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며, 전체 시장으로 확산되는 시스템 리스크 가능성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정부는 관련 시장에 대한 긴급 점검에 착수하는 한편, 필요 시 유동성 지원과 함께 구조 개선을 병행하는 등 시장 안정화 대책을 추진할 방침이다. [AI 그래픽 생성=정영희 기자] ◆ 무너진 해외 부동산 가치…유동성 위기 예견됐나 30일 리츠업계에 따르면 제이알투자운용의 기업회생 절차 돌입으로 인해 투자자들의 긴장감이 시장 전반으로 확산하는 모양새다. 국내 대형 독립계 리츠 자산관리회사인 제이알투자운용이 2020년 국내 최초로 유가증권시장에 안착시킨 해외 부동산 공모 리츠다. 벨기에 브뤼셀 중심부에 위치한 파이낸스타워와 미국 뉴욕 맨해튼의 498세븐스애비뉴 등 대형 상업용 오피스 빌딩을 기초 자산으로 편입해 운용해 왔다. 그러나 금리 상승 등의 영향으로 벨기에 브뤼셀 파이낸스타워 가치가 떨어지면서, 단기사채 400억원을 상환하지 못해 지난 27일 서울회생법원에 회생 절차 개시를 신청했다. 한국거래소는 전일 매매 거래를 정지하고 관리종목으로 지정했다. 이번 사태는 어느 정도 예견된 수순이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제이알글로벌리츠는 지난 1월 12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공시했으나 해외 자산의 감정평가서 수신 지연 등을 이유로 한 달 만인 2월 이를 자진 철회했다. 핵심 자산인 벨기에 파이낸스타워의 감정평가액이 급락하면서 현지 대주단과 약정한 담보인정비율을 초과했다. 임대료 등으로 발생한 현금 흐름을 대출 상환에 우선 충당하도록 묶어두는 캐시트랩(Cash Trap, 현금 동결)이 발동되더니 기업회생으로 이어졌다.  박광식 한국기업평가 수석연구원은 "올 들어 차입 만기 도래에 따른 차환 부담이 지속되는 가운데 환헤지(환율 고정 상품) 정산금 명목으로 약 1000억원의 추가적인 자금 조달이 시급하다"며 "캐시트랩 해소를 위해서는 약 7830만유로(한화 약 1354억원)의 현지 차입금 상환을 위한 추가 재원 조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일제히 꺾인 리츠주…시스템 리스크 확산은 기우? 이 같은 악재에 상장 리츠 전체에 대한 투자 심리가 급격히 악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고개를 든다. 실제로 한국거래소 거래 동향을 살펴보면 이날 리츠 종목들은 일제히 곤두박질쳤다. 마스턴프리미어리츠가 큰 폭으로 미끄러진 것을 비롯해 한화리츠, 삼성FN리츠, SK리츠, 코람코라이프인프라리츠 등이 급락세를 면치 못하며 시장의 불안감을 드러냈다. 뚜렷한 성장 가도를 달리던 리츠 업계는 발을 동동 구르는 처지가 됐다. 한국리츠협회 통계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종가 기준으로 국내 증시에 상장된 25개 리츠의 시가총액은 9조7778억원을 기록했다. 리츠 시장은 지난해 1월 8조103억원 수준에서 같은 해 9월 9조2048억원을 돌파했고 5개월 만인 지난 2월에는 10조원을 넘어서는 등 몸집을 불려왔다. 그동안 일반 주식에 밀려 상대적으로 소외됐지만, 최근 코스피 강세장 속에서 안정적인 피난처로 주목받은 결과다. 법적으로 배당 가능 이익의 90% 이상을 의무적으로 배당해야 하는 구조적 특성 덕분에 확실한 현금 흐름을 선호하는 투자 자금이 대거 몰린 것도 호재 원인 중 하나로 제시됐다. 그러나 이번 사태의 파장이 전체 금융 시장으로 퍼질 것이란 예측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국내 상장 리츠 22개사 중 해외 자산을 보유한 비중은 14.3%이지만, 전체 자산 기준으로 환산하면 해외 자산 비중은 1.2%에 불과하다. 국내 상장 리츠의 총투자 자산 대비 해외 자산이 차지하는 파이가 극히 작아 전이 가능성이 낮다는 뜻이다. 지난달 말 자산 구성 및 투자 유형별 포트폴리오 비중을 보면 주택이 44.0%로 가장 컸다. 오피스는 35.3%에 머물렀으며 리테일 6.4%, 물류 6.4%, 혼합형 3.6%, 기타 3.2%, 호텔 1.1% 순으로 나타나 이번 위기의 진원지인 해외 오피스 리스크와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수희 LS증권 연구원은 제이알리츠의 최근 기준 발행 잔액이 약 4000억원으로 전체 크레딧 시장 규모와 비교하면 찻잔 속의 태풍 수준이라고 일축했다. 일반 크레딧물과 달리 리츠가 발행한 회사채는 개인 투자자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아 기관 투자자 중심으로 굴러가는 국내 크레딧 시장 심리에 타격을 주기는 구조적으로 어렵다는 판단이다. 김은기 삼성증권 연구원 역시 이번 이벤트가 단기사채 미상환으로 불거진 만큼 단기 자금 시장 경색이 회사채 시장으로 파급될까 우려하는 시각이 존재하지만 최근 풍부한 단기 자금을 바탕으로 기업어음 금리가 안정적으로 낮게 유지되고 있어 과거의 신용 위기와는 양상이 완전히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 국토부 방화벽 구축 총력전…상장리츠, 자산 다각화 과제로 다만 해외 부동산 자산에 직간접적으로 투자하는 리츠 종목들은 당분간 위축된 행보를 보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현재 해외 부동산 자산에 투자하는 상장 리츠는 KB스타리츠, 미래에셋글로벌리츠, 마스턴프리미어리츠, 신한글로벌액티브리츠, 디앤디플랫폼리츠, 이지스레지던스리츠 등이다. 이 중 해외 자산 구성 비중이 100%인 곳이 3개사, 50% 이상이 2개사, 50% 미만이 3개사로 파악됐다. 대표적으로 디앤디플랫폼리츠는 일본 소재 아마존 물류센터에 간접 투자 중이며 이지스레지던스리츠는 미국 소재 임대주택 및 대학 기숙사에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이은미 나이스신용평가 수석연구원은 "해외 자산의 장부 가치 비중이 각 리츠 총자산의 5~30% 수준에 그쳐 전반적인 쏠림 현상은 없다"면서도 "해외 자산을 보유한 개별 리츠의 경우 현지 대출 약정 위반에 따른 현금 흐름 통제와 국내 채무 차환 부담이라는 이중고를 동시에 겪을 수 있어 리스크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글로벌 부동산 시장의 한파도 부담이다.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주요 도시 상업용 부동산 가격은 전년 동기 대비 4.7% 떨어졌다. 고점을 찍었던 2022년과 15%나 증발했다. 런던과 베를린 등 유럽 주요 도시의 상업용 부동산 가격은 30% 넘게 폭락했다. 정부도 사태의 엄중함을 인지하고 발 빠르게 방화벽 구축에 나섰다. 국토교통부는 이날 오후 김이탁 제1차관 주재로 금융위원회, 한국부동산원, 금융감독원 등 관계 부처를 긴급 소집해 점검 회의를 열었다. 리츠 시장 전반의 현황을 점검하는 한편, 투자자 보호를 위한 대응 방향을 집중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자리다. 국토부 관계자는 "제이알글로벌리츠의 부실화 과정에서 불거진 각종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전일 합동 검사에 착수했으며, 불법 행위가 적발될 경우 엄정 대응할 방침"이라며 "시장 안정을 위해서 대기업이나 공기업이 최대주주가 되는 앵커리츠를 공급하고, 변동성이 통제 수준을 넘어설 경우 채권 및 자금 시장 안정 프로그램 규모를 즉각적으로 늘릴 수 있도록 비상 대응 체계를 가동하겠다"고 말했다. 시장 전문가들은 사태 수습을 넘어 리츠 시장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과 신뢰 회복이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상장 리츠의 주가를 궤도에 올려놓고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투자자의 신뢰를 되찾는 것이 급선무라고 지적했다. 김필규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정보의 투명성이 담보된 상태에서 시장 상황에 맞게 자금 조달의 유연성을 높여주고, 우량 자산 편입과 리츠 간 합병을 통해 자산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는 정책이 뒤따라야 한다"며 "자산관리회사 역시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운용 현황과 배당 전략 등을 공개하고, 적극적으로 소통함으로써 정보 비대칭으로 인한 불신을 거둬내야 한다"고 제언했다. chulsoofriend@newspim.com 2026-04-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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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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